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또다른가능성
삑삑삑...
"하나...둘... 읏차!"
작업용 파워슈트를 입은 네 명의 남자가 거대한 아가스테론의 사체가 담긴 바디백을 들어올렸다.
"뿔이 온전한 놈이니까 조심해서 옮겨! 그거 박살나면 너희 연봉에서 뺄 줄 알아!"
"예."
팀장의 호통에 대답한 지원팀원들이 조심조심 바디백을 들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지원팀장은 이마에 솟은 땀을 닦으며 스쿼드리더인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임정규님 고생하셨..."
말을 하던 지원팀장은 그의 갑옷에 가지런히 나 있는 큼직큼직한 이빨자국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 스쿼드의 리더인 임정규가 시간날 때면 자신의 갑옷을 광나게 닦으며 흐뭇해하던 걸 알고 있는 그였다. 그런 갑옷에 몬스터의 끈적한 타액이 덕지덕지 묻은 건 둘째 치고 큼지막한 이빨자국이 났으니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것이다.
"됐습니다. 팀 데리고 먼저 내려가세요."
손사래를 치는 임정규의 뒤로 머리를 박고 있는 스킨헤드를 슬쩍 쳐다본 그는 임정규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팀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스킨헤드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진한 한따까리를 끝낸 임정규는 바닥에 널부러진 스킨헤드에게서 시선을 땐 뒤 한쪽에서 문신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황에게 다가갔다.
"몬스터가 3티어급으로 넘어가면 레이드 한 번에 한 시간 이상 화살을 당겨야 하니까 파워슈트는 필수야. 이거야 뭐 한마리 잡을 예정이니 상관 없지만 진짜 레이드에 들어가면 많게는 3티어급 10마리도 잡으니까. 아무래도 당기는 힘의 절반을 파워슈트가 감당해 주고 레이드가 훨씬 수월하지. 그거 파운드가 250파운드지?“
”살짝 튜닝해서 300파운드요. 덕분에 이렇게 망가졌지만...“
브리핑하는 곳에서는 공기취급 하며 쳐다보지도 않았었지만 문신녀는 같을 활을 사용하는 이를 만나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 때문인지 제황에게 살갑게 굴었다.
”신세졌다.“
”아닙니다.“
임정규가 손을 내밀자 제황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제황이 임정규의 말을 어기고 몰래 따라오기는 했지만 그는 제황에게 정말 큰 신세를 진 격이었다. 제황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스쿼드에 사상자가 발생할 뻔 했으니까. 특히 그의 소속인 스타더스트 클랜은 국가 공인 클랜 이었다. 국가 공인 클랜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위가 아니었다.
독자적으로 디멘션게이트를 관리할 권한을 부여한 클랜 중 하나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클랜에서는 국가로부터 디멘션게이트를 관리할 권한을 얻는 대신 지금과 같은 국가에서 부여하는 임무에 투입할 인원을 지원한다.
디멘션게이트에 직접 출입하는 일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적기는 하지만 훨씬 안정적인 일이기에 클랜에서는 국가 임무에 투입되는 헌터를 따로 부서로 만들어 운영하는데 반대급부로 레이드 중 사상자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큰 책임추궁이 뒤따랐다.
”헌터였나?“
”아닙니다.“
제황의 대답에 그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제황이 잠시나마 아가스테론의 주의를 돌린 것은 평범한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의 의문점을 안다는 듯 제황이 덧붙여 입을 열었다.
”저는...“
제황의 말이 이어질수록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된 거군.“
”예.“
”하긴 각성시술 후 헌터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
”네. 각성자가 되긴 했지만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헌터시험은 잠시 접어둔 상태입니다.“
”흠... 지금 자네 실력이면 ...“
”부족하죠.“
제황이 단언하듯 말하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사자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타인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만족의 척도는 온연히 그 당사자의 것이니까.
"이거야 원 ... 이야기가 복잡해지는군.
임정규가 머리를 긁적인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은 무슨... 도움받은 입장에서 나서줘서 고맙지."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임정규를 바라보며 제황은 피식 웃었다.
제황은 머리를 쥐어짜 한 가지 거짓말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각성시술을 받았지만 헌터가 되기를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신원조회라던가 따로 조사를 한다면 제황이 과거에 각성재능5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헌터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모두 세계헌터사무국에서 주관했다.
세계헌터사무국
60년 전 발족하여 인류의 존망을 건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인류를 진두지휘하던 헌터들의 작은 모임에서 시작된 그것은 이제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대표단체였다.
과거 일부 국가에서는 각성자를 군 병력 화하여 강제적으로 통제하려 시도했었다. 몇몇 국가에서는 성공했지만 국가로부터 억압당했던 각성자들이 탈출하여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일으켰었다.
그 일로 수많은 헌터와 군이 투입되었고 그들은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진압과정에서 밝혀진 국가의 생체실험에 대한 증거가 나오면서 해당 국가는 당시 세계헌터사무국의 전신이었던 세계헌터협회의 무조건적 보이콧을 당했고 국가의 절반이 몬스터에게 짓밟힌 후에야 헌터들의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세계헌터사무국은 정식으로 헌터자격증을 취득한 이들에 대한 정보는 제한된 선에서 제공되기는 했지만 그 외의 정보는 철저한 보호를 했다. 이것은 아직 약한 유망주들을 불법적인 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고 지금도 가장 철저히 지켜지는 일이었다.
“곧 헌터시험을 보겠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그런가.”
제황의 대답에 임정규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성격으로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딱히 해줄만한 게 없다.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주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코가 석자이기에 그 선택지는 머릿속에서 열심히 지우고서 쥐어짜낸 게 헌터시험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제황은 합격할 자질이 보였고 합격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스타더스트 클랜에 추천을 해줄 생각이다.
갓 헌터딱지를 붙인 이들에게 ‘스타더스트 클랜’ 은 굴지의 대기업 입사나 마찬가지였다. 전통 있고 체계화된 시스템 속에 유망주들을 키워내기에 그들이 가진 바 모든 재능을 최대로 키울 수 있도록 컨설팅 해줌과 동시에 지원을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보답만을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제황은 충분한 자질이 있었다. 그것은 재능과는 또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자질과 재능을 혼동하는데 그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재능은 보지 못했으나 자질만큼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쳐 보였다. 자신과 만났을 때 저 거대한 몬스터를 상대로 호흡 한 번 흩트리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제황이 딱히 원하는 게 없어 보인다는 거다.
“이거야. 원 뭔가 보답을 하고 싶은데 해줄 게 없군. 돈 같은 것으로 입을 닦는 것도 좀 아니고...”
임정규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신녀가 먼저 자신의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서는 피처럼 붉은색의 커브스 보우를 꺼내 몇 번 시위를 당기더니 제황에게 내밀었다.
“나를 구하느라 활이 망가졌으니 하나 주는 게 공평하겠지.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거긴 하지만 내가 하급까지 쓰던 거야.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보다 훨씬 좋은 거니까 잘 써.”
“아...”
들이민 커브스보우를 엉겁결에 받아든 제황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것은 일단 사양하는 게 예의였지만 골수 활쟁이인 제황은 새로운 활을 준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덥썩 받아들어 버린 것이다.
[슈팅스타 시리즈-레드에디션 커브스보우]- 엑설런트 등급
최대사거리:2500미터
유효사거리:700미터
제질:미스릴 합금
특수능력
가속(C급)
예리함(B급)
“아...”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세이브를 통해 보이는 붉은커브스보우의 아이템창이 제황의 눈을 잡아 끌었다. 아버지가 사놓으신 저가 헌터용 커브스보우는 안타깝게도 일회용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적당한 활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이전의 활보다 한 단계 더 뛰어난 활을 공짜로 얻을 기회가 생겼으니 물욕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황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문신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임정규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문신녀가 자신 대신 물질적 보상을 해줬으니 선택의 폭이 꽤 넓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는 품에서 한 장의 금색 명함을 꺼내 제황에게 건냈다.
“가지고 있으면 쓸모가 많을 거다. 혹시 헌터시험에 합격한다면 꼭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제황은 명함을 한번 훑어본 뒤 고개를 꾸벅하고는 받아 챙겼다.
“리더 그런데 분배금도 줘야죠.”
그 때 쓰러져 있는 스킨헤드의 머리를 툭툭 차던 미남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말에 임정규의 얼굴이 살짝 꿈틀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레이드가 와해될 뻔하고 사고도 막았는데 당연히 권리가 있잖아요.”
그의 말에 문신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임정규를 바라봤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임정규가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럼 골치 아픈 게 많아진다. 클랜에 보고하는 건 둘째 치고 그 깐깐한 차원관리부에는 뭐라고 할래? 헌터 자격증도 없는 이가 도와줬으니 상금 찢겠다고 하면 대번에 클랜으로 확인전화만 수십 통 올걸. 숨기고 클랜 차원에서 준다고 해도 연말정산 때 다 나와.“
그 말과 함께 제황을 바라보자 제황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정규의 말을 들어보니 차라리 안 받고 만다. 물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돈이 지금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미남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꼭 그걸 절차 밟을 필요는 없잖아요. 누님 목숨도 구해주고 클랜 이름에 똥칠할 뻔 했는데... 그냥 제가 적당한 금액 사비로 줄게요. 그거 얼마나 한다고.."
임정규는 허허 웃으며 물러났다. 유부남인 그는 돈에 있어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가장이다.
"으음, 그런가...."
"제황씨라고 했죠. 계좌 불러줘요. 섭섭하지 않게 보내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미남에게 계좌를 불러준 제황이다.
”자...그럼 이제 내려가자. 저 병신 챙겨. 저 새끼 보고서는 무조건 불합격이다.“
임정규가 아직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스킨헤드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러자 문신녀와 미남이 스킨헤드의 두 손을 한쪽씩 붙잡은 채 질질 끌고 온다.
”저는 여기서 헤어지겠습니다. 집이 지척이네요.“
제황이 산 위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임정규는 얼굴에 조금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럼 다음에 꼭 보지.“
”예.“
”다음에 꼭 봐.“
문신녀도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인사를 했고 그렇게 제황의 헌터들과의 짧은 만남은 끝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