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32화 (32/301)

# 32

학원다녀요.

-인간은 정말 많이 발전했군.

-응.

버스가 동대구터미널로 들어서자 궁기가 감탄을 터뜨렸다. 청정무공해 자원인 마나석을 이용한 무궁무진 에너지는 가장먼저 도시의 대기오염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푸르른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한 거대한 빌딩의 숲에 촌아낙 궁기는 연신 놀랄 뿐이다.

한참 감탄을 내뱉던 궁기의 음성이 뚝 끊겼다. 뭘 보고 그리 놀랐나 싶어 창밖을 바라보니 반대편에서 오는 버스에 붙은 먹음직스러운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진이 보인다. 얼마 전 베스킨에서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봤을 때 궁기는 정말 가게를 거덜 낼 것처럼 먹어댔다. 빼앗아 먹으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데 그 시험이라는 걸 꼭 봐야 하느냐. 몬스터를 죽이는데 그런 게 왜 필요한지 난 모르겠다.

자신이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숨기려는지 말을 돌리는 궁기다.

-그러게 말이야.

궁기의 말에 낮게 한숨을 내쉰 제황은 새로 개통한 광역폰을 켰다.

헌터라이센스 시험은 인터넷을 통해 쉽사리 신청했지만 그 시험 내용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과거에야 헌터가 태부족이었으니  전투력만 높으면 다른 것은 다 무시하고 라이센스를 발급했지만 이제 그런 건 다 옛 일이 되어 버렸다. 헌터의 능력뿐만 아니라 가진 바 모든 것을 측정하여 함량부족의 헌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터도 쉽지는 않네.

스마트폰을 통해 시험내용을 다시한번 확인한 제황이 혀를 찼다.

시험은 총 3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1차 필기, 2차 체력장 과 실기 3차 면접 이다.

필기는 총 세 가지 과목이었는데 헌터관련법, 레이드상식, 공통윤리 로 나뉘고 모두 합쳐 300점 만점에 250점 이상 맞아야 합격이다.

2차 체력장은 총 5가지 종목의 기록을 측정하여 총 다섯 가지 중 마법계열은 2종목 통과 육체계열은 4종목을 통과해야 하며 실기는 보유한 스킬을 대련을 통해 시연하는 것으로 3명의 심사관이 스킬을 종합평가한다.

그리고 마지막 3차는 5명의 심사관이 인성을 평가하는 시험인데 의외로 앞에 3개를 통과해도 마지막 3차 면접에서 떨어지는 이들이 꽤 많다 하니 그리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너 정도도 떨어질 정도인가? 넌 강해졌다.

궁기가 말했다.

-강함 만으로 다 해결되면 참 좋겠지만...

궁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자연각성자인 디바우저라는 것을 떠나 엘어스에서 2년간 피를 말리며 레벨업을 한 덕분에 많이 강해진 건 사실이니까.  2년 전에 봤었던 스타더스트 클랜의 스쿼드 정도는 혼자 잡아낼 자신도 있다.

문제는 제황이 필기에 극단적으로 약하다는 것이었다.

냉정히 따지면 제황의 학업수준은 딱 중학교 2학년 정도였다. 전통적으로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하는 한국 스포츠업계의 병폐가 여기서 드러나는데 관계 법령으로는 스포츠특기생이라도 일정한 수준의 학업평가를 달성해야 하는 게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학교 차원에서 유야무야 배려해준다.

그 배려의 대표적인 수혜자가 바로 제황이었다.

시험 날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한 달... 제황은 필기시험 때문에라도 대구에 있는 헌터학원에 등록해야 했다.

"천제황님...필기반 한 달 치 신청하셨네요. 기숙사 한 달...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죠. 계약한 식당이 있는데 따로 식비는 한 끼당 6000원으로 계산해서 식권을 발급해 드려요."

안내데스크의 꽤 글레머러스한 여직원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제황을 향해 물어왔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네. 식사는 안하시고... 혹 개인차량은 없으시죠?"

"네."

"그럼 총 계산해서 78만원입니다. 숙소는 학원 7층이고요...숙소에는 사감이 따로..."

여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제황은 주위를 둘러봤다. 인터넷을 통해 미리 보기는 했지만 상당히 세련되고 고급진 모습의 학원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기숙학원이라기 보다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의 느낌이랄까?

"아... 그리고 실기반을 함께 신청하지 않으셔서 따로 기재할 필요는 없지만 응시 부분이랑 계열을 적는 게  있는데  어떻게 적어드릴까요?"

"하이브리드에 응시합니다."

제황의 대답에 받아 적을 준비를 하던 여직원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제황을 다시 쳐다보고는 황급히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볼에 홍조는 덤이다.

"오랜만에 하이브리드로 응시하시는 분이네요. 그럼 어느 계열 지망이신가요?"

"힐러요."

제황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빨개졌다.

-이 암컷은 왜 이러느냐.

-하이브리드라는 건 헌터라이센스를 마법계열과 육체계열 함께 시험을 본다는 소리니까. 게다가 힐러는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능력이고...

하이브리드는 마법과 육체계열 모두에 스킬이 있다는 뜻이니 눈이 번쩍 뜨였으리라.

게다가 굳이 헌터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잘 아는 사실...

힐러...헌터계의 귀족이라 불린다. 힐러는 사실 헌터라이센스를 취득할 필요도 없다. 생명을 다루는 사회전반 모든 부분에서 그들은 귀중한 인재니까. 그런 힐러가 헌터라이센스까지 취득하면 그 몸값은 천정부지로 뛴다.

일례로 이전에 아가스테론을 토벌하러 왔던 스타더스트 클랜의 스쿼드에도 힐러가 없었을 정도로 힐러는 희귀한 능력이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대형 클랜에서 비싼 몸값을 주고 게이트 안으로 모셔간다.

그리고 행여 다칠까 금이야 옥이야 운용하는 게 힐러들이다.

"작성 모두 끝나셨습니다. 짐이 혹시 따로 있으신가요?"

"아뇨. 이게 답니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황이 등에 맨 배낭을 힐끔 보여주자 사무직원은 아까보다 훨씬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제황에게 말했다. 아니 단지 사근사근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영혼 없는  만들어진 친절이었다면 지금은 진심이 듬뿍 담긴 표정이다.

-힐러라는 게 대단한 건가?

-응. 다른 대부분의 이능들은 전투가 아니면 쓸모가 없지만 힐러들은 스킬보유 만으로도 억대연봉 보장이거든.

-굳이 활쟁이로 등록 안한 이유가 있었군!

-활쟁이가 뭐냐. 활쟁이가... 그리고 딱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니야.

궁기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으려니 한 남자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자 여자 사무직원은 그 직원을 자신의 자리에 딱 앉히고는 제황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후로 제황은 직원의 사심 가득한 친절 속에 학원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기존의 배정되었던 방 또한 여직원의 도움으로 좀 더 좋은 위치의 방을 얻을 수 있었는데 숙소의 침대를 두들기는 여직원의 은근한 표정은 부동심을 단련한 제황으로서도 매우 난감한 얼굴이었다.

"안내는 끝났고요. 시험서류 접수는 하셨나요?"

"아뇨. 아직..."

산장에서 인터넷을 통해 신청만 했기에 서류신청은 못한 상태다.

"저희 학원은 서류신청을 대행해 드리고 있습니다. 사진 가져오시면 저희 쪽에서 서류 접수 도와드리죠. 사진을 찍으실 때는 꼭 얼굴이 전부 나오는 정면사진으로 가져오셔야 해요."

"네."

모자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제황에게 말했다.

"바쁘지 않으시면 오늘 사진 찍으시겠어요? 마침 학원 맞은편에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러죠."

어차피 할 일도 없었기에 제황은 여직원이 말한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런데 그 여직원은 아직 제황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황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아는 곳이라 제가 가면 좀 더 잘 찍어주거든요."

"아...네."

뭔가 상당히 과도하게 친절한 여직원의 말에 제황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띠리링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니 컴퓨터에 앉아 뭔가 작업을 하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황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어? 승미 왔니?"

"네. 오빠."

정말 잘 아는 사이인지 둘이 인사를 나눈다.

"이분 헌터시험 서류접수 하려는데 사진이 필요해서요."

"아, 그래? 알았어.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제황은 그를 따라 의상룸으로 들어갔다.

"옷은 재킷만 벗으시면 될 것 같고 모자 벗어주시고 으음... 머리카락이 상당히 기시네요. 머리카락은 가급적 뒤로 전부 넘겨주셔야 합니다. 서류접수에 들어가는 사진은 본인의 이목구비가 확실히 나오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의 말에 따라 제황은 입고 있던 후드가 달린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이 사진이 나중에 헌터 라이센스에 들어갈 거라서 가급적 잘 찍는 게 좋아요. 장신구는 다 빼주시고... 얼굴에 특별히 뭘 바르지 않으셨으면 이걸...쓰..."

제황에게 남성용 색조 로션을 권하던 그는 모자를 벗어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제황을 보는 순간 하던 행동을 딱 멈췄다. 그러자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제황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쳐다봤다.

"왜요?"

"아..아닙니다."

제황의 얼굴에 대해 한마디 한 그는 손에 들린 로션을 옆으로 툭 던지며 '이따위 꺼' 어쩌구 하다가 제황이 속에 받쳐 입은 허름한 긴팔티를 힐끔 보더니 각종 의상들이 걸려있는 곳으로 가서 황급히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거 한 번 입어보시죠. 이것도!"

"저 그냥 찍으면 안 될까요?"

꾸미는 것에 그다지 관심 없는 털털남인 제황이 거부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안됩니다. 아무리 패완얼이라지만 최소한 피사체가 가진 걸 받쳐 줄 만한 걸 입어주시는 게 이렇게 공들여 낳아주신 부모님의 고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아. 네."

사진사의 묘한 박력에 제황은 그가 권하는 옷들을 하나씩 입었고 그렇게 네다섯 개의 옷을 바꿔 입다가 제황의 얼굴이 슬슬 찌푸려지자 아쉬움을 달래며 옷 입히기를 중단한 사진사를 따라 의상룸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테이블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던 여직원이 고개를 들어 제황의 얼굴을 보더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러고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제황의 얼굴을 향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제황이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아!"

제황이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여직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제황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말했다.

"죄..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런데...사...사진 가져도 될까요?"

마치 허락 안 해주면 당장에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라 제황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제황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후...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신경 쓰기도 귀찮아진 제황이 허락하자 신이 난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쓸데없이 길게 진행된 촬영이 끝나자 제황은 입은 옷들을 모두 벗고 다시금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러자 그의 곁에서 제황을 바라보고 있던 여직원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굳이 모자를 눌러...아..."

자기 혼자 문답놀이를 하는 여직원을 두고 제황은 스튜디오를 홀로 나섰다. 급 피곤해진 느낌에 오늘은 그냥 숙소에서 자야겠다고 마음먹는 제황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제황에게 궁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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