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6화 (26/301)

# 26

모범사냥꾼

이틀 후 제황은 점심 즈음하여 궁기리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로 나섰다.

이유는 윔홈에 들어가기 전 준비를 위한 것... 다짜고짜 맨몸으로 들어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단순한 캠핑으로도 수십가지의 준비물이 필요한데 하물며 윔홀이야 말할 것도 없이 보다 세심하고 계획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흐음...”

제황은 버스 안에서 폰을 굴려 한 해외블로그에 올려진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블로그의 이름은 ‘이세계에서 100일 살아남기’ 다.

궁기가 물었다.

- 뭐 봐?

-엘어스에서 홀로 생존하는 사람의 영상이야.

-호오... 엘어스라는 곳은 꽤 재미있어 보이는군.

제황과 시야를 공유하는 궁기는 영상속의 인물이 이름 모를 나뭇가지들을 묶어 간이 경보장치를 만드는 것을 보며 말했다.

-재미? 흥...글쎄 거기가 진짜 재미있을까.

대충돌이 일어났던 날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아온 제황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서는 수많은 관련자료들이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단 하루동안 수억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말 그대로 인류 최후의 날... 성서에 나오는 하르마겟돈 이라 불린 그 날이다.

수백만도 아니고 수천만도 아니고 수억이 죽었다. 단 하루 동안... 엘어스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배가 부르면 활동을 멈췄다. 문제는 다크어스였다. 다크어스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는데 그것들은 단순한 포식자가 아니었다.

포식자라면 배가 부르는 순간 사냥을 멈추는 게 순리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이 아닌 살육을 위해 움직였다. 그로 인해 일주일만에 수많은 국가들이 멸망했고 당시의 일로 세계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또 강제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왜 코웃음 치는데?

궁기가 시비걸 듯 말했지만 제황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블로그에 집중했다. 만약 아직도 그 때를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궁기와 같이 말하면 단숨에 따귀를 얻어맞을 것이다. 구수한 쌍욕과 함께..

-시끄러. 좀 보게.

-흐흥...

블로그의 주인은 탐사를 전문으로 하는 BJ헌터였다. 상급헌터의 라이센스를 지닌 베어그릭스라는 영국인이었는데 그는 엘어스를 돌아다니며 경험했던 것들을 블로그에 영상과 함께 올리기로 유명했다.

-오늘도 지치네요. 엘어스에서의 생활 30일 째입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지구에서 예방접종을 충분히 하기는 했지만 항상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시죠? 일주일 전에 홀로 외떨어진 코카트리스를 레이드하며 얻은 상처... 아직도 회복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녀석의 고기는 그다지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매일 설사를 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는 이런 모양의 가는 줄기가 달린 식물의 뿌리를 달여 먹는 게 좋습니다. '엘의자비' 라는 식물인데 이 동네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하죠. 물론 뿌리를 달이는 물도 꼭 정수장치를 거치는 게 좋습니다. 우리 지구도 그렇지만 이곳의 물들도 지역에 따라 성분이 천차만별이라 아차하면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설사만 하다가 탈수로 생을 마감할 수 있거든요.

화면에 나오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는 자그마한 버너에 이름 모를 풀을 끓이고 있었다. 잠시 후 충분히 식은 물을 한모금 들이키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화면을 바라본다.

-우엑... 마치 말 오줌을 먹는 느낌입니다. 상당히 비려요.

말오줌 같다 말하면서도 끓인 물을 모두 들이킨 베어그릭스는 커다란 나뭇잎들을 모아 뚝딱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엘어스로 레이드를 오는 헌터들은 최신식의 텐트나 장갑이 달린 캠핑카를 마련하지만 저는 오늘 이것으로 잠을 청하겠습니다. 이 큰 잎에서 나오는 특수한 향기는 몬스터로부터 제 향기를 지워줄 겁니다. 물론 그 전에 제 감지스킬이 위험을 알려줄 테니 상관은 없지만요. 하하... 가급적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분들은 저같이 위험한 짓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점입니다."

한창 광역폰에 집중하던 제황은 들려오는 안내음에 폰을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서 내려섰다.

궁기리에서 가장 가까운 읍인 청운읍은 정말 작다. 읍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데 빠른 걸음으로 단 10분이면 가능할 정도이기에 이 동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손바닥만한 읍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약 5분 가량을 걸어 붉은색 벽돌의 우체국이 나타나자 제황은 안으로 들어섰다. 일하는 사람은 단 두 명이지만 별로 일이 없는 듯 분위기는 한산하기 이를데없다.

“어떻게 오셨어요?”

제황이 들어서자 한 어린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황을 반겼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이 안보여 무서울만도 하건만 마치 제황이 이 따분한 곳에서 구해줄 사람이라도 되는지 반갑게 맞이했다.

“우체국으로 택배를 시킨 게 있어서요.”

“이름이?”

“천제황이요.”

제황의 대답에 여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낡고 두꺼운 서류철 하나를 꺼내 펼친다. 그러더니 컴퓨터를 몇 번 두들기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제 저녁에 도착했네요. 오늘 물건이 왜 이렇게 많은가 싶더니... 따라오시겠어요?”

“예.”

제황은 우체국직원의 안내를 따라 우체국 뒤편으로 향했다. 궁기리는 워낙 외지이기에 택배조차 집까지 오지 않는다. 하물며 목적지가 산이니... 외부에서 배달을 시킨 물건들은 모두 이렇게 우체국에서 수취를 하는 편이다.

"신분증 있으시죠?"

"여기요."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주자 수취실 한편에 있는 작은 단말기로 조회를 마친 뒤 제황에게 돌려줬다. 잠시 후 박스가 가득 담긴 큼지막한 롤테이너가 제황에 앞에 놓이자 여직원이 물었다.

"차 가져오셨나요?"

"아뇨. 일단 물건 확인하고 알아서 가져갈게요."

"아. 네. 그러세요."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여직원이 사라지자 롤테이너에 담긴 상자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상자에 담긴 것들은 엘어스에 가기 전 필요한 것들을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청운읍이 워낙 작은 관계로 이런류의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는 통신판매밖에 없다.

"정수장치 한세트... 향신료 세트 하나..."

-초콜렛은?

"고드 공방제 범용방어구세트와 슈팅스타시리즈 D급 교체용 활시위 20묶음... 이게 제일 비싸군."

-초콜렛은?!

"엘어스용 B타입 비상식량 한 달치랑 중형몬스터용 마나리움 화살촉 100개...

-내 초콜렛!

머릿속으로 자꾸 초콜렛 타령이 울리자 물건들을 확인하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는 제황이다.

-돈 없어.

제황의 말에 궁기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 광역폰 쳐다보면서 돈 많이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초콜렛도 사기로 약속 했지 않았느냐!

궁기의 말대로 그제 밤 그 미남헌터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내준 정산액이 들어옸다. 무려 1200만원 ... 꼼꼼한 타입인지 아가스테론의 대한 정산내역을 따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제황은 거기서 헌터라는 직종이 얼마나 많은 세금을 뜯기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환경부담금은 둘째치고 농어촌교육세는 왜 떼는지... 아무튼 그 금액을 포함해 제황이 가진 돈 전부는 고스란히 제황의 인터넷 쇼핑에 전부 들어갔다.

-화살촉 사는데 다 썼어.

-사준다며!

-생각해본다고 했지.

-약속을 어기다니!

-약속은 안했어.

-이런! 무련가의 놈들은 죄다...

무련가의 자존심까지 들먹이며 초콜렛을 졸라대는 궁기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황도 조금 미안한 감이 있었다. 화살촉은 본래 구매계획에 없었던 것, 집에 남아도는 게 화살이고 제작과 수리가 가능할 정도로 갖가지 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문제는 리커브보우의 정품 활시위를 사러 들어갔던 사이트에서 무려 80퍼센트 할인 행사 상품으로 중형몬스터용으로 제작된 구버전의 화살촉을 대량으로 판다는 것에 눈이 뒤집혀 구매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물론 제황도 그에 대해서는 할말이 있는데 본래 헌터들 중 활을 주무기로 쓰는 이들은 희소했다.  몬스터에 대해서는 총기에 비해 투사무기로는 위력이 훨씬 좋은 편이지만 문제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화살의 갯수가 한정적이라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다. 얼마전 만났던 문신녀도 비싸디 비싼 아공간을 구매한 이유가 화살 때문이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여러 헌터관련 사이트를 돌아다닌 결과 활과 관련된 물품을 판매하는 곳은 세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80프로 파격할인은 제황의 구매의욕을 저격해 버렸다. 마치 지금 아니면 못 사! 라는 것 처럼 말이다.

-이따 맛있는 거 사줄테니 좀 다물어.

-음... 맛있는 것?

-그래.

-뭐...알겠다. 그정도로 봐주지. 맛 없으면 안돼!

-후...

떼쟁이 궁기가 입을 다물자 제황은 한숨을 내쉰 뒤 물건들을 모두 무한고에 집어넣고는 우체국을 나섰다.

-어디로 가느냐.

-빵집...

청운읍에는 단 두개의 베이커리가 존재했다. 하나는 작은 읍이라도 줏어먹겠다고 밀고 들어온 투레쥬 라는 베이커리와 20년 명맥을 잇겠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는 생긴지 10년 된 동네 베이커리였다. 제황은 그 둘중 투레쥬라는 프렌차이즈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궁기가 좋아하는 류는 아무래도 그쪽이 많기 때문...

-저것! 저거저거! 저것도 담아라!

-그냥 네가 나와서 고르지?

-오호... 정말 내 현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궁기의 묘한 의미가 담긴 말에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홧김에 한 말이지만 궁기를 이 청운읍에 풀어놓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이유가 뭐냐고? 이 손바닥만한 읍에 궁기 같은 미녀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그런 미녀를 옆에 끼고 다녀야 되는 제황의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빠르게 퍼지는 동네 소문 같은 건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궁기 또한 백치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기에 그런 것을 이미 염두해 두고 물은 것이다. 혀를 찬 제황은 궁기의 말에 따라 쟁반에 갖가지 빵과 초콜렛 따위를 올려놓았다.

"17만원입니다."

띠딕...

점원은 무려 반나절치 매상을 단숨에 올려준 제황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제황의 카드를 요구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내미니 60센티 가량의 영수증이 주르륵 나왔다.

"하아..."

손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종이봉투들에 놀라는 점원을 살필 생각도 없이 제황은 투레쥬를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얼른 가자!

-하...

목소리가 한껏 업된 궁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황은 농협마트로 향했다.

정수장치는 샀지만 계속 물을 걸러먹을 수는 없기에 생수를 사려는 것 그 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래? 알았어."

매우 익숙한 목소리다. 듣는 것만으로 체모가 일어날 정도로 증오스러운 목소리... 제황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현란한 색의 두꺼운 파카를 입은 30대 초반의 키크고 뚱뚱한 사내가 보인다. 파카 안쪽으로 꽃무늬 난방이 보이고 밑으로는 고동색 양복바지를 입은 남자... 외삼촌이었다.

가족들의 보험금을 가로채간 졸지에 고아에 장애인이 된 조카를 병원에 버려두고 잠적한 인간... 만약 유일하게 제황을 예뻐하던 외할머니가 제황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빌지 않았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인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제황의 분위기가 변하자 가장 먼저 눈치챈 궁기가 물어온다. 그러나 제황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마치 마네킹처럼 뚜벅뚜벅 걸어 그곳을 벗어났다. 외삼촌의 시야에서 벗어난 순간 몸을 숨긴 제황은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외삼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죽일 새끼..."

-죽여?

아직 단 한번도 살인은 커녕 비슷한 짓도 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제황의 입에서 살벌한 말이 흘러나오자 궁기가 물었다. 농담같지만 지금 제황의 두 눈에서 당장에라도 여러사람 토막쳐 버릴 수 있는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응. 죽이고 싶은 놈이야.

진심이다.

-호오...

외삼촌과의 거리가 좀 떨어지자 제황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어차피 머리야 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이기에 별달리 걱정할 건 없지만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금 끓어오르는 살의를 조절하지 못하면 당장에 달려가 어디 한군데 박살내고 싶은 심정을 추슬러야 했다.

-이야기 좀 해봐.

궁기의 물음에 제황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제 궁기와는 한몸과 같기에 그녀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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