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1등 좀 하겠습니다
슈욱...
유압이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 낡은 무게조끼가 그들이 입고 있던 스포츠웨어 표면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후 버클과 벨크로를 대충 조절한 뒤 위아래로 깡총깡총 뛰는데 무게조끼는 그들의 동작에도 전혀 덜렁거리지 않았다.
"흐음..."
흔히 일반인들에게 10킬로미터라고 하면 중거리 마라톤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각성자들에게는 완주하는 내내 전력달리기가 가능한 거리였다. 그렇기에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도 기록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데 100킬로그램 가량 되는 무게 조끼가 위아래로 널뛰면 제대로 뛸 수조차 없다.
"내 실수네."
체력장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지했고 매일 연습하기는 했지만 착용하는 조끼에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에게만 이런 걸 줬다면 항의라도 하겠지만 모두가 같은 물건을 받았다면 미리 염두에 두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다. 아까 자신과 비슷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던 이를 보니 덩치가 꽤 커서인지 움직이는데 애로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제황은 버클과 벨크로를 최대한 조인 뒤 출발선으로 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티면 그만이다.
"현재 이 운동장은 한 바퀴 당 500미터 입니다. 총 20바퀴 돌면 되겠죠. 달리던 중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피치 못할 몸싸움으로 넘어지거나 달릴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해당 응시생은 무조건 탈락입니다. 합격여부는 기록으로 따지지만 달리던 중 생기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각 응시생들이 알아서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제황의 주변에 있던 덩치 좋은 이들이 비교적 마른 체격의 제황을 곁눈질하며 의미심장한 썩은 미소를 보냈다. 제황 또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들이 왜 이런 미소를 짓는지 안다. 중간에 팔 등으로 쳐서 탈락을 시킬 속셈이다.
시험인데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누군가 말할 수도 있겠지만 듣기로 과거에는 이보다 훨씬 심했다고 했다. 죽는 이들도 더러 나왔다니까.
-이 송사리들은 왜 네게 적대감을 보이지?
궁기안을 담당하는 궁기가 쓸데없는 적대적 감정이 느껴지자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글쎄 나도 궁금해.
궁기의 물음에 제황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자신이 그들과는 다르게 허름한 옷을 입어서? 아니면 그들과 같은 조각 같은 근육을 가지지 않아서? 이유는 알 수 없다. 물론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이들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풋..."
제황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이들의 인상이 조금 일그러졌다. 자신들이 이렇게 압박을 주고 있음에도 당사자는 오히려 웃고 있으니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 분위기가 서서히 안 좋은 쪽으로 흐를 때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하시고... 출발!“
탕!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육체계열 응시자들은 전력을 다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차피 이들은 시험을 준비하며 10킬로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는 것을 상정한 채 꾸준히 훈련해 왔다. 그렇기에 온힘을 다해 스퍼트를 했지만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총알처럼 튀어나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어엇!"
한 사람이 순식간에 튀어나가자 깜짝 놀라 발이 꼬이고 뒤따라 전력으로 튀어나가던 이들은 그와 엉켜 우르르 쓰러졌다. 총알처럼 튀어나가는 건 역시 제황이다.
"빌어먹을!"
전성현은 엄청난 속도로 대열을 치고 나가는 인영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허름한 트레이닝복에 남들보다 왜소한 체격의 인영은 그가 절대 질수 없다 마음먹었던 그 인물이었다.
"질 수 없지!"
전성현은 전력을 다해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 또한 선두에 서려고 했었기에 그의 진로를 가로막는 건 없었다. 아니 전성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은 그를 알아서 피해 줬다. 순식간에 선두를 달리는 인영과의 격차가 좁혀 진다.
너만은 이기겠다는 심정으로 전성현은 두 다리에 마나를 주입했다. 본래 대로라면 한정된 마나량을 잘 계산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는 일단 선두를 탈환하겠다는 심정으로 마나를 다리에 공급했고 그는 곧 제황과 한 두 걸음 차이까지 따라붙었다.
파파파팍!
뒤따라오는 성현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제황은 빠르게 선두를 질주했다.
'뭐...이런 새끼가..."
전성현은 제황의 뛰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호흡조절에 실패할 뻔 했다. 전력으로 달리고 있음에도 두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두 팔은 무게조끼를 꽉 붙잡은 채 두 다리의 힘만으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속도를 조금 늦추려 했지만 순간 앞서 달리는 제황이 뒤를 힐끔 쳐다보고는 씨익 하고 웃는 걸 발견한 그는 흐트러지는 호흡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력으로 따라붙었다.
'감히 날!!!"
비웃음 당했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스퍼트를 올렸지만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제황에 입장에서는 의외로 잘 따라 붙으니 기특해서 쳐다본 거지만 말이다.
1바퀴...2바퀴..3바퀴.. 전성현은 제황과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더 벌어지지도 좁혀지지도 않는다. 마치 자신을 놀리려는지 자신이 속도를 높이면 제황도 속도를 높이고 속도를 줄이면 제황도 속도를 줄였다.
'나를 놀리나!'
성현은 이를 악물었다. 조롱당하는 느낌이다. 마치 넌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듯 속도 조절을 하고 있다니... 물론 이것도 그의 착각이었다. 제황의 입장에서는 2성하이브리드 라이센스를 따려면 최대한 많은 1등을 해야 하기에 선두를 유지하는 것이고 뒤따르는 성현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속도를 배려해주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모든 응시생들이 결승점에 들어왔을 때 감독관은 결승점 부근에서 헉헉거리며 땅에 주저앉아 있는 응시생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낙오자 한 명 없이 전원 우수한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땅에 주저앉아 헉헉거릴 정도로 체력안배를 못했다는 건 헌터의 기본 자질로서는 불합격이다. 헌터라는 건 정해진 시간 외에는 절대 땅에 주저앉아 쉬어서는 안 된다. 심장이 터져 나가는 한이 있어도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
"어디 헌터가 땅에 주저앉아 쉬고 있습니까! 본 감독관이 앉아서 쉬어도 된다고 말 했습니까?!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전력달리기는 탈락으로 처리 하겠습니다!"
감독관의 서릿발 같은 고함에 땅에 주저앉아 있던 이들은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 일에 원흉인 이를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곳에는 입고 있던 무게조끼를 벗은 채 자리에서 몸을 풀고 있는 제황이 있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없이 빙그레 웃는 그 얼굴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밉기는 하지만 체력안배에 실패한 건 자신들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체력장과 실기가 왜 하루 안에 붙어있을까? 그것은 곧 오늘 하루 자체가 하나의 시험이라는 것과 같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면 그대로 탈락인 것이다.
"헉헉헉..."
전성현은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가늘게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초반 호흡조절에 실패한 게 몸에 쌓여 이렇게 그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체력안배도 실패하고 아끼고 아껴야 할 마나 안배도 실패했다. 주먹을 꾹 쥔 그는 몸이 어느 정도 정상화 되자 앞에 서 있는 제황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인정하기 싫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피지컬이 뛰어났다. 물론 스킬을 시험하는 실기에 들어가면 자신이 이기겠지만 그는 그 어떤 것도 제황에게 지기 싫었다.
'어쩔 수 없다.'
그는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승리로 가는 첫 번째 법칙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제황을 인정했다. 고집을 부리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건 사양이다. 상대가 자신보다 피지컬이 우수함을 알았으니 이제 그것을 깨부셔야 한다.
'그걸 써야겠어.'
그는 주위가 혼잡스러운 틈을 타 단상 옆 의자에 앉아있는 감색양복의 배불뚝이 중년 내에게 다가갔다.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두 번째 종목은 일명 미로 찾기였다. 물론 평범한 미로는 아니다. 폭과 높이가 1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는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미로인데 미로의 모양은 수평과 수직을 오가는 그런 괴랄스러운 미로였다. 이 종목은 한 번에 10명씩 들어가 기록을 측정한다. 앞선 10킬로미터 달리기가 체력을 측정하는 명목이라면 미로 찾기는 감각과 정신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종목에서도 제황은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제황으로 인해 달리기에서 고생한 남자들은 미로 안에서 제황을 만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했었다. 그들이 미로 탈출은 생각도 않고 이를 갈며 제황을 찾았는데 그는 이미 미로를 빠져나와 벤치에 앉아 정오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여유가 넘치는지 손에는 초코볼을 들고 오독오독 깨먹기 여념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쓴 대가로 제황과 한조를 이룬 이들 중 절반이 탈락해 버렸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종목 모두 제황은 우수한 기록을 남기며 통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종목이 남았다.
종목의 이름은 함정피하기였는데 내용은 간단했다. 함정으로 가득한 특수구조물들을 통과하는 것으로 응시자의 민첩성을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함정의 내용은 단순히 안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닌 일정 이상의 민첩함으로 피해야 하는 그런 종목이었다.
”
“젠장, 힘없는 게 죄지.”
마지막 종목의 특수구조물의 운영을 담당하는 직원은 방금 전 자신을 다녀간 수석감독관의 비밀스러운 지시사항을 떠올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다른 경기와 다르게 함정 구조물은 응시자들을 공격하는 기능이 있기에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아무리 그가 커버해 준다고 해도 크게 다치는 이가 나오면 자신의 경력에 오점이 생길수도 있기에 수석감독관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가 대구 지역 헌터계에 끼치는 무시 못할 영향력을 생각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수석감독관이 말한 응시자가 함정구조물의 입구로 들어갔다.
“미안합니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해서...”
그 말과 함께 그는 컨트롤패널을 조작해 난이도를 상승시켰다. 기존의 난이도는 민첩수치가 2.5에서 3정도 되면 아주 무난하게 넘을 수 있는 난이도였다.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능력을 개화한 각성자라면 무난히 넘을 수 있는 수준...
그것을 민첩 수치 5정도가 감당할 수준까지 올렸다. 응시자들의 수준이 거의 바닥이라는 걸 감안하면 재수 없으면 사망자도 나올 수 있는 강도... 그렇기에 그는 지금 들어간 이가 제발 크게 다치지만 않기를 바랐다.
“11번 통과”
그 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실려 나오던 입구로 다시 나오던 탈락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가 천연덕스럽게 출구로 나온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누가 보면 아예 직진으로 돌파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황급히 컨트롤패널을 확인했다. 난이도는 분명 올라갔다. 응시자라면 절대 통과 못할 난이도... 그런데 응시자는 천연덕스럽게 통과했다. 애초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상 하나 없이 나오니 그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당황하여 조작의 잘못된 점을 찾는 사이 다음 응시자가 입구로 들어갔고 잠시 후 안에서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