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6화 (16/301)

# 16

궁기는 쓸데가 참 많다.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창에 있던 유니크스킬 궁기안 이라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궁기가 깃들어 있음에 그 눈에 신기가 생겨 세이브는 그것을 스킬화 시킨 것이다.

제황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튼 채 용혈기를 일으켰다. 다른 스킬들은 둘째 치고 용혈기는 그가 어릴 때부터 수련했던 것이다. 그게 어떻게 변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용혈기]

츠아아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 느껴졌다. 전신을 흐르는 도도한 기운... 단순한 호심법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이 그 허물을 벗고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해 있었다. 제황은 그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웅혼한 에너지가 사지백해로 휘돌다가 다시금 단전으로 돌아갔다.

‘이게 마나엔진이구나.’

마나엔진은 헌터의 성장 기준을 나누는 척도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스킬이었다. 마나엔진을 가진 헌터는 B급 이후의 경지를 넘볼 수 있지만 이게 없는 이는 만년 C급이다.

마나엔진을 보유한 이는 성장하면 성장할 수록 마나량의 보정치가 마나엔진이 없는 이보다 비약적으로 높다.

"가문의 호흡법이 마나엔진을 만들 단초가 될 줄이야."

사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무척 미웠던 적이 있었다.

가문의 고루한 전통과 가전무예를 이어간다며 자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 산장에 더 오래 계셨으니까.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후계자라며 자신에게 그것들을 주입시킬 때도 너무나 미웠다. 그로 인해 자신은 변변찮은 친구도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자신은 수백 년의 걸친 선조들의 희생을 통해 새 삶을 얻은 것이다.

제황의 마음속에 결의가 차올랐다. 이런 씻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푼 선조들의 마음을 돌이켜 헤아려본다.

꿈속 그들의 이야기를 반추하며 떠올린 선조들의 마음은 단지 그들의 후손이 자유롭기를 바란 것이었다. 자신들의 업에서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란 것 ... 그것 단 하나...

'자유...'

제황은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강함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후손이 자유롭기를 바랐던 선조들에 대한 제황 나름의 보답이었다. 강해짐으로써 자유로워질 것이다.

'강한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제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뭔가 달라졌군.

궁기는 제황의 내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느꼈다.

-아니... 난 그대로야.

-네게서 큰 결의가 느껴진다.

‘그래. 내가 그것으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한 혐오 따위에 빠지는 건 조상님들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

타탁...탁...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궁기산을 나는 듯 달려 내려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 움직일 때마다 궁기산의 온갖 야생동물들은 자신들의 곁을 스치는 알 수 없는 바람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아...’

제황은 자리에 멈춰 섰다.

최대한 스킬유지에 신경 쓰며 달렸건만 [호랑이사냥]이라는 스킬의 유지시간은 30초가 한계였다.

‘소모된 마나는 10...’

소모마나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단순계산으로 50마나를 전부 소모했을 경우 유지시간은 150초였다. 도주 시에는 유용하겠지만 그 후로는 마나가 없다.

호랑의 사냥의 활성화 시간이 짧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는 그의 레벨이 낮다는 것이다. 레벨업 시마다 마나량은 증가한다. 또한 받는 포인트로 마나가 관련된 정신력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제황은 F급 1레벨일 뿐이다. 차차 나아 질 테니 조바심이라 말할 수 있지만 생명의 위기라는 건 초짜라고 봐주지 않는다. 이전 3티어 몬스터에게 죽을 뻔한 바보짓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두 번째 이유는 [호랑이사냥] 이라는 스킬이 유니크스킬이라는데 있었다. 유니크스킬이 뭘까. 간단히 말하면 강한 스킬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강한 스킬인 만큼 반대급부로 소모하는 마나량이 컸다. 한마디로 좋은 스킬 가졌다고 마냥 좋아할 건 아니라는 사실... 전투라는 게 단기전만 있는 게 아닌 이상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무련궁술 또한 사정은 비슷했다.

제황은  활통에서 활을 꺼내 손에 들었다.

시위에 화살을 끼고 무련궁술에 대해 떠올리는 순간 네 가지의 선택창이 나타난다.

[비상하는 화살][폭발하는 화살][춤추는 화살][힘의 화살]

무련궁술은 총 네 가지의 속성을 화살에 담을 수 있게 만드는 스킬이었다.

이 스킬들도 [호랑이사냥]과 같이 마나소모가 무시무시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덕분에 그나마 건드릴 수 있는 건 비상하는 화살 하나 뿐...

물론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소모 마나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일단 지금은 수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은 스킬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가장 첫 스킬인 비상하는 화살만 간신히 수련하는 중이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몸을 숙인다. 호흡을 가다듬고 머릿속으로 스킬의 이름을 말했다.

'비상하는...화살'

두두두둑...

화살 하나를 시위에 매겨 조준하며 [비상하는 화살]의 속성을 화살에 담는 순간 눈앞에 붉은 실선이 생겨났다. 붉은 실선은 대략 400미터 가량의 길이였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좌우로 흔들린다. 신기한 것은 화살을 쏘면 그 때부터 화살은 붉은 실선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이게 뭐 대단하냐고? 주위에 활 쏘는 사람이 있다면 물어보라. 사거리가 200미터 이상 되면 핀포인트의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아니 조준해서 날리는 것 자체가 힘들다. 삼국지 따위를 보면 200미터 이상의 화살을 날려 눈을 맞추느니 손을 맞추느니 하는데 그거 다 거품이다.

게다가 화살이라는 물건은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날아가는 도중에도 강한 바람에 휩쓸려 전혀 엉뚱한 곳에 맞을 수도 있는데 이 [비상하는 화살]은 마치 화살에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정해진 곳으로 날아간다.

피시식...

그러나 아주 잠시 딴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스킬이 취소되어 버렸다. 소모된 마나량도 상당하다. 허탈한 마음에 제황은 다시금 활과 화살을 갈무리 한 채 생각에 잠겼다.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야.’

쏘는 방법도 알고 스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만 뭔가 새로운 스킬을 배운다는 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알고 있고 쓸 줄 안다는 건 기껏해야 초보자일 뿐이다. 숙련자라는 말과 전문가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세이브도 숙련도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가진다고 만능이 아니다. 그만큼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런데 스킬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마나를 소모하게 되고 마나는 한정적이다. 우습게도 지금 그에게 가장 가성비가 좋은 유니크 스킬은 다름 아닌 [궁기안] 이었다. 일단 마나소모가 없다. 특수능력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꿰뚫어보게 만들어준다. 어둠이나 안개 따위는 물론 궁기의 말로는 환상이나 마나를 이용해 감추어진 것의 진실 또한 볼 수 있다고 한다.

-갈길이 머네. 답은 훈련뿐인가.

-좋은 자세다. 무련가의 애송이...쿡쿡

***

수련을 마친 제황은 아침식사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배낭을 등에 졌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파악한 궁기의 성격은 대략 이것이었다. 자신이 흥미있는 게 아니면 말도 걸지 않는다.

-오...드디어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는 건가?

-그래. 식료품이 떨어져 가니까. 할아버지가 주신 돈도 은행에 넣어놔야 하고...

도시에 살 때는 지천에 깔린 게 마트이니 그런 걱정이 없지만 산에 살게 되면 식료품의 잔고 같은 것의 계산은 아주 중요했다. 꼼꼼하게 파악해서 구매하지 않으면 매우 피곤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고기라던가 부식의 경우는 그냥 참고 먹을 수 있지만  샴푸라던가 다 떨어진 칫솔이나 치약 같은 것들은 없으면 매우 힘들다.

사람들이 툭하면 산에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산중생활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편의시설에 둘러싸여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마치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궁기리로 내려온 제황은 송씨할아버지 집에 들렀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본 후  산에서 캐온 약초 등을 내려놓은 뒤 마을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읍으로 향했다.

-철로 된 상자가 빠르기도 하구나.

-음... 악사가 없는데 음악이 들리는구나. 신기한 음악이로다.

궁기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좀 닥쳐.

-뭣이!

듣다 못한 제황이 한소리 하자 곧장 발끈한다. 속으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말이 사라진다.

‘피곤하군.’

머릿속에 전혀 다른 인격체가 함께 산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다. 특히나 제황은 조용한 걸 좋아하는 타입, 게다가 거의 2년간 안 좋은 시간을 보내 말이 더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타인과 대화를 하는데 익숙하지가 않은데 궁기는 신기한 게 나오면 끊임 없이 주절거렸다.

위이잉

버스에서 내린 제황은 곧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농협마트로 향했다. 작은 읍이기에 큰 마트는 이곳밖에 없다. 마트에서 쌀이며 고기며 이것저것 사니 거의 30만원가량이 나왔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기에 끝도 없이 주절거릴만 하건만 한소리 들어서인지 의외로 궁기는 조용했다. 쇼핑을 마친 제황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궁기리까지의 배달을 신청했다.

일정 금액 이상이 되면 원하는 곳까지 배달을 해주는데 이게 없으면 제황으로서는 이걸 모두 들고 버스에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배달서비스를 신청하는 제황의 말에 돌아온 농협직원의 쌀쌀맞은 답변은 제황을 처음으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궁기리가 얼마나 외진 곳인데 거기까지 배달이야. 못가.”

덩치 큰 남자직원은 제황의 말에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골마트이기도 하고 제황이 어리기에 반말은 참고 들어줄 수 있지만 그다지 심성이 좋아 보이지 않는 직원이었다.

“예전에는 배달해 줬는데요?”

그러자 그 남자직원은 귀찮다는 듯 고성을 질렀다.

“아! 자꾸 귀찮게 하네! 그럼 그 때 직원 찾아서 배달해 달라고 해. 지금은 거기까지 안가.”

틱틱 내뱉으며 제 할 일을 하는 직원을 바라보며 제황은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 있던 배달직원은 늦기는 했어도 궁기리까지 배달을 해줬었다. 물론 그 때는 그 직원이 궁기리 근처의 마을에 살았기에 배달이 가능했던 거였지만 당시의 제황은 그런 것을 몰랐다.

“큰일이네.”

배달이 되지 않으면 직접 들고 버스를 타야 하는데 부피가 만만치 않다. 아무리 힘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들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다. 생각지 못했던 문제에 제황이 고민하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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