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시공옥으로...
제황이 물었다. 유일하게 남은 의문점이다. 솔직히 궁기는 제황이 강해지도록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제황의 현재 목표가 강해지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강해진다는 것은 그 척도가 제황의 판단에서 이루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제황이 원하는 강함의 척도를 충족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넌 강해져야 한다.
-그러니 어째서?
앞뒤 없는 짤막한 대답에 제황이 되물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설명할 수 없어. 그것 또한 맹약이다. 그러나 하나만 말하자면 봉인의 굴레에서 벗어난 무련가의 후손으로 산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다. 너희 가문이 쌓았던 업이 다시금 구르기 시작했을 테니까.
궁기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제황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궁기가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그의 선조가 그를 위해 막아놓은 것일 테다.
그것을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 그리고 제황은 그것을 굳이 열어볼 생각은 없었다.
-좋아. 준비해줘.
-알겠다. 그전에...
슈우웃...
제황의 말이 끝나자 제황의 궁기안으로부터 아스라한 흰 기운이 뿜어져 나와 하나의 인영으로 뭉쳤다. 처음 만났던 성인 모습의 궁기다. 좌정한 제황의 앞에 나타난 궁기는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제황의 머리에 손을 척 올렸다.
“거래를 시작할까?”
“?”
하루가 지난 후 제황은 안채의 가장 큰 방 한가운데 정좌를 한 채 앉았다. 매우 엄숙한 상황 그렇지만 한 편에 쌓여 있는 온갖 박스들이 그 분위기를 박살내고 있었다.
“너 저걸 바라고 꼬드긴 건 아니지??”
“아니다.”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곁눈질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으로 봐서는 아주 틀린 건 아닌 듯 싶다. 그렇지만 일단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제황은 합당한 거래라고 생각하며 무려 100만원 이상이 빠져나간 자신의 잔고를 애써 기억에서 지웠다.
“끝내고 싶으면 그만 하겠다고 말하면 돼. 그렇지만 한 번 이 술법을 쓴 후로는 일 년은 다시 쓰지 못하니 그건 명심하고...”
“알았어.”
제황이 대답하자 궁기가 어제처럼 제황의 앞에 서서 제황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문득 궁장 사이로 뽀얀 다리가 보여 제황은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한창 혈기왕성한 제황으로써는 당연한 것...
궁기는 정말 아름답다. 원래 여성체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조율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러 ‘그녀’ 라 부르기 보다는 ‘궁기’ 라 부르며 멀리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다.
“끝났어.”
궁기의 목소리가 들리자 제황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앉아 있던 그 자리 그대로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 궁기를 바라보던 제황은 단 하나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산처럼 쌓여있던 군것질 더미들이 깨끗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야?”
“그래.”
그 말에 제황은 안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으음...”
바깥의 풍경도 그대로였다.
“경계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돼.”
궁기의 말에 제황은 외부로 나가는 대문을 열어보려 했다.
“아아...”
손잡이가 잡히지 않는다. 마치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을 붙여 놓은 듯 손이 그대로 통과할 뿐이다. 생생한 사진으로 된 곳에 갖힌 기분...
“여기가 시공옥 안이군.”
“그래.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아니... 좋아. 괜찮아.”
이런 공간이라면 정말 수련하기 좋다고 생각하며 제황은 고개를 저었다. 1년에 한 번만 가능하다는 게 아니라면 정말 괜찮은 곳이다. 시공옥이라는 어감만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슈우욱...
문득 눈앞에 낯익은 개량궁 한 자루가 나타났다. 궁방에 있는 그의 평범한 활 중 하나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활세기가 고정되어 있어 고작 40파운드 밖에 되지 않아 이제 건드리지 않던 물건이다.
탁...
엉겁결에 그걸 받아든 제황은 어느새 옆에 와 서있는 궁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자 궁기가 손으로 공중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생각하면 이루어질 거다.”
제황은 그녀의 말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반대쪽 손에 한 대의 화살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본 궁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적응이 빠르구나.”
“칭찬 고마워.”
“으음... 뭐... 그래. 가급적이면 의식적으로라도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그러면 좀 더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이곳에서 벗어난다 해도 다시 현실에 적응하기 쉽고... 그리고...”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듯싶지만 궁기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쯧...난 이제 가보겠다.”
“음...고마워.”
“조언의 댓가는 받을 것이다.”
“그래. 많이 받아라.”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자 궁기는 피식 웃더니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잠시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제황은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에 든 활에 시위를 당겼다.
“대단해.”
정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제황의 곁에 나타난 궁기는 제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순한 재능으로 그게 가능한가.”
궁기는 조금 전 시공옥 안에서 화살을 만들어 낸 제황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간단해 보이지만 그건 절대 간단한 게 아니었다. 생각하면 이루어진다고 쉽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 쉬운 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숙련된 술법의 수행자들도 한참을 걸리는 짓이건만 그런 짓을 단숨에 해냈다.
“극한에 이른 단련된 몸과 믿을 수 없는 집중력... 마지막으로 그걸 모두 아우르는 정신력...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아."
눈을 감은 채 그 이유에 대해 사유(似喩) 하던 궁기는 이내 상념을 떨치고는 한 편에 놓인 거대한 군것질의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일단 이것 먼저 시작해볼까?”
***
띵...띠리리링...띵띵..
딸칵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제황이냐.
-아...아...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그래. 그런데 그 때는 왜 안내려왔니?
-아, 그게... 몸이 좀 많이 피곤해서 그냥 산장으로 돌아왔어요.
-그렇구나. 난 또 그 날 네가 안 내려와서 한참 걱정했잖느냐.
-죄송해요. 제가 생각을 못했네요. 그 몬스터 일은 잘 해결 됐죠?
-음... 그래. 그 헌터들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너에 대해 좀 궁금해 하던 것만 빼고는 잘 해결 됐다.
-네. 다행이네요.
-허허...그래. 그건 그렇고 언제 내려 올 거니?
노인의 대답에 제황의 목소리가 잠시 머뭇거린다.
-그게...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자식이...자꾸 거부를 해서...
-음? 그게 무슨 말이니?
송노인의 반문에 제황의 목소리가 잠시 당황한 듯 머뭇거린다.
-아뇨. 별 거 아니에요. 저 급한 일 있으니 이만 끊을게요.
-아. 그래. 알았다. 얼른 한 번 내려 오거라.
-예.
전화가 끊겼다.
"이것도... 힘들군. 쯧..."
광역폰을 내려놓은 궁기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정좌를 하고 있던 제황은 지금 이불이 깔린 바닥에 누워 있었다. 몇 시간이면 끝날 것이 오늘로 꼬박 하루째다. 시공옥 안에서의 시간으로 보자면 무려 240일 가량이 지난 셈이었다.
“안 좋아. 안 좋아. 안 좋아.”
사실 궁기는 12시간이 지나서 제황을 강제로 깨우려 했었다.
더 있으면 제황의 정신에 이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 그렇지만 제황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다지 상태가 나빠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일단 억지로 꺼내려 했다. 잘못하면 그것도 제황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제황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최소한 미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궁기는어쩔 수 없이 지금 이렇게 제황의 몸을 돌보고 있다.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를 꺼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제황의 모습은 처음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었다. 마치 시공옥에 빠진 게 자신이 아닐까 하고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제황에게 나오기를 권했다. 이곳은 먹을 필요도 잘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허기를 느끼게 되지만 그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당연한 욕구이기에 너무 오랜 시간 안에서 버티다 보면 정신에 불균형이 일어난다.
“앞으로 반 시진 이상 깨어나지 않으면 억지로 끊어야겠어.”
혼잣말을 한 궁기는 다시금 제황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리고 그 때 제황의 닫혀있던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하아...음... 으윽...”
눈을 뜬 제황은 잠시 멍한 눈으로 주변을 보더니 이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더니 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멀뚱하니 쳐다보던 궁기가 바깥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빨리 가라. 싸겠다.”
“아아... 그래.”
자신의 배를 내려다본 제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안채를 나섰다.
“무련가의 피가 지닌 힘일까.”
홀로 남은 궁기의 독백이 방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