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38화 (38/301)

# 38

수상한응시생

실기시험이 시작되었다. 실기는 각 각성자가 보유한 자신의 스킬을 가지고 감독관의 지명에 따라 시합을 하는 것이다. 스킬의 종류가 제각각이기에 어떻게 그것으로 평가를 하겠냐 하겠지만 사실 시합의 승패는 보다는 참관한 세 명의 감독관들이 스킬을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승패가 완전히 배제되는 건 아니다.

이 실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순수한 실제 전투력도 측정하는 것이다. 전투력이라는 것이 꼭 스킬만을 평가하는 자리던가. 그 사람이 보유한 전투센스나 스킬 외의 소양등도 함께 측정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멋들어진 스킬 하나 가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받쳐주는 기본 소양이 없으면 그냥 스킬 자판기일 뿐이다.

“물리계열 응시자들의 시험이 먼저 진행되겠습니다. 호명하면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1경기장 3번 5번, 2경기장 10번 24번, 3경기장 8번 11번!”

수석감독관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자 해당 번호의 응시자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몇몇 감독관들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 이유는 제황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빠르게 시합을 할 필요가 없는 인물, 조금의 시간이라도 마나를 회복할 시간을 주는 게 응당 당연한 것이다.

3경기장으로 들어선 제황은 맞은편에 선 이를 쳐다봤다. 약 2미터는 될 듯한 거한이다. 육체계열 응시자들 중 몸이 가장 좋은 이였는데 근육을 갑옷처럼 둘렀다. 기세 또한 심상치 않고 마주 노려보는 눈은 침착해 보였다.

“시합 규정을 설명하겠습니다. 시합 내에서 무기의 사용은 허가됩니다. 다만 날붙이가 달린 무기는 일체 금지되며 이것은 아티펙트를 보유한 로더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이를 위해 시합장 양쪽에는 규정에 부합되는 무기들이 비치되어 있으니 무기가 필요한 응시자는 그곳에서 무기를 고르기 바랍니다. 또한 본인의 무기를 사용하고 싶을 때는 감독관에게 미리 확인 받으시면 됩니다. 아울러 절삭력 강화 스킬이나 발출형 스킬의 보유자일 경우 주의를 부탁드리며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목숨을 위태롭게 할 경우 자동으로 탈락됩니다.”

감독관의 말이 끝나자 거한은 무기거치대로 걸어가 거대한 워해머와 방패를 손에 들었다. 전형적인 탱커의 무장, 상대의 스킬과 능력치가 어떤지 대략 감이 잡히는 제황이었다. 신체적 피지컬도 상당히 높으니 육체계열자중 수위의 실력자이리라.

제황은 준비해온  검은색 봉을 손에 들었다. 상대의 무기에 비해 너무나 작고 가늘어 한 번 막으면 그대로 부러질 듯한 봉이지만 제황은 그것을 가볍게 손으로 돌리며 시합장 중앙에 서 있는 감독관에게 다가가 봉을 넘겼다.

제황에게 봉을 받아든 감독관이 제황의 무기를 세심하게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 같았지만 받아든 봉이 의외로 무겁자 감독관은 봉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뼈군요.”

“예.”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감독관이 제황에게 봉을 넘겨줬다. 그러면서 작게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저 친구의 스킬은 방패를 이용하는 두 개의 탱커스킬입니다.”

그의 말에 제황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치 왜 그걸 가르쳐 주냐는 듯 하다. 그러자 감독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알아야 시합이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감독관의 말에 제황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사정이 있어 배려해 주지는 못하지만 나름 핸디캡을 줄여주려는 감독관의 작은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시합 시작!”

곧이어 시합이 시작되고 각 경기장에서는 요란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각자 가진바 기술을 모두 쏟아내기 위해 전력으로 격돌하는 소리다. 그러나 제 3경기장은 조금 조용했다.

거한은 방패를 곧추세운 채 제황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했다.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체격이 외소하고 옷이 허름하지만 그가 앞선 체력장 모든 부분에서 1위를 한 걸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이 비록 전투력까지 강하다는 반증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경계할 만 하다.

그와 마주선 제황은 봉을 가볍게 두 손으로 든 채 그를 마주해 있다. 일반적인 봉술의 자세와는 틀리다. 보통 무기의 끝을 상대에게 겨누는 것이 보통인데 그가 봉을 든 자세는 마치 공격해 오는 것을 막는 것처럼 사선으로 들고 서 있을 뿐이다.

‘뭔 놈의 눈빛이 저렇게 무심해.’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탱커를 지향하기에 전투를 시작하기 전 상대를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는 중인데 지금 그의 분석으로 나오는 상대는 완전한 무심이었다. 마치 무기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빌어먹을...’

제황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거한은 일단 자신이 선공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압!”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방패를 앞세운 거한이 제황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단순한 돌진이 아닌 스킬인지 앞세운 방패에는 푸르스름한 마나가 덧씌워져 있었다. 그 기세가 마치 달려드는 곰과 같아 함부로 방어하기도 힘들다. 아니 봉으로 막으려 했다가는 그대로 박살날 기세다.

방패가 거의 근거리에 다다랐을 즈음 제황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그것은 방어가 아니다. 코뿔소처럼 돌진해 오는 거한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선다. 그리고 봉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후웁!”

거한은 제황이 다가서자 그대로 방패로 후려쳐 날려버리려 했지만 그 단 한걸음이 그의 의도를 모조리 무산시켜 버렸다. 방패를 밀려 했지만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려다보니 제황의 봉 끝이 팔꿈치 부분을 교묘하게 찌르고 있었고 우습게도 그 작은 찌르기가 그의 움직임을 봉쇄해 버렸다.

제황의 움직임을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대쪽 손에 들린 워해머의 끝이 그대로 머리를 찍어 내려오는데 그 손목을 봉을 수평으로 하여 다시금 막아냄과 동시에 빙글 돌아 거한의 뒤를 점했다. 다시금 이어진 한 발자국으로 그는 사각을 적에게 내줬다.

파파파팍!!! 파팍!

뒤를 점한 제황의 봉이 순간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거한의 등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는 듯 싶지만 거한은 석고상이 된 듯 그 공격을 고스란히 두들겨 맞았다.

“으...으아아악!”

거한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비명을 지르는 것 뿐...다른 이가 보기에는 미련하게 등으로 봉의 공격을 버티는 듯 싶지만 사실 그도 몸을 돌려 그 공격을 방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동작을 취하기 위해서는 예비동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몸을 돌리기 위해서는 일단 허리를 돌리거나 혹은 다리를 움직여 발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만 상대의 공격은 그 예비동작 자체를 모조리 방해하고 있었다. 충격량이 작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넘어갔지만 이제는 맞을 때마다 뼛골까지 시리는 고통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몸을 돌려 방패로 방어하려했다. 문제는 그 행동 또한 제황의 궁기안에 모두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방패를 돌리는 손목이 봉에 걸렸다. 어깨가 돌아가지 못하니 반대편 손에 있던 거대한 워해머는 장식품이다. 과감하게 방패와 팔 사이로 몸을 끼워넣자 방패가 떨어져 나왔다. 당황하는 거한의 안으로 더 들어가 봉으로 겨드랑이와 머리를 두들긴 뒤 옆구리에 무릎을 박아넣고 고통에 허리를 숙이는 이의 관자놀이를 장저로 찍어버린다.

“그...그만!”

감독관이 시합 중지를 외치려 했지만 제황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퍼어어엉!

몸을 빙글 돌린 제황이 봉의 끝을 잡고 풀스윙으로 거한을 가격하자 거한은 앞으로 총알처럼 날아가 무기 거치대에 처박혔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나간 시간은 고작 30초 가량... 시작은 다른 시합장보다 늦었지만 결과는 가장 빠르게 나타났다.

“11번 승!”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감독관이 제황을 향해 손을 들며 외쳤다.

“후...”

가볍게 숨을 내쉰 제황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감독관의 얼굴에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이 걸렸다. 노파심에 상대의 스킬에 대해서도 알려 줬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한 실력이었다. 순둥이일 줄 알았는데 상대를 박살내는 기세를 보자니 칼집안의 칼이다.

뽑혀 나오는 순간 상대가 누구든 갈라버리는 그런 칼 말이다.

“우와아아아...”

장내에 있던 모두가 제황을 향해 환호를 질렀다. 승패를 떠나서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공격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합을 맞춰 짜고 치는 듯한 그림 같은 공격이었고 그것을 본 모든 이들의 입에서 환호가 저절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황은 그런 환호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인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봉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제황에게 다가와 뭔가 말을 붙여보고 싶어하는 눈치지만 이제는 확연히 달라진 제황의 분위기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했다.

-뭐 화난 거 있어?

-무슨 말이야.

-왜 그렇게 감정 담아 두들겨 패?

-어떻게 알았니?

-내가 널 모르겠어?

궁기의 시큰둥한 대답에 제황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는 자신을 속속들이 아는데 하필 그게 인간이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궁기의 물음에 제황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지금 그가 한 것은 용혈무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피동작은 용혈무였지만 두들겨 팬 것은 그냥 마구잡이로 두들긴 것이었다. 제황의 봉 끝에 담긴 감정을 눈치 챈 궁기가 물어왔다.

-속은 시원해?

-어느 정도...

-뭐 그럼 됐군. 호호호... 얼빠진 놈들 많군. 뭘 그리 대단한 걸 봤다고 화살 한 번 날려주면 아주 그냥...

-용혈기 돌릴 거야. 조용...

-알았어.

제황의 시합 이후 제황과 같은 임팩트 있는 시합은 없었다. 모두 사력을 다해 시합에 임했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난전도 더러 나왔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1시간 가량의 점심시간 후 마법계열 응시자들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11번 응시자님.”

눈을 감고 있는 제황에게 감독관이 다가왔다. 전에 없는 정중한 물음이다.

감독관의 목소리에 제황이 눈을 떴다.

“11번 응시자님은 지망하시는 바가 힐러시니 마법계열 시합 중 부상자가 나왔을 때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으로 시험이 진행됩니다.”

감독관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감독관이다. 제황이 의구심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감독관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제황에게 말했다.

“잘못된 걸 바로잡아 드리겠습니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감독관은 제황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던 제황은 피식 웃은 후 이내 다시금 눈을 감았다.

***

감독관은 수석감독관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2층의 참관실로 향했다.

참관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정문을 열고 나가야 했기에 그는 정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마침 정문이 열리며 수석감독관이 들어온다. 그러자 수석감독관을 발견한 감독관은 그를 향해 말했다.

“수석님. 할 말이 있습니다.”

상당히 큰 결심을 한 그이기에 목소리에 긴장이 어렸다.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인 수석 감독관은 뭔가에 쫓기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말했다.

“큰일이 아니라면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큰일입니다. 아주 큰일이죠.”

감독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수석의 입장에서는 큰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큰일이다. 어쩌면 이번 행동으로 자신은 다신 감독관의 자리에 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수석은 이 대구지부에서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니까.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으면 평생 후회에 싸여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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