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학원다녀요.
-그런데 왜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지?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에 한 녀석이 헌터시험을 보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나. 클랜이라는 단체의 상당히 높은 직책으로 보였었는데...
-아. 그거...
궁기의 말에 제황은 이전에 만났던 스타더스트 클랜의 스쿼드장을 떠올렸다. 분명 그는 시험을 보게 되면 자신에게 연락을 하라 했었다. 물론 그에게 연락을 하면 지금 보다 조금 더 편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디바우저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 챘던 느낌이었으니까.
디바우저라고 시험을 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우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소속된 클랜에 들어오라고 할 테니까. 미안하게도 난 클랜에 들어갈 생각이 없거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단체에 소속되는 것... 사실 제황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양궁이라는 것에 항상 소속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그 소속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사고 이후 노골적으로 당한 외면과 따돌림은 제황에게 소속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들게 만들었다.
-헌터라이센스 따고 의무만 끝나면 혼자 다닐 거야.
-그래? 네가 저번에 검색할 때 보니 홀로 사냥하는 헌터는 자격 요건이 까다롭지 않았나?
제황과 시야를 공유하는 궁기였기에 그녀가 마음먹으면 제황이 보는 건 뭐든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헌터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
-응. 여러 가지 요건이 있지. 가장 기본이 되는 게 최소 3성 헌터 라이센스 보유자라서 사실상 난 힘들고... 일단 3성 헌터 라이센스를 따려면 실력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 3성 헌터라는 게 그렇게 강한가? 너보다도 더?
엘어스에서 2년간 함께 생활하며 제황이 무럭무럭 강해지는 걸 옆에서 지켜본 궁기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일정 티어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한 전적이 필요해. 그리고 굳이 내 주력스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굳이 쓸데없는 주목을 끌고 싶지도 않고...
어린 시절 양궁유망주로 세간에 지대한 관심을 받았던 제황은 헌터가 되어서도 또 그런 관심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가급적 얼굴도 가리고 다닐 생각이다. 오늘이야 어쩔 수 없이 노출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홀로 다닌다는 말이지?
그녀의 물음에 제황이 대답했다.
-따로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유일하게 힐러 계열은 처음부터 혼자 다니는 게 가능해. 힐러는 꼭 몬스터 사냥이 아니더라도 찾는 곳이 많으니까 한군데 소속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조건이 없는 건 아니야. 최소 2성 헌터 자격증은 필요한데 그러려면 하이브리드 라이센스를 취득해야 해.
-음. 그래서 그랬군. 이해했다.
궁기와의 대화가 끝나자 제황은 눈을 감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제황은 문득 학교를 그만두고 궁기산을 오르던 때가 떠올랐다. 사실 그 때는 속세와 완전히 인연을 끊으려 작정하고 올랐었다.
산장을 걸어 잠그고 그냥 궁기산에서 늙어 죽으리라 마음먹었는데 선조들의 도움으로 다시금 사회에 나올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세상사 알 수 없다 생각하며 제황은 2년간의 엘어스에서의 생활로 인해 날카롭게 변한 감각을 누르며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했다.
"하아..."
제황의 한숨이 눈앞에 펼쳐진 교과서 위에 쏟아졌다. 수업 첫 시간... 대체 몇 년 만에 앉아보는 책상인지 감도 안 잡히는 건 둘째 치고 지금 그의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단검을 든 선생의 설명 절반은 아예 이해도 못하고 있다.
"헌터법 시험에서 빠지지 않고 출제되는 건 헌터일반인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실생활에 입각한 법률 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터일반법 52페이지에서부터 83 페이지 부분은 통째로 외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서 한 방 콱! 단골로 출현하는 문제는..."
누군가 말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백지다. 문제는 지금 제황이 그 상황이었다. 일단 제황은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라는 걸 해본 기억이 없었다. 제황의 학창시절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시험기간 빼고는 거의 조용한 수면시간이었다. 그때야 오로지 양궁 이었으니 상관 없었지만 지금은 틀리다.
게다가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그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것들은 왜 자꾸 너를 보는 거냐. 체크하기 성가시게...
-좀 조용히 해줄래.
가뜩이나 집중이 되지 않는 판에 머릿속의 궁기도 쉴 새 없이 떠드니 그나마 없는 집중력도 산산이 날아가는 형편이다.
물론 저들이 저러는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인은 어제 자신을 안내해준 여직원... 익숙지 않은 것에 휩쓸려 짜증이 난 상태에서 그냥 무슨 일이 있으랴 하는 심정으로 허락했는데 제황의 사진을 찍어간 그녀는 자신의 SNS에 제황의 사진을 올려버렸다.
더 큰 문제는 그녀와 친한 몇몇 직원들이 새로 등록한 원생의 눈부신 외모에 경쟁적으로 그것을 퍼 날랐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는 학원에 다니는 이들 중 제황의 얼굴을 모르는 이보다 아는 이가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이걸 보거라.
궁기의 말과 함께 오른쪽 눈에 세 개의 점과 선들이 생겨났다.
-이것들이 모두 네게 적대적인 감정을 흘리고 있다.
여자들의 관심을 독차지 해버린 제황에 대한 시기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수컷 세 마리다.
-알아. 그러니 제발... 닥쳐.
-쳇... 알겠다.
제황의 반 하소연에 그제야 궁기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자아... 언제나처럼 시험을 보겠습니다."
어느새 설명을 끝마쳤는지 교단에 선 강사가 교과서를 탁탁 정리하며 말한다.
"오늘 처음 강의를 듣는 분도 계시지만 딱히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니니 연습한다 생각하고 편히 풀어주세요."
불이익이 없다지만 모르는 문제들로 가득한 시험지를 받아든 제황의 얼굴이 구겨졌다. 총 10문제 밖에 되지 않지만 전부 서술형이라 찍는 건 불가능했다. 듣기로는 헌터 필기 시험은 죄다 이렇게 서술형으로 진행된다고 하니 적응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시험지를 바라보기는 하지만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1번 문제의 답은 군헌터조직 성립 법체계를 쓰면 되는 것 같은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구세주가 나타났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놀란 제황이 궁기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금 우쭐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읽었지 않느냐.
-읽기야 했지.
그녀의 말대로 분명 읽기는 했다. 그렇지만 읽는다고 다 외워졌으면 세상에 학교와 학원이 왜 필요하겠는가.
-읽었으면 기억하는 건 당연한 거다.
-...
2년간 엘어스에서 함께 생활하면서도 오늘만큼 놀라기는 제황으로서도 처음이다.
-혹시 내용도 기억해?
-당연하지. 군 소속 헌터 관련 업무 수행을 위해 국방부에 국방부 헌터대책위원회 이하「대책위원회」라 한다를 둔다. 대책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운영한다. 위와 관련하여 한국 헌터사무국으로부터...
막힘없이 쏟아지는 궁기의 대답에 제황은 빠르게 그것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첫 번째 문제의 답을 모두 말한 궁기가 뚱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날로 먹는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
-간식비 10프로 증액, 아이스크림 맛집 탐방 1회권
-빨리 다음 문제 답 받아 적을 준비 해.
답은 궁기가 잘 알지만 궁기는 제황이 더 잘 아는 듯싶다.
***
다음날 학원의 성적 게시판에서 전날 시험 결과를 확인한 원생들은 모두 가장 상단에 떡하니 나타난 새로운 이름에 웅성거리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300점 만점에 280점?"
"천제황이라... 처음 보는 이름인데..."
"왜 있잖아. 그제 새로 등록한 사람..."
"아...그 꽃미남? 레알?"
"존잘! 지리네! 머리 좋고 얼굴 잘생기고 힐러니까 실기는 따 놓은 당상이고..."
"내가 한 번 따볼까?"
"아서라 지지배야. 언니 정도는 되야..."
"들어보니까 옷도 허름한 게 개천에서 용 난 것 같던데 이 언니의 재력으로다가..."
어제는 외모로 오늘은 성적으로 연일 이슈를 몰고 다니는 제황을 두고 여자들은 서로 꺅꺅 거리고 있다. 개중에는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지 눈을 반짝이는 여자들도 있다. 그리고 잘난 사람 하나가 나타나 모든 여성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자 그것을 시기하는 이들도 당연 나오는 것...
"하...시XX 아침부터 기분 잡치네."
"비실비실하게 생겨서 한대 치면 뒈질 것 같아서 넵뒀더니..."
"야. 기분도 더러운데 학원 뒤에서 담배나 피자."
어제부터 노골적으로 제황을 시기하던 세 남자는 아침부터 게시판에서 재잘대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욕을 한마디씩 뱉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썸을 타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고 이들은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점찍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도 모를 놈이 나타나 점찍었던 여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배알이 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특히나 이 셋은 모두 육체계열을 개화한 우월한 피지컬을 통해 학원 내 여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는데 지금은 유행지난 구두마냥 그녀들의 기억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느낌이다.
"어? 야. 저 새끼다."
그때 계단을 내려가던 셋 중 하나가 계단 밑에서 걸어 올라오는 제황을 발견하고는 둘에게 알렸다. 아침 운동을 다녀오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회색의 낡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제황이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광채가 흐른다는 그 얼굴은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도 없는지 하루 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인 놈이다. 그냥 찐따였으면 무시하겠는데 난놈이 그러고 다니니 더욱 건방져 보인달까?
"야..."
가장 앞서 걷던 이가 가운데 있는 이를 향해 살짝 턱짓을 하자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인 그들이다. 육체계열도 아닌 마법계열의 힐러니까 먼지만 안 묻게 흠씬 두들긴 뒤 치료 시켜 버리면 완전범죄다. 이보다 더 완벽한 계획이 어디 있는가.
서로 마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제황과 교차하는 순간을 기대하며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교차하는 순간...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어깨를 과도하게 내밀며 제황과의 충돌을 유도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시빗거리 하나... 그렇지만 그 어깨 밀침의 당사자인 제황은 그걸 유유히 피하고 있었다. 과한 회피도 필요 없어 보이는 간단한 동작이다.
"어엇!"
어깨에 과도하게 힘을 준 뒤 억지로 치려했던 남자는 부딪히고자 하던 게 순간적으로 사라지자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억..."
앞서 걷던 이는 뒤에 있던 친구가 자신 쪽으로 넘어지자 잠깐 놀라며 그를 받아냈다. 그 또한 육체계열 각성자로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틀린 반사 신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둘이 엉켜 계단을 구르는 험한 꼴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우스운 꼴이 될 뻔했다.
"야!"
그 때 가장 후위에 서 있던 남자가 계단을 오르는 제황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단을 오르던 제황이 그를 돌아봤다.
"너 피하다가 사고 날 뻔 했는데 사과도 안하냐?"
상당히 억지스러운 말이지만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시비거리다.
"아 미안..."
제황이 슬쩍 손을 들며 말하자 가장 앞에서 친구를 받아낸 남자가 외쳤다.
"하...미안? 저 새끼 싸가지 보게?"
건성으로 대하는 제황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은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제황을 향해 성큼성큼 올라갔다.
"사람이 다칠 뻔 했는데 그 따위로 밖에 사과 못하냐? 그리고 미안? 말 XX 짧다?"
"..."
그의 말에 제황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그것이 또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제황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하...새끼...꼬나보는 거 보게? 너 따라와 새끼야."
투투툭...
힘에 자신 있던 그는 제황을 들어서 끌고 가려 했지만 제황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옷 안에 걸치고 있는 것의 무게와 교묘한 중심이동이 그가 순간적으로 들어 올리는 힘을 중화시켜 버린 것... 그렇지만 입고 있던 낡은 트레이닝 복은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실밥이 주르륵 뜯어져 버렸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다.
"아...단벌인데..."
작게 읊조리는 제황의 목소리에 살짝 한기가 서렸지만 그들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뭐! 새끼가... 따라와!"
다시 힘을 줘서 잡아끌려 했지만 이번에는 제황이 그의 손을 가볍게 풀어버렸다.
그러더니 앞장서서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야! 너 어디가!"
"따라오라며. 빨리 와라. 바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