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7화 (17/301)

# 17

궁기는 쓸데가 참 많다.

-흠... 문제가 발생한 건가?

-그래. 배달이 되지 않으면 다 가져갈 수 없으니까.

제황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궁기가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와 협상을 하자.

-응?

궁기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갸웃 했다. 뜬금없이 협상하자는 궁기의 말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어 보인다.

-내가 이걸 모두 가져갈 수 있게 해줄 테니 내가 말하는 걸 사라.

-네가 원하는 거?

-그래.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 넌 물건을 손쉽게 가져가고 난 가지고 싶은 걸 갖는거다.

궁기의 말에 고민하던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가져갈 거지?

-잠시만 기다려.

궁기의 말대로 카트에 짐을 한가득 쌓은 채 기다리자 잠시 후 궁기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네 오른손바닥을 봐라.

그녀의 말에 제황은 무심결에 오른손바닥을 펼치다가 깜짝 놀란다.

-이게 뭐지?

손바닥 한가운데에 동그란 검은 점이 생겨 있었는데 단순한 점이 아닌 뭔가 깊고 깊은 구멍 같아 보였다. 마치 손바닥에 검은 구멍이 생긴 느낌이랄까?

-자... 이제 그 손으로 물건들을 만져봐.

그녀의 말에 제황은 카트 안에 물건들을 잡았다.

슈우욱

그러자 마치 제황이 잡은 물건들은 일그러지듯 하더니 그대로 손바닥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깜짝 놀라 손바닥을 들어 바라보니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설명해줘.

-작은 도술이다. 내가 한창 때 쓰던 [무한고]라는 도술인데 물건들을 보관하는데는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지. 소호씨의 자손이며... 지체 높은 반선의...

-아아... 알았어.

또다시 그 레파토리가 시작되려는 찰나 제황은 그 말을 잘랐다.

-이잇...넌 내게 조금의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 같지 않느냐.

-조금 덜 시끄러우면 고려해보지.

-쳇...

혀를 차는 궁기를 내버려두고 제황은 카트안의 물건들을 모두 손바닥 안으로 빨아들였다.

“어...어어...”

그리고 그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농협직원은 제황이 물건들을 손바닥 안으로 집어넣자 얼굴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허름한 옷을 입은 놈이 와서 피곤한 배달을 주문하기에 자기 마음대로 거절했는데 알고 보니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헌터였다.

대체 저런 신기한 이능을 가진 이가 왜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둘째 치고 대중에 알려진 헌터들은 자존심이 강해 무시당하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혹시 일부러...’

굳이 저런 방법이 있음에도 배달서비스를 물어본 것이라면 그 목적이 자신에게 그리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물론 민간인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서는 법으로 제재를 가하고는 있지만 세상사라는 게 꼭 법대로 흐르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 당장에 저 헌터가 자신을 두들겨 패도 그는 합의금 얼마 휙 던져 준 뒤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 합의금이라는 것도 헌터에게는 푼돈 일 테니 말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내일 아침 식사를 병원식으로 먹어야 할 수도 있었다.

웅성웅성

제황이 손안으로 물건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헌터를 직접 보지 못한 이들도 수두룩하다.

“소...손님 죄송합니다.”

“네?”

남자 직원은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로 땀이 송글송글 일어난다. 평소 그는 선임직원들에게 주의를 몇 번 들었었다. 그렇게 손님에게 함부로 대하다가 언젠가 큰 코 다친다고 말이다.

그리고 남자 직원은 그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이런 깡촌이 그런 일이 있겠냐고...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다. 그 때 그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리는 손길이 있었다.

팍!

“으악!”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님 죄송합니다. 확실한 재교육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선임 직원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런 말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마치 남자직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듯 보여 고참이 나선 것이다.

손님에게 실수를 저지른 초짜직원은 모르지만 그는 성질 더러운 헌터를 겪어본 적이 있었다. 마트에 온 헌터가 구매한 물건의 유통기한이 지난 것에 대해 항의했었는데 어떤 직원이 헌터라는 걸 알지 못하고 한 여직원이 불성실하게 응대했었다.

물론 잘못은 헌터 쪽이 컸다. 영수증을 확인하니 일주일 전에 사갔던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됬냐고? 직원의 응대에 화가난 헌터는 그 물건을 직원에게 모두 먹여 버렸다.

그 헌터가 보는 앞에서 전부... 참고로 그 직원이 당시 먹었던 건 2.5리터짜리의 상한 우유 3통이었다.

“뭐... 괜찮아요.”

딱히 그를 어찌할 생각이 없는 제황은 손사래를 치자 그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성격 나쁜 이는 아닌 듯 싶다.

“그런데 물건을 좀 더 사야겠네요.”

“네네?”

제황의 말에 당황한 그를 두고 제황은 다시 과자 코너로 들어갔다.

-이게 뭐지?

-초코과자

-전병 같은 것인가... 이건?

-사탕

-당과 같은 것이냐? 그럼 이건?

-초콜렛

-음...생소하지만 뭔가 맛있어 보인다. 챙겨라.

그녀의 말에 제황은 말없이 그것들을 카트에 담았다.

-저거..저거.. 저것도...

제황이 식품코너를 걷기 시작하자 궁기가 원하는 물건 앞을 지나칠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제황은 그것을 군소리 없이 카트에 담는다.

-저것도 신기하군. 저것도 담아라.

-저건 먹는 게 아냐.

-아...그런가. 그런데 뭘 저렇게 맛있는 그림을 그려놨지.

과일향 방향제 세트에 대해 투덜거리던 궁기는 베이커리 앞에서 그 충동구매의 절정을 보여줬다.

-저...큰 거! 저... 빨간 거! 그리고 저기 있는 것도... 좋구나. 좋아. 맛있어 보이는 이국의 음식이로다.

웬일로 궁기가 마지막에 지목한 커다란 생크림 케잌까지 군소리 없이 카트 안에 넣는 제황이다.

-52만 9천원입니다.

캐셔의 말에 제황의 지갑을 꺼내던 제황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는 자신이 산 것들을 한 번 쭉 둘러봤다. 죄다 먹는 거다. 특히나 전부 과자나 초콜릿,사탕, 케익 들... 제황은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몸에 좋지 않기에 그의 부모님은 원채 이런 것을 먹이지 않았고 덕분에 제황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문득 부모님의 생각이 나서 잠시 멈칫하는 제황...

그러나 제황의 이런 모습이 제황을 훔쳐보고 있던 선임에게는 그것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는 황급히 다가와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미선씨 이 카드로 해줘요.”

“예? 주임님. 이걸 왜...”

“그냥 해줘요.”

“네네...”

선임의 말에 얼결에 그의 카드로 계산을 마친 캐셔다.

“왜 대신 계산을...”

“저희 직원 실수에 대한 작은 서비스입니다.”

그의 말에 제황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실수에 대한 마트의 사과 차원의 서비스라는데 굳이 그걸 거부할 생각은 없다. 계산을 마친 제황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손에 물건을 전부 빨아들이고는 빈손으로 터덜터덜 나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선임직원은 문제를 일으킨 남자직원을 도끼눈을 뜬 채 쳐다봤다.

“정창음...”

“네...네. 형”

퍼억...

선임직원의 매운 손바닥이 남자직원의 뺨에 작렬했다.

“물건 값은 네 월급에서 깐다. 불만 있어?”

“아...아뇨.”

재수 없었으면 반병신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을 구해줬는데 군말이 나올 턱이 없다.

"혹시 다음에 저 헌터 다시 오면 알아서 도망쳐라."

"예. 고마워요. 형"

***

“제황아!”

마을에 도착해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제황은 뒤를 돌아봤다. 궁기리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김씨노인이 제황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셨어요.”

“아... 그래. 올라가는 길이니?”

“예.”

김씨는 궁기리 노인들 중 나름 가장 나이가 적다는 죄 하나로 15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노인이었다. 몇몇 젊은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원채 이 근방 이장들이 다 나이가 많은 관계로 너무 나이가 어리면 오히려 이장을 하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그가 15년째 맡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산생활은 할만하고?”

"예."

제황과 간단한 안부인사를 나눈 그가 용건을 꺼냈다.

“모레요?”

“그래. 모레. 몬스터를 잡으러 헌터들이 오는데  네가 목격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뭐냐. 네가 산 주인이니 얼굴 한 번은 또 봐야지.”

김씨노인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궁기산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그 몬스터로 인해 죽을 뻔 했으니 꽤 관심이 갔다.

“예. 알겠어요. 그럼 모레 아침에 올게요.”

“그래. 아... 그리고...”

말을 하던 김씨노인이 뭔가 생각났는지 제황을 기다리라 하고는 마을회관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검은 박스 하나를 거져와 제황에게 건냈다.

“이게 뭐에요?”

박스를 받아든 제황은 김씨노인에게 물었다.

“산에 핸드폰 터지게 하려고 했는데 워낙 외져서 중계기 설치가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서 마을회비 빼서 광역폰 하나 샀다.”

광역폰이라는 건 산이나 오지 같은 곳에서도 터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최신형 스마트폰이었다. 주 이용 고객은 헌터들이었는데 직업의 특성상 오지에 자주 가는 헌터들에게는 필수품 같은 것이다. 물론 그만큼 폰 가격이나 통신비가 곱절로 비싸다.

“이걸 왜 제게...”

“거참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지.”

“아뇨. 괜찮아요. 저도 돈 있어요.”

김씨의 말에 제황은 검은 상자를 돌려줬다. 이유 없는 호의는 받지 않는다. 무조건 적인 호의는 가족 관계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황은 상대가 원하거나 바라는 게 있을 때 호의를 베푼다는 걸 2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아...거참... 네가 궁기산 멧돼지들을 잡아 준 것도 있고... 거 뭐냐. 솔직히 요 근례 궁기산이 많이 위험해져서... 거 뭐냐... 이 산에서 가장 도움 되는 게 너잖냐. 응? 부탁 좀 하자.”

거 뭐냐를 남발하는 김씨노인의 말에 제황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이런 고가의 폰을 건내는 지 이해가 갔다. 궁기리에는 궁기산에서 약초를 캐서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산 주인이 무련가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불법이기는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것을 용인했다.

산에서 약초 캐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이 산이 뭐 특별해서 산삼 같은 게 나오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 크게 마을 사람들에게만 허락한 것, 그런데 최근 무련가에 큰 일이 있고 산을 타다가 다치는 이들이 생기니 제황과 같이 산에 익숙한 이가 아쉬운 것이다.

“예. 알겠어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궁기리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일 있으면 연락하고 싶어 한다는데 그걸 매몰차게 거절할 제황이 아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래. 고맙다. 정 급한 일 아니면 연락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예.”

광역폰을 받아든 제황은 그걸 손에 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모레 뵐게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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