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34화 (34/301)

# 34

학원다녀요.

그 말과 함께 제황이 계단을 내려가자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제황에게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셋은 이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더니 제황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각성시술을 통해 신인류로 태어났다며 세상의 주인이 된 듯한 단꿈에 빠져 있던 그들이었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스템을 통해 강해진 자신들... 게다가 자신들이 개 값을 물어줄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도 아니었다.

각성시술을 받을 정도면 집에 어느 정도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 셋의 부모는 헌터다.

같은 원생 하나 밟아주는 것 정도야 가볍게 무마해 줄 수 있는 헌터... 그리고 그 생각은 약 10분 후 깔끔히 정리해야 했다.

"너희 친구 왜 안 오니?"

"고...곧 올 겁니다."

학원 뒤편 담배꽁초가 가득한 더러운 담벼락 밑에  제황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두 남자가 각자 사이좋게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따닥...

"으윽... 악!"

제황의 오른쪽에 놓여있던 약 1.4미터 가량의 나무봉이 춤을 추자 오른쪽에 있던 이가 머리를 향해 손을 올리다가 이내 어깨가 아픈지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삼켰다.

"왜...왜... 머리를..."

"불만 있어?"

"아..아닙니다."

제황에게 머리를 두들겨 맞은 남자는 점점 아파져오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약 10분전의 일을 떠올렸다. 제황과 함께 도착한 곳은 그들이 평소 담배를 피던 곳이었다. 원래 이곳으로 데려와서 흠씬 두들겨 패주려고 달려들었지만 제황은 어디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거무스름한 봉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고통을 몸에 새겨주었다.

제황은 그 봉으로 그들을 때리지도 않았다 우습게도...단지 첫 주먹을 뻗을 때 그 봉이 뻗어오는 그 주먹을 교묘하게 교차시켜 팔꿈치나 겨드랑이 부분을 휘어 감았을 뿐이다. 그다음에 반대로 휘두르니 내 뻗은 팔에 있는 팔꿈치 관절이 오도독하고 나가버렸다.

각성을 통해 얻었던 힘은 아무 소용없었다. 아니 아무리 힘이 뛰어난 이도 제황에게 걸리면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제황이 휘두르는 봉의 움직임은 마치 학원 내에서 실기교육을 담당하는 사범이 휘두르는 장검과 같은 현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팔꿈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팔을 붙잡으려는 그의 곁으로 단 한걸음으로 치고 들어온 제황은 봉으로 어깨와 머리를 지렛대처럼 걸더니 축이 되는 발을 툭 침과 동시에 바닥으로 내리 꽂아버렸다. 침으로 범벅된 바닥에 얼굴을 비비게 되었지만  느껴지는 고통은 그런 것을 모두 무시하게 만들었다.

그 후 나머지 두 친구도 그와 비슷한 꼴이 되어 모두 사이좋게 무릎 꿇고 있는 신세가 되었고 의자에 앉은 제황이 실과 바늘 있냐고 물어보자 한 녀석이 자신이 사온다며 이곳을 빠져 나갔다.

"왜 아침부터 시비야?"

제황이 묻자 우물쭈물 거리던 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두 들은 제황은 맥이 탁 풀려 둘을 빤히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어제 궁기가 경고를 했었던 세 놈팽이다.

"그러니까 그냥 샘나서?"

"예. 죄송합니다."

"휴..."

자초지종을 들은 제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당히 오래전이지만 이것과 비슷한 경우는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는 까마득한 중학생 때였고 그 때는 모두 치기어린 질투였기에 몇 번 주먹질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지만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들도 성인이며 자신도 성인이다.

이런 일에 가전무예인 용혈무를 썼다는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용혈무는 일종의 활대를  이용한 종합무술과 같은 것이었다. 회피가 주를 이루지만 초근접박투가 필요할 경우 활대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이었는데 타격기 보다는 적의 중심을 흐트러뜨리거나 관절을  꺾어버린다. 사실 본래대로 힘을 썼으면 관절의 힘줄과 인대를 전부 끊어버렸을 것이다. 이들에게 쓰기에는 조금 과한 경향이 있는 살인기예가 용혈무였다.

엘어스에서 2년간 살아남으며 준비해 갔던 20개의 예비시위는 금세 동이 났다. 그 후로 몬스터의 힘줄을 긁어내 물에 씻고 햇빛에 말려 손으로 꼬아 임시 시위를 만들어 썼지만 부족한 솜씨의 시위는 툭하면 끊어졌고 그 때부터는 이름 모를 몬스터와 드잡이 질을 해야 했다.

그렇게 제황은 용혈무를 원숙의 경지로 끌어올리며 전에는 몰랐던 용혈무의 진가를 알아갈 수록 이런 비기를 배울 수 있는 자신은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무예를 콧방귀도 안 나오는 일로 시비 거는 녀석들을 제압하는데 썼으니 조상님들께 죄스러울 지경이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일단 말은 올려 드리겠습니다."

"?"

갑자기 제황이 존댓말을 쓰자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황을 올려다봤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급적 조용하게 지내고 싶네요."

우득... 득!

"으윽!"

다가선 제황이 가벼운 동작으로 어깨와 팔꿈치의 관절을 맞춰주고 빠른 재생을 사용해 손상된 인대를 치료해주자 조금만 힘을 줘도 뼛속이 시리도록 아프던 팔이 거짓말처럼 움직여졌다. 이런 건 단지 신체 능력만 강력한 각성자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짓이다. 진짜 무술가들이나 할 수 있는 그런 기예... 그들은 자신들이 오늘 운이 좋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셨죠? 저는 조용한 걸 좋아합니다."

"아. 응..."

제황의 말뜻을 알아들은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황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견식한 둘이다. 이 정도에서 화해의 손을 내밀어 주는 게 고마울 지경.. 상대는 단순한 힐러계열의 지망생이 아니었다. 힐러 이전에 각성자...거기에 진짜 무술가다.

그렇지만 화해의 마당이 그렇게 마무리되려는 찰라 제황의 뜯어진 트레이닝복을 꿰맬 실과 바늘을 구하러 갔던 친구가 웬 덩치 큰 인물을 데려온 걸 발견하고는 얼굴이 흙색으로 물들었다.

"야! 이 새끼야! 넌 오늘 아주 뒈에에에졌어! 형! 저 새끼에요!"

형이라 불린 이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 덩치는 거의 2미터가 넘어 보이고 옷 사이로 드러난 팔은 무슨 풍선을 달아놓은 듯 울퉁불퉁했다.

"감히 내 동생을 건드린 게 너냐?"

팔짱을 푼 그는 두 주먹을 마주잡고 우드득거리며 제황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 형은 새끼야 현직 헌터야. 넌 오늘 아주 제삿날이다!"

그의 말에 제황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가급적이면 몸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저 헌터는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 않다. 여기서 헌터법 같은 것을 들먹이는 건 병신 인증하는 꼴이 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법이라는 건 그 법을 상대에게 인식시킬 힘이 있는 이들에게나 유용한 거지 이 시대의 약자에게 법은 그리 친한 녀석이 아니었다.

"실이랑 바늘 사왔냐?"

"X까고 있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부름 갔던 놈에게 물었지만 사러 갔던 당사자가 주먹감자를 먹이자 제황은 들고 있던 봉을 꾸욱 쥐었다.

“설마 헌터가 민간인한테 두들겨 맞은 걸 어디 가서 말은 안하겠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손을 써도 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제황이었다.

***

"시험 잘 봐. 화이팅!"

"네. 잘 마실게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제황에게 과도한 친절을 보이며 이곳에 있는 한 달 동안 매우 편향적이며 사심 가득한 편의를 봐주던 여직원은 시험 당일 제황의 손에 홍삼엑기스를 쥐어 주며 파이팅을 빌어주었다. 그녀에게 받은 홍삼을 쪽쪽거리며 학원 밖으로 나가니 미니버스가 대기해 있다.

시험장이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데는 학원에서 따로 버스를 대절해 줬다. 버스에 올라타니 몇몇 안면 있는 이들이 제황에게 꾸벅 고개인사를 하고는 곧 노트로 고개를 파묻었다.

학원 이틀 째날 시비를 걸었다가 털렸던 바보 삼인방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들은 그날 이후로 제황을 가급적 피해 다녔다.

제황은 가장 뒤쪽 좌석으로 이동했다. 아무도 없는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한 달 간의 학원생활이 떠올랐다. 그다지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이 없는 제황은 그들의 무리에 끼지 않았다. 자발적 아웃사이더 짓이지만 사실 여자들과 함께 있는 게 거북했다.

특히 제황의 외모와 힐러계열이라는 것에 혹한 여자들이 들이댈 때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바보 삼인방에게 말했던 것처럼 제황은 그냥 조용히 지내다 나가길 원했고 의도적으로 모두를 무시하고 다니자 이후로 사람들은  제황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거의 자발적인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저기 가보고 싶다.

-아. 그래.

사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궁기 상대하기도 바쁘다. 어쩌면 그녀 덕분에 더 아웃사이더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제황이었다.

끼이익

버스가 정차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끼리끼리 짝을 지어 앞으로 걸어가는데 마지막에 버스에서 내린 제황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한국헌터사무국 대구지부’

각 광역도시에 하나씩 있는 이 헌터사무국 건물은 헌터와 관련된 모든 업무가 가능할 정도로 큰 크기를 자랑했다. 특히나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대구북구 디멘션게이트가 있었는데 그 영향인지 이 부근에는 헌터와 관련된 상가들과 유흥업이 밀집된 곳으로 유명했다.

헌터사무국 건물을 슬쩍 바라본 제황은 바닥에 붙어 있는 안내 스티커를 따라 헌터사무국으로 들어섰다. 약 10분여를 걸으니 헌터라이센스 시험 필기 본고사장 이라고 현판이 달린 낡은 건물이 나타났다.

아직 시험 시간까지는 한 시간여가 남았기에 건물 밖에는 아직 고사장에 입실하지 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딱히 그들과 섞일 일 없는 제황은 안으로 들어가 감독관에게 신분증과 응시 서류 등을 통해 얼굴을 확인받은 다음 밖으로 나와 한적한 곳에 앉았다.

“후우...”

벤치에 앉아 등에 매고 온 가방에서 시험 서머리 노트를 찾는데 문득 익숙한 느낌이 든다. 옆을 바라보니 궁기가 아이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한손에 초코볼을 든 채 하나씩 까먹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임에도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서서 초코볼을 오독오독 씹고 있다.

“안 들키니?”

제황의 말에 궁기는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입에 초코볼을 한가득 집어넣고 씹어댔다.

“네가 레벨이 오름에 따라 내 힘도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그런 이 몸이 이곳에 있는 평범한 인간들의 이목 따위 걸리는 게 우습지 않은가.”

“그래서 초코볼 까먹으려고 나오셨다고?”

“흠...흠흠...”

제황이 정곡을 찌르자 궁기는 헛기침을 하며 손에 새로운 초코볼을 소환해 냈다.

어차피 오늘 시험에서 관련법에서는 궁기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더 이상 그녀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기로 마음먹은 제황은 상식관련 문제들을 정리해 둔 요약 노트를 펼쳐 들었다. 헌터법이야 어차피 실제로 쓰이는 일이 적고 솔직히 법 관련 문제는 헌터법전문변호사들에게 맡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상식 문제는 헌터생활을 하는데 있어 쓸모 있을 지식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에 직접 공부했다.

한참 노트를 읽으며 공부했던 걸 떠올리고 있을 때 정문 쪽에서 온통 검은색의 고급세단이 줄줄이 들어왔다. 잠시 후 그 고급세단들은 시험장 앞 주차장에 가지런히 섰고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 십여 명이 줄줄이 내리더니 곧 한 남자를 호위한 채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와... 저 사람 뭐야.”

“창공 클랜 사람들이네.”

고사장 밖에 서 있던 이들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서로 쑥덕거리는 소리가 제황에게까지 들렸다.

제황을 지나쳐 시험장으로 향하던 그들은 가장 선두에 걷던 남자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자 일제히 고개를 숙이더니 타고 온 고급세단을 타고 다시금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강하네.”

“그러게 상당하네.”

제황이 입을 떼자 연신 초코볼을 오독거리던 궁기가  제황의 말에 긍정했다. 제황이 궁기 안을 통해 바라본 보디가드 들 중 한 명은 상당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온 몸에 마나가 고루 퍼져 있는 게 상당한 수준의 육체계열 헌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이를 보디가드로 쓰는 사람이라면 보통 신분은 아닐 것... 창공 클랜이라고 하는 걸 보니 클랜 간부의 자식 정도로 보이는데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아랫사람을 다루는 폼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든다.

“그래봤자 피라미 호위 받는 송사리지.”

궁기가 짧게 최종평가를 내린 후 다시금 초코볼에 집중하자 제황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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