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35화 (35/301)

# 35

1등 좀 하겠습니다

다음날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학원 안에 희비가 교차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 또 떨어졌어.”

“다 다음 달까지 잘 부탁한다. 친구...”

돈독한 의리를 과시하며 수업 빼먹는 것도 함께 밤에 놀러나가는 것도 함께하던 두 죽마고우는 역시나 그 의리가 어디가지 않는지 시험까지 함께 낙방하며 두 달 뒤에 있을 시험을 함께 기약했다.

합격률 50퍼센트라고 하더니 의외로 합격자수는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합격한 이들보다 불합격한 이들이 훨씬 많아 합격한 이들은 대놓고 기쁨을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얼굴에 웃음이 실룩거리는 게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제황은? 당연히 합격했다. 보면 다 외우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자신의 뛰어남을 마음껏 자랑하는 궁기가 함께하는데 불합격 하는 게 더 이상한 것이다. 물론 모든 과목에서 궁기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딱 법 관련 시험만 궁기의 도움을 받고 나머지는 제황의 본래 실력으로 시험을 봤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상식 부분은 알아두면 쓸모 있을 정보가 정말 많았다. 머리가 영 바보는 아니었는지 한 달간 하드하게 파고들어가자 모두 마스터할 수 있었다.

“합격자 분들은 축하드립니다. 내일 실시되는 체력장과 실기는...”

강사가 들어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해 주고 나가자 사람들은 서로서로 친한 이들끼리 모여 이번 시험에서 헌터법이 너무 어려웠다는 둥 이래 가지고 각성한 스킬 썩어버리겠다는 둥 잡담을 나누기 바쁘다.

그러나 그 틈에 낄 생각 없는 제황은 기숙사에 미리 싸둔 짐을 들고 조용히 학원을 빠져 나왔다. 본래 학원비는 딱 한 달치를 끊었지만 학원의 원장은 제황의 모의고사 성적이 워낙 뛰어나자 그에게 공짜로 계속 있어도 상관없다 말했다. 그렇지만 제황은 미련 없이 숙소를 한국헌터사무국대구지부 근처에 있는 모텔로 옮겼다.

물론 그것이 굳이 사람들을 피하려 옮긴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합격된 이들 대부분이 체력장과 실기 전 컨디션 관리를 위해 밖으로 잠자리를 옮긴다더라. 불합격한 이들이 밤새도록 난동에 가까운 파티를 즐긴다며...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난 제황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무한고에서 200킬로그램으로 만들어진 특제 무게조끼를 꺼내 입었다.

각성자가 아닐 때도 한밤의 궁기산을 앞마당처럼 뛰어다녔는데 각성자가 되고나서  땀이 나는 제대로 된 수련을 하려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트레이닝 장비가 필요하게 됐다.

가볍게 10킬로미터 전력달리기를 한 뒤 모텔에 돌아오자 온 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새벽에 여는 한식식당에서 배를 든든히 채운 제황은 모텔에서 몸을 씻은 뒤 새로 세탁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시간에 맞춰 헌터사무국 대구지부로 향했다.

일찍 나왔음에도 제황 보다 먼저 나온 이들이 상당수 보였다. 모두 상당히 세련 되 보이는 스포츠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몇몇 남자들은 이상적으로 발달시킨 조각 같은 몸매를 드러낸 채 새벽 공기를 맞으며 유유히 서 있었다. 몸에 딱 맞게 입어 온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여성들을 곁눈질 하며 말이다.

민무늬의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제황은 한쪽에 있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딱히 관심 가는 이들도 없고 일부러 다가갈 생각도 없기에 체력장이 시작되기 전까지 용혈기나 돌릴 생각이다.

"저기..."

그때 누군가 제황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돌아보니 상당한 키의 거한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제황과 비슷한 낡은 트레이닝 복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거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좀 앉아도 될까?"

"그러세요."

제황이 허락하자 그는 제황의 옆에 털썩 하고 주저앉더니 입을 열었다.

"필기는 어떻게 안 되는 머리 쥐어짜서 합격하기는 했는데 체력장이랑 실기가 걱정이네."

"아.네."

그는 심심했는지 제황이 건성으로 대답해도 꾸준히 말을 붙였다.

"저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이름난 체육관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프로 헬스 트레이너 통해 몇 달 전부터 몸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구. 휴... 난 그냥 동네 도장 다니면서 기본 체술 주워 배우고 헬스장에서 혼자 몸 만들었는데 저 사람들 따라붙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 자네도 걱정이 많겠네."

아마 제황의 몸집과 걸치고 있는 옷을 보고 제황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 착각한 모양이다. 없는 돈 쪼개서 헌터의 길에 도전하는 흙수저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제황의 무한고에 들어있는 것 중 10프로만 보여줘도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그렇죠. 뭐”

굳이 돈자랑 같은 걸 하기 싫은 제황은 남자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옆에 앉은 남자와 저 앞에 있는  조각 같은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이들과는 몸을 두른 근육들이 확연하게 차이 났다. 저들은 모두 전문적인 트레이너를 통해 몸을 가꿔서인지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균형 잡힌 근육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 남자는 동네 헬스장에서 죽어라 벤치프레스만 한 듯 빵빵한 상체 근육을 지니고 있다.

"참 부러워."

"멋있긴 하네요."

제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적관점으로 따져도 정말 멋있으니까.

그러나 제황은 그런 이들의 근육이 전혀 부럽지 않다. 물론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들과 자신은 근육을 키우는 목적의 출발점 자체가 틀렸을 뿐이다.

저들의 목적은 간결했다. 상태창에 나타난 스텟의 수치를 최대의 효율로 사용하는 것이다.

본인의 힘이나 순발력 등을 강화하면 상태창에 나온 숫자대로 배수 계산이 되어 그것을 높여준다. 그러니 순수한 힘이나 순수한 순발력, 스피드, 지구력, 동체시력 따위를 수련한다.

그렇지만 제황의 몸은 단지 한 가지에 최적화 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극도로 효율적이며 최적화된 전투를 위한 신체라는 것... 그렇기에 제황의 몸은 한계이상으로 부푼 이두근이나 두터운 상완근이 없었다. 조금 헐렁한 티셔츠를 입으면 좀 날씬한 사람 정도라 인식될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제황의 몸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지금 옆에 앉아 있는 거한처럼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면 제황의 몸은 저들의 것을 훨씬 상회하는 한 차원 높은 하드웨어를 지니고 있었다.

제황의 몸은 근육을 키움과 동시에 속으로 고밀도로 응축시키고 다시금 그것을 키운 다음 지옥 같은 실전을 겪으며 하나하나 깎아낸 근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제황의 신체에 대해 궁기가 해준 말이 있었다. 각성했을 당시 제황의 몸은 선조들의 안배로 거의 재구성되다시피 했다는 것. 거기에는 몇 백 년을 쌓아온 선조들의 힘과 궁기의 원정이 투입되었고 그 힘으로 제황의 몸은 일반적인 각성자들과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조차 없는 그런 몸이었다.

제황이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혼자 떠들던 거한은 입맛을 다시며 벤치를 떠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응시자들을 태운 차량이 속속 도착하더니 대략 50여명의 남녀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제황 누가 널 노려보는데?

용혈기를 운용하고 있던 제황은 궁기의 말에 눈을 떴다. 궁기 안에 나타난 선을 따라가 보니 궁기의 말대로 한 남자가 제황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대략 180센티 정도의 훤칠한 키에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스포츠웨어를 걸친 20대 초반의 미남이다. 다른 이들의 몸도 멋있지만 그의 근육은 정말 그림과 같다 표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주위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을 모을 정도로 말이다.

-딱히 악의는 보이지 않는데 눈빛이 불량하군. 확 뽑아버릴까.

-아서라.

궁기의 말은 농담 같지만 실제 농담이 아닌 것도 더러 있었기에 제황은 미리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를 마주 쳐다봐주자 상대가 흠칫 하더니 눈을 돌렸다.

-저 사람 나를 아나?

-송사리...

-송사리?

***

"쳇..."

창공클랜 클랜마스터의 막내아들인 전성현은 눈여겨보고 있던 녀석이 자신을 마주 쳐다보자 시선을 돌리며 혀를 찼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다.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초장부터 즈려밟고 나타난 인물이었으니까.

'나랑 같은 하이브리드 응시자... 게다가 필기 수석...'

헌터라이센스 필기시험의 점수는 원칙적으로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지만 290점을 획득한 자신이 2등이라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그가 헌터사무국 대구지부의 아는 사람을 통해 1등을 한 이를 알아낸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프라이드에 약간의 상처를 낸 이가 어떤 클랜의 유망주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은 하이브리드라이센스 취득을 노리고 있다는 것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저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저런 근본도 안 된 놈에게 절대 질 수 없지."

성현은 헌터라이센스 시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체력장과 실기를 치러지는 날임에도 저런 다 떨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온 놈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오늘 시험에 대해 조금이라도 사전정보를 파악했다면 절대 저런 후줄근한 옷은 입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그분이 오신다."

게다가 그가 하이브리드라이센스를 노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범한 중생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다. 어쩌면 오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은 이날을 위해 무려 1년간을 갈고 닦았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 모든 이들보다 두각을 나타내야 하고 우수함을 증명해야 했는데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필기는 졌지만 나머지는 절대 안 진다."

시간이 흘러 간단한 본인확인이 끝나고 드디어 체력장이 시작되었다. 체력장이 시작되기 전 번호표를 받았는데 제황의 번호표는 11번이다.

"모두 모여주세요."

제황은 그 번호표를 가슴에 붙인 뒤 단상의 앞으로 걸어갔다. 단상 위에는 수석감독관이라는 감색 양복을 입은 배불뚝이사내가 연신 목청을 높이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미사여구와 쓸데없는 잡소리 모두 거둬내면 헌터 되서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에 또' 를 다섯 번 정도 시전 하며 투머치토커의 기세를 과시하던 그는 밑에 서있는 응시생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이내 말을 마치며 단상에서 내려갔고 곧이어 체력장의 첫 번째 순서인 10킬로미터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육체계열 응시생 분들은 이곳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육체계열과 마법계열은 애초에 피지컬의 차이가 크기에 따로 시험을 치른다. 하이브리드라이센스를 지향하는 제황은 당연히 육체계열 각성자들과 한조를 이뤘다.

"이미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무게100킬로그램의 무게조끼가 지급됩니다. 또한 달리는 와중에는 절대 조끼를 벗으시면 안 되고 혹 조끼를 벗으셨을 시 해당 응시자는 무조건 탈락입니다."

제황은 감독관들에게 받아든 조끼의 위아래를 살폈다. 모양은 제황이 평소 사용하는 무게조끼와 비슷한데 상당히 낡았다. 버클과 벨크로로 몸에 고정시켜 주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크기가 꽤 입고 나니 위아래로 덜렁거렸다.

다른 이들의 무게조끼를 봤는데 사이즈의 차이는 남녀의 구분만 있을 뿐 남자들이 배급 받은 것을 자신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문제는 그들의 옷이 이런 사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독특한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