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또다른가능성
“너도 봤지?”
“예.”
임정규는 뒤쪽에 서 있는 미남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자 미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현주야. 완전히 놓쳤냐? 따라오는 것도 몰랐고?”
임정규의 말에 문신녀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네. 따라붙는 것도 감지 못했고... 감지 후에도 총 세 번 놓쳤어요. 죄송해요.”
“아냐... 너보다 내가 더 할 말이 없다. 난 3성급 주제에 뒤를 잡혔다. 하... 세 번... 돌겠구만... 누구한테 창피해서 말도 못하겠어.”
그녀의 사과에 임정규는 감탄인지 한탄인지 세 번이라는 말을 되뇌더니 미남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빌런일까?”
“아뇨. 빌런은 절대 아닙니다. 빌런이라면 애초에 저희를 돕지도 않았겠죠.”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그건 아냐. 그렇지만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 아니 단 하나...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가 있긴 하군.”
그의 말에 문신녀의 입에서 그가 생각했던 그 단어가 흘러나온다.
“저도 디바우저 같아요. 아까 떠봤는데 아는 지식이 너무 적어 보였어요.”
“...”
그리고 모두가 그 말에 납득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년도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만 두 번째 출현이네요.”
“음. 그래. 앞전은 놓쳤지만 저 친구는 절대 빼앗기면 안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예.”
그의 말에 둘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디바우저... 자연각성자... 진정한 각성자를 지칭하는 단어. 강제각성자와는 다르게 성장의 제한 자체가 없는 각성자계의 귀족이다. 그들의 보유는 거대 클랜들의 힘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보유에 신경 써야 하는 전력... 그렇기에 셋이 제황에게 그렇게 과도한 친절을 베푼 것이다.
국가는 헌터들의 실력을 별의 갯수로 구분했다. 그것들 중 최상위층인 5성이나 6성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은 오로지 자연각성자 디바우저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제황에게 집착하는 것이고...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쓰레기라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보통사람의 수준에서 다른 이들을 대하는 평범한 마인드를 지닌 그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국가인증클랜의 소속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허접쓰레기 클랜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허하다. 그들은 단지 정말 우연하게 빛나는 원석을 발견했고 이제는 그것에 대해 욕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알아보는데 까지 알아보고... 정보 보호 들어가게 해. 클랜에는 내가 이야기하지. 최대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자고...”
“그래서 아까 이 녀석을 기절시킨 거군요?”
미남이 질질 끌고 내려오던 스킨헤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놈은 아무래도 그 새끼 라인으로 꽂혀 들어온 놈이니까."
그의 말에 미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쿼드의 리더인 임정규는 상황판단이 무척 빠른 편이었다. 감춰야 할 정보가 있다 판단된 순간 레이드 중 실수를 핑계로 기절에 준하는 린치를 가해버린 것이다.
"명함을 줬는데 그 친구가 찾아올까?"
그의 물음에 미남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잠시였기에 첫인상 뿐이지만 도통 알 수 없는 남자였으니까.
***
-왜 그런 거지?
-뭘?
너무나 포괄적인 물음에 제황이 반문했다.
-네가 디바우저라는 걸 밝히는 것 말이야. 아마 그녀석들 머리가 좀 있다면 너에 대해 대충을 파악했을텐데? 저들을 따라가는 것도 좋잖아.
궁기의 물음에 제황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악했다고 해도 내가 밝히지 않는 이상 그들도 내 의도를 알 테니까. 알아서 입다물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아직 내가 얻은 행운을 지키기에 부족하니까.”
섣불리 자신이 디바우저라는 것을 밝힌다면 자신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달라붙을 수 있었다. 뭐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이라는 건 받는 만큼 줘야 하는 게 이치니까.
그러나 최소한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모두 안후의 일이야. 지금의 난 너무 약하니까.
-그런 것 치고는 아까 너무 태연하던데?
-언제?
-그 몬스터가 달려들었을 때 말이야. 첫 공격으로 활도 거의 부서진 상태였잖아.
꽤 멋있었다. 달려드는 놈을 향해 꼿꼿이 서서 화살을 날리는 건...
-아아... 뭐 그건 훈련 덕분이지.
-훈련?
궁기의 반문에 제황은 그의 아버지와 했던 훈련을 기억에서 떠올렸다.
무련가에 전통으로 내려온다는 미친 수련법... 일명 '맞쏘기' 첫 기억은 정말 가물가물하다. 추정나이는 대략 7살 무렵... 그의 아버지는 장난감 활을 쥐어주고는 자신에게 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화살에 맞은 아버지가 아픈 기색도 없이 키득거리자 곧 신나게 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금씩 아버지와 마주선 거리가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그의 아버지도 활을 들었다.
물론 촉이 달린 화살은 아니었다. 부자상잔 일으킬 일 있는가. 촉을 둥근 천을 덧대어 처리한 화살이었는데 처음 아버지에게 들은 규칙은 간단했다. 쏘는 대상이 되면 어떻게든 상대를 맞출 것, 그리고 맞는 대상이 되었을 시는 절대 몸을 움츠리거나 눈을 감지 않을 것... 피하는 건 가능하다. 허락된 건 단 한 걸음...그렇게 시작된 놀이는 그의 나이 13살이 되자... 놀이가 아닌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와의 거리는 정확히 50미터, 사용하는 활은 파워를 줄인 것이었지만 맞으면 정말 몸서리쳐지도록 아팠다. 안에 보호대를 충분히 착용하고 하는 훈련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도 수십 대 맞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라면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활을 쏠 때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아버지의 눈은 아들이 아닌 온전히 사냥감을 바라보는 차가운 사냥꾼의 눈이었다.
'화살 하나라도 의미 없이 날리지 마라.'
'화살 하나에 목숨을 거는 거다.'
'사냥꾼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냥하는 사람이다. 사냥꾼의 마음을 길러라.
그리고 그 수련을 거치며 제황은 어지간한 것에는 놀라지 않는 강심장이 되었다.
"찾았다."
제황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컴파운드 보우를 집어들었다.
"망가졌네."
한쪽 도르레가 엉망으로 찌그러지고 와이어가 모두 풀려버렸다. 아가스테론이 화풀이 격으로 밟아버린 듯 보인다.
"그래도 챙겨야지."
가을산의 찬기운이 스며들어 마치 얼음덩어리를 만진 기분이었지만 제황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을 조심스럽게 점검한 후 무한고에 넣었다. 1차 목적은 달성... 비록 그 문신녀가 준 활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이건 부모님의 추억이 묻은 물건이다.
-그럼 좀 더 들어가 볼까?
-흐음...그래.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 제황은 궁기안에 나타나고 있는 노란색 실선을 따라 움직였다. 이것은 조금 전 헌터들이 잡은 아가스테론이라는 몬스터가 지나온 흔적이었다. 그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헌터들이랑 헤어졌던 것.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몬스터이니 분명 보금자리가 있을 테고 제황은 그곳을 찾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산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그렇게 선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문득 선의 방향이 이 땅으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리 높지 않은 바위로 된 가파른 절벽이 있었는데 무성한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함과 동시에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이곳... 기가 이상하다.
그녀의 말에 제황은 자리에 멈춰선 채 주위를 살폈다. 바닥으로 사라진 듯한 노란선이 사라진 곳에는 상당히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 주위에 잡목이 많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으면서도 다른 기운이 이 주변에 흐르는구나.
-음... 원인은 찾은 것 같네.
-그래?
제황은 구멍 안쪽을 슬쩍 쳐다봤다.
휘이이...
바람이 불어왔다. 뭔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그런 냄새를 품은 따스한 바람 말이다.
구멍은 교묘하게 꺾여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제황의 야간시로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각성하여 시력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단 한점의 빛이라도 없으면 안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너무 어둡군.
-폰...
-왜?
-줘봐.
-알겠다.
슈슉...
제황의 손에 광역폰이 들렸다. 간단한 터치가 끝나자 동굴 안이 대낮같이 밝아진다.
-오... 그런 오묘한 기능도 있었구나.
노인네처럼 좋아하는 궁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제황은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기어 들어갔다. 일단 바위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표면에 모래가 너무 많아 미끄럽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내려가던 제황은 얼마 되지 않아 깜짝 놀란 얼굴로 정면에 보이는 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물결치는 투명한 거울 같았다. 제황의 광역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반사되지 않는 괴기스러운 거울이다.
-이곳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구나. 이게 뭔지 아느냐?
-응.
궁기의 물음에 제황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아주 잘 안다.
이것의 공식 명칭은 일명 '웜홀'이다.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디멘션게이트와는 다르게 전혀 엉뚱한 곳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구멍... 몬스터로 인한 민간인 사고의 주범이 바로 이것이었다. 보통 이런 것이 생기면 안으로 침투한 헌터가 웜홀이 있는 곳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형식으로 막아버렸다. 정 안되면 이쪽 지구 쪽에서 구멍으로 특수콘크리트를 마구잡이로 쑤셔 넣거나 말이다.
제황은 천천히 손을 가져다댔다.
퐁...
마치 물에 손을 담그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손을 빼 이상유무를 확인한 제황은 손을 좀 더 깊숙이 넣어봤다. 이때만큼은 제황도 긴장에 호흡을 멈췄다. 잠시 후... 윔홀 저편으로 들어간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손을 뺀 제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뭘 그리 고민하느냐.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고민...
제황은 윔홀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하여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 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전혀 허무맹랑한 방법은 아니었다. 대충돌 초기에 각성한 디바우저들은 지금 그의 사정보다 나쁘면 나빴지 좋은 점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속에서 몬스터를 잡아 자신을 성장시켰다.
자신은? 그들보다 훨씬 조건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