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마냥행복하지는않다.
제황은 그가 본 것에 대해 송노인에게 소상히 이야기 해 주었다. 몬스터와 만나 죽을 뻔한 건 이야기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 받기는 싫기 때문... 제황의 이야기를 다 들은 송노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출소에 신고 해야 겠구나."
"예. 본래 제가 해야 하는 거지만 산에서는 좀 힘들어서요."
제황의 사정을 아는 송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끙... 이참에 이곳도 전화가 터지게 만들어야 겠구나. 이전에는 산대장이 싫어해서 일부러 피했지만..."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그래. 그건 그렇고... 괜찮겠니? 혼자서..."
제황이 걱정된 송노인이 물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저는 무련가의 마지막 자손입니다. 제가 이곳을 지키는 게 당연해요."
제황의 말에 송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 식어버린 숭늉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후 송노인과 두 소녀를 배웅한 제황은 대문을 꼭꼭 틀어막은 뒤 사당으로 들어갔다.
조상님들께 꾸벅 인사를 드린 제황은 시야 한쪽에 있는 녹색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분명 그거야."
마음에 짚히는 바가 있었다. 정규교육과정 중에 각성자와 관련해서 배운 영상 중 상태창과 관련된 내용이 떠오른 것이다. 각성 재능이 최하인 5급인건 둘째 치고 체육특기생인 관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당시 배운 기억을 더듬어 녹색점을 향해 열리라는 의념을 전하자 잠시 후 눈앞으로 녹색의 창이 나타났다.
이름:천제황 – F급 10/1레벨 0/10000exp
근력:2
민첩력:3
체력:2
감각:5
정신:2
마나:43/50
마나회복율:4
진명
-마궁의 저격수(레어)
효과
민첩력:0.5
감각:1
???
-무음의 추적자(레어)
효과
체력:1
마나회복율:0.5
???
보유스킬
유니크스킬
호랑이사냥 -1랭크 0.2프로
궁기안-1랭크 0프로
무련궁술-1랭크 0프로
레어스킬
용혈기-1랭크 1.43프로
용혈무-1랭크 0.98프로
스페셜스킬
-
커먼스킬
요리-1랭크 0.21프로
빠른 재생-1랭크 0프로
"나... 각성했구나."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자신의 상태창을 본 제황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봤다. 세이브에 접속되어 각성을 완료하면 지금과 같은 상태창을 열 수 있게 된다고 알고 있었다.
-음... 신기하구나. 고작 500년이 지났을 뿐이거늘 이렇게 많은 새로운 술법이 나타나다니...
궁기 또한 제황의 상태창이 보이는지 이채롭다는 듯 말했다.
-요괴인 너도 모르는 건가?
뭔가 이 일에 대해 모두 알거라 생각했던 궁기가 상태창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이기에 제황이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북풍이 몰아치듯 차가운 답변이다.
-경고하는데 나를 요괴라 부르지 마라. 내 비록 살겁의 업을 지니기는 했으나 소호씨의 자손이며 서쪽을...
요괴라는 말이 듣기 싫은지 궁기가 경고했다. 그러나 제황은 그 경고를 들어줄 생각이 조금 도 없다.
-듣기 싫으면 꺼져.
-음?
화를 내려던 궁기는 갑자기 제황이 딱 잘라 이야기하자 말을 멈췄다.
-나도 내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영 거슬린다. 듣기 싫으면 나가라고...
-너... 이이익... 감히...
단단히 화가 난 느낌... 그러나 제황은 단호했다.
-나가기 곤란하면 닥쳐던가.
-흥!
세게 콧방귀 뀌는 소리를 낸 궁기는 이후로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제황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으로 상태창에 주목했다.
하루 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평생 머릿속에 타인의 목소리를 가지고 살아본 경험이 없는 탓에 궁기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여러모로 불편했다.
생각해보라 속으로 하는 생각까지 의식적으로 조절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물론 모든 말이 궁기에게 들리는 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궁기에게 말을 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들리는 것, 잘 조절하면 혼자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게 쉬운 일만은 아니기에 제황은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만약 궁기가 지금처럼 계속 자신의 머릿속에 있게 된다면 최소한 기선을 잡아놔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궁기와 자신의 생각이 틀려 머릿속에서 혼선을 일으키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모든 행동의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 했다.
"조용하네. 뭐 상관없지.“
궁기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 일단 100킬로그램 가량의 역기를 들어본 제황은 확실히 힘이 증가했다는 걸 깨달았다.
근력이 2라는 건 본디 그가 지닌 신체의 근력이 80킬로그램의 물건을 들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같은 힘으로 160킬로그램을 들 수 있도록 몸이 변화했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순수 근력을 보조해 주는 것, 그래서 각성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단련한다.
레벨을 올려 보너스로 붙는 보정수치도 중요하지만 근본이 강해지면 시너지가 더 크기 때문...
물론 저 수치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메커니즘을 가진 건 아니다. 물건을 들 때 단순히 근력만 사용하는가? 아니다. 물건을 좀 더 빨리 들 수도 있는 거고 물건을 좀 더 오래 들 수도 있는 거고 물건을 든 채 좀 더 빨리 걸을 수도 있는거다. 그렇기에 한가지 능력치가 너무 높은 사람은 오히려 여러가지 능력치가 고루 발달한 이를 이기기 힘들다.
물론 그 차이가 너무 심하면 그 또한 무시되지만...
"스킬이 문제구나."
어릴 때 잠시 해본 모바일게임에서처럼 스킬에 대해 세세하게 나와 있으면 좋겠지만 교육받은 바대로 세이브는 스킬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건 제황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각성자들이 보유한 스킬들이 다 그렇다.
물론 커먼스킬과 스페셜스킬들은 그것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비욘더들이 있어 대중에 꽤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만 레어스킬만 되도 밝혀진 건 몇 십 개 되지 않았다.
거기에 스킬들이 이름이 같다고 모두 효과가 같은 것도 아니었다. 이름만 같고 효과는 전혀 틀린 것도 있고 이름은 틀린데 그 효과는 비슷한 것도 수십 개다.
게다가 레어 스킬이 강제각성자인 비욘더들 중에 나타나는 건 아주 드문 경우이기도 했고 레어스킬을 지닌 이들은 그 스킬이 전혀 무쓸모한 것이 아님에야 거의 고위헌터가 된다.
하물며 유니크스킬은 정말 알려진 게 몇 개 되지 않는다. 그건 과거 생존의 시대 영웅들인 디바우저들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이들의 스킬 몇몇만이 세간에 알려졌을 뿐이다.
제황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그 전과 달라진 것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힘 스피드 감각, 순발력 모두 이전과 비교할 수 없다.
가장 처음인 F급1레벨이기는 하지만 각성자로서의 출발점에 섰다. 그리고 10레벨을 채우면 E급으로 올라가는 세이브의 고루하고도 정직한 시스템의 출발점의 선 자신을 생각하니 비로소 진정한 각성자가 되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
"난... 디바우저구나.“
진짜 각성자, 전 세계 몇 만밖에 되지 않는 각성자라는 대명사의 진정한 주인, 헌터계의 귀족... 수십 개의 수식어로도 부족한 그것이 바로 자신이 되었다.
일단은 기뻤다.
더 이상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강해졌다. 강하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니까.
기쁨에 두 주먹을 불끈 쥘 때 그의 머릿속으로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흐흥, 수백 년에 걸친 선조들의 희생 위에 서서 기뻐하는 꼴이라니...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인 그 말에 제황은 등에 찬물을 쫙 끼얹는 기분이 엄습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보아하니 강해진 것 때문에 기쁜 것 같은데 네 강함의 이유가 네 선조들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라는 거다.
궁기의 냉정한 말에 제황은 사당을 둘러봤다. 제단 위에 올려진 조상들의 위패가 유난히 그림자가 짙다.
-우리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 말해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황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궁기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술법 중간에 깨어났기 때문에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또한 그 교활한 충요와 맹약을 맺었기 때문에 네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지.
-아는 데로만 말해줘.
-좋다. 옛날 난 누군가에게 속아 조선 땅에서 살겁의 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네 선조들은 이 산에서 포박주술을 펼치고 나를 제압했지. 그러나 난 반신과 마찬가지기에 내가 원하기 전에는 소멸시킬 수 없다. 아마 나를 봉인하기 위해 너희 무련가는 이곳에 무련가를 세웠을 것이다. 지금 네가 서있는 곳이 그 옛날 너희 선조들과 내가 싸웠던 곳이지.
-누군가라는 건 뭐지?
-그건 네 조상과의 맹약에 어긋나 밝힐 수 없다.
-후... 그래...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때 네 선조들의 염이 담긴 저것들이 나를 잡아두려 했지. 고작 염이 담긴 것들로 나를 잡아둘 수 있을 턱이 있나. 그렇지만 난 그보다 더 거대한 힘을 느꼈다. 그건 바로 수백 년에 걸쳐 모인 너희 무련가의 정기가 모두 모여 나를 구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충요는 그 모든 정기와 남아있는 내 원정을 이용해 망가진 네 몸을 뜯어 고쳤다.
500년 동안 수십 명의 네 선조들이 살고 죽으며 모아온 모든 것을... 네 선조들이 대대로 지켜오던 그것을...
-그만...
제황은 할 수 있다면 궁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모조리 깨버리고 너 하나를 위해 쏟아 부었다는 말이다!
궁기는 잔인했다.
쾅!
”...“
궁기의 말이 끝나자 제황은 사당의 마루를 두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를 악물었다.
말을 잇던 궁기는 고개 숙인 제황의 가슴속에 느껴지는 슬픔에 말을 멈췄다.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제황의 속을 좀 뒤집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보니 자신이 과한 짓을 벌였다.
그것은 신수로써 살겁의 업을 쌓아 오랜 시간 변질되어 잔인하게 변한 그녀의 성질이 반영된 것이었지만 제황의 기분을 알게 되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사실 그녀와 제황은 이미 영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제황의 슬픔이 곧 그녀의 슬픔이 되었다는 것...
슈우우...
제황의 오른쪽 눈에서부터 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앞에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람으로 변했는데 잠시 후 나타난 것은 제황과 비슷한 키를 지닌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하얀 머리카락에 창백한 피부를 지닌 그녀는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길고 넓은 소매가 달린 궁장을 입고 있었는데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또 마냥 연약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잘 단련된 무사의 느낌이랄까?
엎드려 있던 제황은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대략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 없다 단언할 수 없는 청초한 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갑작스레 나타난 미녀에 놀란 제황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여자에 무덤덤했던 제황도 놀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다. 과거 사귀었던 한수지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었는데 냉정히 말해서 한수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미녀였다.
그녀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다 생각한 제황은 그녀에게 말했다.
”궁기?“
”그래.“
”그 모습은...?“
”본신이다.“
궁기의 말에 제황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궁기는 호랑이가 아닌가?“
제황의 말에 궁기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황의 말에 대꾸했다.
”그건 내가 가진 권능의 본질을 형상화한 것일 뿐이지 내 본신이 아니다. 내 말은 헛으로 알아들었는가? 난 제왕 소호씨의 자식이며...“
”아아...“
이해한 제황은 슬쩍 그녀를 바라본 후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마성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그녀가 너무 편안하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그녀와 그가 영성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마음 뒤로 따라온 것은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다시 들어가 주겠어?“
제황이 말했다. 그녀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바른 생각을 이어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음... 뭐 원한다면... 쳇...“
혀를 찬 그녀는 잠시 후 다시 하얀 연기로 변해 제황의 눈으로 스며들었다.
”으음...“
순식간에 연기로 변한 그녀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자 잠시 놀란 제황은 궁기에게 물었다.
-넌 내 안에 있는 건가?
-그래. 정확히 말하면 네 왼쪽 눈에 깃들어 있지.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