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엘어스
테러버드 새끼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제황은 이를 악물고 나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옹이 구멍이나 뿌리 사이로 난 굴이라도 있기를 바란 것... 달리는 와중에 무한고에 저장해 놓은 음식물을 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제황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는지 새끼들은 제황이 던진 것들에 관심을 보이며 제황을 쫓는 걸 멈췄다. 조금 안심하려는 찰나 공중으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온다.
콰콰쾅!
테러버드의 어미는 새끼들이 관심가지고 있는 것들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제황을 덮쳐 왔다. 절체절명의 위기...그러나 제황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제황은 공중을 날고 있었으니까. 테러버드의 머리 위로 더 거대한 생명체가 떨어져 내려 그 여파만으로 제황은 공중을 날았다.
퍼퍽...
"크흡..."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은 제황은 몸을 굴려 뿌리둥치 사이에 있는 작은 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작다고는 하지만 제황의 몸 하나는 가쁜히 들어갈 정도다. 어느정도 은폐할 곳을 찾은 제황은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거대괴수대전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본래 힘으로도 저거 이길 수 있냐?
-그... 글쎄... 봉인 좀 풀면... 흠흠
평소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궁기도 이번만큼은 확답하지 못할 지경이다. 테러버드 어미를 덮친 건 그냥 무지막지하게 큰 뱀이었다.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뱀... 마치 봄에 시골 들과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양과 색을 지녔지만 그 뱀의 굵기가 2미터 가량이 되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흐르게 된다. 하물며 꼬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꿀꺽...
다크어스보다 안전하다는 평가받는 엘어스라 어느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고작 F급 1레벨인 제황에게는 다크어스던 엘어스던 헬모드인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저건 미등록몬스터야.
꺼우웅! 꺼우웅!
쉬이이익!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뱀은 순식간에 세 마리의 테러버드 새끼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자 어미는 그대로 뱀의 머리를 향해 날아 올랐고 살아남은 새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쾅! 우지직!
흔한 말로 경천동지의 위력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을 울리고 땅을 진동시킨다는 뜻인데 지금 둘의 싸움이 그 수준이었다.
쿵! 쿵쿵!!!
새와 뱀의 싸움은 보통 새가 유리하다. 그것은 땅에 배를 비비고 사는 뱀보다는 새가 좀 더 공격의 옵션이 많다는 것이다. 날아올라 발톱으로 공격하거나 머리만을 집중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압도적인 체급차이에서는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뱀의 머리를 몇 번 씹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것은 뱀의 비늘 몇 개만 떨어뜨렸을 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순간을 노려 몸을 용수철처럼 움츠렸다가 뻗어오른 뱀이 잽싸게 테러버드의 몸을 감아버리자 공중에서 뱀을 공격하던 테러버드는 뱀에 칭칭 묶여 땅에 내동댕이 쳐졌다.
콰콰쾅!
꾸어어억!!!
테러버드의 비명소리가 사방을 진동했다. 몸을 조여오는 뱀을 떨쳐내려 노력하지만 뱀은 시시각각 강하게 조여올 뿐이다. 그러나 뱀 또한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테러버드의 강인한 발톱으로 인해 비늘이 파이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덕분이랄까. 두 몬스터가 생사대결을 벌여주는 덕분에 제황은 정신을 붙잡을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둘의 싸움을 어느정도 냉정한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지직...쿠쿵...
아름드리 거목이 둘의 움직임으로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간다. 테러버드가 일방적으로 밀리는가 싶지만 엎치락뒤치락 하는 형편... 그 때 이대로는 안되겠다 마음 먹었는지 뱀의 공격이 달라졌다.
드르르르르...
머리를 꼿꼿이 세운 뱀의 머리에서부터 목까지의 비늘이 일순간 사방으로 펼쳐지듯 일어났다. 비늘이 일어나자 몸으로부터 특유의 소리를 울리며 몸을 크게 만들었다. 그 폼이 목도리 도마뱀과 비슷했는데 틀린 것이라면 한껏 입을 벌린 뱀이 테러버드의 몸을 제황의 팔뚝만한 독니로 덥썩 물어버렸다는 것이다.
-저 덩치에 독까지 가지고 있어.
제황은 소름이 돋았다. 지구에서는 몇몇 종을 제외하면 뱀이 가진 무기는 둘 중 하나였다. 치명적인 독이든 강인한 피지컬에서 오는 조이기 공격 말이다. 그런데 저 뱀은 저런 어마무시한 몸을 가진 것도 모자라 독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 뜻은 저런 등급불명의 미등록몬스터도 독이 없으면 상대할 수 없는 강인한 포식자를 염두해 두고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뱀에게 물린 테러버드는 몇 번 훼를 치는 가 싶더니 순식간에 땅에 쓰러져 바들바들 떨어댔다. 독이 퍼지는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 보인다. 싸움은 그것으로 종결... 몸을 바들바들 떠는 테러버드를 노려보던 뱀은 고개를 쳐들고는 새끼들이 도망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쉬이이익...
이미 다 잡은 거라 생각했는지 뱀은 어미를 놔둔 채 새끼들을 찾으러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뱀의 입장에서야 느릴 뿐 제황이 볼 때는 그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뱀이 사라지자 제황은 땅에 쓰러진 테러버드에 주목했다.
테러버드에게 주입된 독이 신경독인지 마비독인지는 알 수 없다. 이계의 몬스터들이 가진 독은 지구의 독들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렇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잘못 들어온 느낌이야. 미쉘 최의 표현으로 하면 엿된 느낌?
-미쉘 최는 누구야?
-내 남자에 출현하는 게이바... 에이스...
-후...
어째 가져다 붙여도 그딴 것에 가져다 붙이는지 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안타깝게도 제황은 궁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다. 단순한 오만함이 아니라 시공옥에서의 깨달음과 함정, 그리고 철저한 계획만 있으면 아가스테론 정도는 사냥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으니까. 그러나 웬걸. 이곳에서 아가스테론은 먹잇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나가자.
-음. 그 말에 동의한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투자한 게 아깝기는 하지만 첫경험이 너무 강렬한 덕분에 지구로 돌아가 좀 더 확실한 계획을 세워야 겠다 마음먹은 제황이었다.
-온다.
-응.
얼마 지나지 않아 뱀이 돌아왔다. 뱀은 땅에 쓰러져 바르르 떨고 있는 테러버드를 그대로 집어 꿀꺽 삼켜 버렸다. 털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목 속에 집어넣은 뱀은 슬금슬금 나무위로 다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숲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마치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려는 것 마냥...
제황은 [호랑이사냥]을 켜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곳을 벗어났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호랑이 사냥을 활성화 시킨 상태에서는 아직 걸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은신계열 중에서는 특급에 달하는 효과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나뭇잎 밟는 소리까지 주의하며 제황은 윔홀이 있는 동굴을 찾아갔다. 느끼기로는 거의 1킬로미터는 뛴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삼백 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다. 그만큼 당시 상황이 급박했던 것... 동굴에 거의 가까워지자 제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스킬이 깨지지 않고 온전히 유지된 것... 그 때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블 엿...
-응?
궁기의 말에 제황은 동굴 안을 바라봤고 곧 궁기의 말이 어떤 뜻인지 깨닫고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꾸루룩?
동굴 안쪽에서 거대한 머리가 튀어나오더니 겁먹은 듯 좌우를 획획 살피고는 다시금 쑥 들어가 버렸다. 일견 참으로 귀여운 모습이지만...
-니기미...
-조또...
오랜만에 제황과 궁기의 의견이 일치되는 순간이다.
-죽여 버려!
궁기가 살벌한 음색으로 외쳤지만 제황은 그 말에 부정적 의견을 주석으로 달았다.
-테러버드는 새끼도 3티어급이야. 그리고 저 안에 몇 마리가 있을 줄 알고?
몇 마리가 들어갔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뿔뿔이 흩어졌으면 참 좋겠지만 가정일 따름이다. 최악의 경우는 살아남은 것들이 전부 이 동굴로 들어갔을 때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긴... 일단 다른 곳에 근거지를 마련해야지.
자꾸 생각지 못한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져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제황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두려움을 용기로 승화시켜 인내하면 기회는 찾아온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 찾아온 기회를 잡지 못한다고...
-여기가 지구 쪽과 지형이 비슷하니까 조금 더 올라가면 괜찮은 근거지가 하나 더 있어.
-안 좋아. 안 좋아. 뭔가 불안하다.
궁기가 말했다.
-설마 이보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래.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이보다 안 좋은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
제황이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떠나고 몇시간 후...
“찾았습니다!”
암녹색 방호구로 온몸을 통일한 한 인영이 손을 들어 외치자 근처를 수색하던 같은 복색의 사람들이 곧 그의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음. 이런 곳에 굴이 있었군.”
그들 중 지휘자로 보이는 인물이 동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잠시 동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윔홀 확인 완료... 제대로 찾았네. 전대원 이 근방으로 다시 수색 시작한다. 윔홀 근처에는 다른 윔홀도 있을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탐지스킬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땅을 파서라도 찾아!”
“예!”
그의 말에 암녹색 방호구의 인물들은 일제히 대답하며 신속히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때 처음 이 동굴을 발견한 이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는데 짧게 깎은 머리를 한차례 쓸어 올린 그는 굴 앞에 쪼그려 있는 이를 향해 물었다.
“대장님. 개미를 투입할까요?”
그의 말에 대장이라 불린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것은 매뉴얼대로 실행해.”
“예!”
그의 말에 남자는 등에 매고 있던 배낭을 풀었다. 그리고 배낭 안에서 약 40센티 가량 크기의 검은색 기계를 꺼내 대장의 앞에 내려놓았다. 두부로 보이는 곳의 뚜껑을 열고 스위치를 누르자 기계에서 6개의 발이 튀어나오고 곧이어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배낭에서 함께 꺼낸 스크린이 달린 키패드를 몇 번 조작하자 다리 6개 달린 기계가 그의 조종에 반응하여 전후좌우로 움직인다.
“개미 -08 점검 완료했습니다. 투입하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된다. 아가스테론이 발견되었으니 엘어스일 테지만 이 근방에서는 처음 발견된 윔홀이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개미라 불리는 그 기계를 조작해 동굴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시 후 개미에 부착된 적외선카메라가 동굴 안을 훤히 비추기 시작했다.
“윔홀 통과 완료... 지형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입니다. 토양시료채취 1시작... 대기시료채취 1시작...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남자가 조작하는 개미는 느리지만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며 앞으로 진행해 나갔다.
그 때 대장이라 불린 이가 소리쳤다.
“멈춰! 열화상카메라로 전환!”
“예!”
대장의 명령에 남자는 황급히 개미의 시야를 적외선 카메라에서 열화상 카메라로 전환했다. 열화상 카메라는 열을 추적, 탐지하여 화면에 보여주는 장치였는데 주로 생명체를 추적할 때 사용하는 기계였다. 적외선 카메라도 촬영이 가능하지만 열화상 카메라는 은신해 있는 것들을 찾는데 더욱 특화된 기능이었다.
“저건...”
“몬스터 발견... 종류는 알 수 없습니다.”
상당히 거대한 것이 동굴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워낙 빈틈없이 동굴을 메우고 있어 건성으로 보면 벽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몬스터를 발견한 대장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투구를 벗고 드러난 얼굴은 50대 초반의 꼬장꼬장한 표정의 인물이었는데 특이점이라면 온 얼굴을 덮고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