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엘어스
그리고 윔홀로 들어서는 당일... 제황은 사당에 들러 선조들께 인사를 드린 뒤 정문을 꼼꼼히 봉했다. 궁기리의 송노인에게 연락해 전화가 되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와 함께 산장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지금 윔홀 앞에 다시 섰다.
-준비 다 했지?
궁기가 물었다.
-일단 들어가서 윔홀이 안전한지 확인한 다음 더 필요한 게 있는지 조사해서 돌아올 거야. 수련하기 적당하다고 판단되면 주변 탐색을 하며 지형과 몬스터 종류나 식생 같은 걸 파악해야지.
-그거 말고 내꺼.
궁기의 말에 제황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두 번 확인했다.
-좋아. 호호홋...
자신은 지금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건만 철딱서니 없는 요괴 한 마리가 자꾸 기분을 망치자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윔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슈욱...
제황은 이전에 확인한 것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발이 안으로 들어가자 곧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안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나타난 것은 아주 어두운 동굴... 제황은 끼고 있던 고글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이 고글은 헌터용으로 제작된 것인데 눈의 보호뿐만이 아니라 야간시에 특화된 헌터들이 몬스터에게 감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주 약한 빛을 투사해 주는 기능이 부착된 물건이었다.
동굴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는데 5분여 정도 진행하자 코를 찌를 듯한 악취가 났다. 동물의 배설물 냄새라는 생각에 [호랑이사냥]을 켠 채 진행한 제황은 썩은 나뭇가지가 가득한 공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새끼 아가스테론 두 마리가 굶어 죽어 있었다.
-아가스테론의 둥지로 뚫린 윔홀이었군.
-새끼를 키운 걸 보면 암컷이었나보네. 수컷이 있을까?
-아니, 수컷이 있다면 새끼가 굶어 죽도록 방치하지는 않았겠지.
대형 포유류 중에는 흔히 있는 경우다. 짝짓기 때만 암수가 만난 후 헤어져 암컷이 새끼를 돌본다. 그러나 일단 수컷 아가스테론이 있다는 가정 하에 조심스럽게 탐험을 재개했다.
전체적인 구조는 구불구불했지만 덩치 큰 아가스테론이 살았던 곳이니만큼 상당히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잠시 후 출구를 확인한 제황은 고글을 끄고는 밖으로 나섰다.
휘이이...
처음 그를 맞이한 것은 세찬 바람이었다. 지구 쪽은 한창 겨울을 향해 다가가고 있지만 이곳은 마치 열대우림의 그것처럼 후덥지근했다. 습도가 많이 포함된 뜨거운 공기다.
-신기한...세상이구나. 저쪽 세상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엘어스를 본 궁기의 첫 소감이다. 엘어스와 지구가 지형이 비슷하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던 지구 쪽과 같이 이곳도 산등성이 부근이었다. 산의 모양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궁기산을 잘 아는 제황에게는 전혀 같은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산의 모양만 비슷할 뿐 골짜기라던가 나무의 크기, 종류 하다못해 무성하게 우겨진 풀들 또한 전혀 틀렸다.
-같지만 전혀 틀려.
사방을 둘러본 제황은 단정하듯 말했다. 지구는 어느 정도 인간이 살 수 있는 땅들이 보였지만 이곳은 시야의 닿는 지평선 끝까지 오로지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대수림 뿐이었다. 그것도 작은 나무가 아닌 하나하나가 100미터는 넘을 듯한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히 자리해 있었다. 그나마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지대가 높은 곳이고 주변에 큰 나무들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 대수림 사이에서 나왔으면 방향을 가늠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크르르르르륵.. 카아악...크크륵... 컹
아주 멀리서 몬스터의 것으로 추측되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소리가 울리는 거리와 소리의 크기를 계산해 볼 때 울음소리의 주인들의 크기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주변을 정찰하기도 힘들겠어.
제황은 광역폰에 넣어온 지도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 지구와 엘어스의 지형이 비슷하다기에 궁기산과 주변 지역의 지도를 따로 다운받아 왔는데 이정도로 틀리다면 지도는 전혀 무쓸모 하다. 이곳에 서식하는 맹수들도 만만해 보이지 않는 상황...제황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궁기가 말했다.
-그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곳은 마나의 농도가 저쪽 세상보다 상당히 짙어.
그 말과 함께 제황의 눈으로부터 하얀 기운이 새어나와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전처럼 사람의 형상이 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것이 아닌 상당히 거대한 덩치의 붉은색 매였다. 몸을 점검하는지 날개를 활짝 폈는데 작게 잡아도 날개길이가 3미터는 되어 보였다.
-마나가 풍부해서 네 마나 없이도 상당히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근처를 순찰해 주지.
-그래? 그럼 주변 정찰 좀 부탁할게. 가능한 곳까지 위험요소가 있는지만 확인해줘.
-알았어.
그 말과 함께 궁기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까마득한 상공으로 날아오른 그녀를 보며 제황은 동굴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중요한 궁기가 맡아 줬으니 그 다음 일을 하려던 것..
제황은 사방을 돌아보며 동굴 밖을 걸었다.
각종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제황은 경계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예방접종도 꼼꼼히 받았고 엘어스의 일반적인 생명체에 대해서는 거의 다 공부한 상태다.
사실 제황은 이곳에 오면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무련가가 있을 지점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다. 조금만 이동하면 커다란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고 초인이 된 후로 엄청난 시력과 궁기안을 통해 그 어떤 것이라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얻었기에 그것만 확인하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푸드드득...
후우웅...
그러나 제황의 이런 계획은 금세 다시 날아온 궁기로 인해 무산되었다.
-숨어!
-응?
마치 그를 덮치듯이 날아온 궁기로 인해 땅에 넘어진 제황은 궁기가 자신을 덮는 순간 거대한 검은 그림자와 궁기와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등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들어와!
-그! 그래!
몸을 돌려 거목으로 몸을 피한 제황은 [호랑이사냥]을 발동했다.
-어떻게 된 거야!
-미안, 내가 경계심이 좀 부족했다.
쿠우웅웅...
뭔가 거대한 것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행히 [호랑이사냥]이 먹히는지 기척을 숨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은 그 지속시간이 길지 않다. 슬쩍 고개를 빼 땅에 내려선 그것을 바라본 순간 제황은 황급히 고개를 집어넣었다.
-어째 끌고와도 저런 걸 끌고 왔니.
-미안하다고!
웬만하면 당황하지 않는 제황도 이때만큼은 놀라버렸다.
땅에 내려선 것은 일명 테러버드라 불리는 거대한 육식 새였다. 분류된 위험도는 5티어 중급의 몬스터... 아가스테론보다 두 단계 상위의 포식자다. 전형적인 새의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8미터의 체고에 근육질로 발달한 튼튼한 두 다리, 상어보다 날카로운 톱니 이빨...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공중기동시 마나를 이용하기에 엄청난 선회능력과 무시무시한 급강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꺼우웅...꺼웅...
두리번거리던 그것은 먹이를 놓치자 분한 듯 몸을 어정거리며 이리저리 돌린다.
-감이 안 좋아.
-응?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제황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놈이 고개를 들어 몇 번 울자 주위로 조금 작은 크기의 테러버드들이 속속 내려앉았다.
물론 어미에 비해 작다는 것이지 작은 놈들도 4미터는 되 보인다. 날개가 작은 것으로 보아 비행은 불가해 보이지만 그 크기가 깡패였다.
테러버드의 새끼들은 곧 근처에 숨은 먹이를 찾으려는 듯 사방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병아리들이 땅에 숨은 지렁이를 찾아 휘젓고 다니는 풍경... 문제는 제황이 지금 지렁이였다.
[호랑이사냥]의 지속시간도 끝날 시간... 제황은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의 위기라는 게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큭... 내가 본래 힘만 있었다면 이정도 놈들은...
궁기가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제황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애써 꾹꾹 누르며 테러버드의 새끼들에게 집중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너무 얕봤구나.'
제황은 동굴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다. 궁기를 정찰 보내기 보다는 굴 안에서 직접 정찰을 시작해야 했다. 아주 약간의 방심이 이런 위기를 부른 것...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아쉽지만 그렇네.
궁기의 말대로 사면초가의 상태다. [호랑이사냥]은 이제 곧 꺼질 것 같고 주변에 우글거리는 테러버드는 큰놈을 포함해 무려 7마리였다. 작은 놈이라고는 하지만 적잖은 크기의 머리들이 사방으로 머리를 쑤시고 다닌다.
꾸루룩?
그 때 테러버드 새끼 한 마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잠시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
눈앞의 제황을 정확히 보려는지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지만 미안하게도 상대는 체고 4미터짜리 몬스터였다.
캬아악!
콰쾅!
테러버드새끼의 거대한 아가리가 방금 전까지 제황이 있던 자리에 있던 고목을 한 움큼 물어뜯어 어그적거리며 씹어댔다.
"빌어먹을!"
몸을 날린 제황은 땅을 한 바퀴 구른 후 온힘을 다해 다른 나무로 뛰었다.
남은 것은 도주뿐이다. 각성하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빨라졌지만 테러버드들은 제황보다 더 빨랐다.
꺼우웅!
꾸루룩!!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서 느릴 거라는 예상은 일찌감치 버린 제황이다. 그만큼 테러버드는 소름 돋도록 빨랐다. 세 번 발돋움 하는 순간 이미 모든 테러버드들의 고개를 제황을 향해 돌아갔고 다섯 번째 걸음을 걷는 순간 미친 듯이 제황을 쫓기 시작했다.
퍼퍽! 퍼퍼퍽! 우지직..우직...
웬만한 굵기의 나무들은 그냥 몸으로 박살내며 달려든다. 그중 가장 두려운 것은 역시 어미... 다른 것들보다 몇 미터 큰 만큼 보폭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다행이라고 할 건 나무가 우거진 덕분일까. 하늘로 날아오르지는 않았다. 물론 하늘로 날아오르면 제황은 그날로 끝나는 거다.
꾸루룩!
제황이 땅에 내려서는 순간 가장 선두에 쫓아오던 새끼가 머리를 쭉 뺐다.
"헉!"
거리가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제황은 자신을 향해 확대되듯 덮쳐오는 거대한 주둥이를 보며 몸이 굳어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테러버드의 목이 쭉 늘어나더니 그대로 가슴팍을 물어오는 것...
-위험해!
그 때 제황의 앞으로 붉은 빛의 작은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나 테러버드의 눈을 덮쳤다.
캬아앙
꾸룽!
깜짝 놀란 테러버드는 순간적으로 도리질 쳤고 그 찰나의 틈을 타 제황은 다시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마워!
-달려!
꾸루룩! 터텁!
다시 한 번 입질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용혈무]의 회피기로 피해냈다. 다물어진 주둥이를 박차고 다시금 튀어나간 제황은 한눈에 봐도 잡목이 거미줄처럼 얽힌 곳을 발견하고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곳으로 뛰어 들었다.
"헉헉..."
꾸워어억!
꾸룩! 꾸룩!
일곱 마리의 테러버드들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머리를 들이밀다가 엉켜 쓰러졌다. 심호흡을 한 제황은 거의 필사의 의지로 [호랑이사냥]을 발동시켰다.
[스킬이 실패하였습니다.]
-제기랄!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잘 해봐.
-늦었어!
집중이 깨지자 그간 잘 활성화되던 [호랑이사냥]의 활성화에 실패해 버렸다.
이것은 게임과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틀린 스킬의 특징이다.
세이브는 갖가지 이능을 스킬이라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흔한 게임의 스킬과 비슷한 구동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스킬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일정하게 소모되는 마나가 있었고 그것은 한 번 사용한 후 천천히 다시 차오르는 성격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명 쿨타임이라고 불렀는데 제황이 측정한 [호랑이 사냥]의 쿨타임은 대략 20초에서 25초였다.
그러나 각성자의 스킬이라는 것이 게임과는 또 다른 게 게임이라는 것은 발동을 원하면 프로그래밍 된 방법을 통해 곧장 이루어지지만 현실의 스킬들은 그 시전자에게 고도의 정신집중 또한 필요로 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집중이 힘든 상황에서는 곧장 실패하곤 했다. 문제는 지금 이 사태가 제황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라는 것... 스킬이 실패하면 쿨타임은 다시 돌아간다. [호랑이사냥]을 포기한 제황은 약 50미터 가량의 거리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발견했다. 일견하기에 왠만한 높이의 고층빌딩 크기의 거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