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4화 (14/301)

# 14

마냥행복하지는않다.

제황은 옷걸이에 걸어놓은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왜 가리지?

-내가 좋다고 다른 사람도 마냥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짧게 대답한 제황은 들뜨던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황은 2년 동안 겪어온 것들을 반추했다. 이전에 자신의 외모가 뛰어난 것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특히 팬들이 자신의 외모 때문에 좋아한다는 것에 어느정도 우쭐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외모가 망가진 2년간 그가 느낀 외모의 혐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그렇게 죽자살자 쫓아다니던 여자들도 그의 달라진 외모에 징그러운 벌레마냥 피하기 바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제황은 아무리 예쁜 여자를 보더라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뎌진 상태...

준수해진 자신의 모습에 기쁜 것 보다는 이제 그런 눈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더 기뻤다. 제황은 일단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알아낸 뒤 타인에게 자신의 변화를 알릴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제황은 본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마당을 서성이던 송노인이  제황을 보고 반기며 다가왔다.

"할아버지 오셨어요."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송노인이 말했다.

"그래. 집에 있었구나. 몸은 좀 괜찮고?"

"예. 괜찮아요."

"거 마을에도 좀 내려오고 하지."

"수련이 바빠서요."

"그래. 산대장도 그러더니 너도 수련을 하는구나."

그 말을 하는 송노인은 제황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자와 머리카락으로 아예 가려버려 얼굴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 제황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짐작되자 마음이 쓰렸다.

"안녕하세요."

두 소녀가 송노인의 옆으로 다가와 제황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제황이 마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물론 모자와 머리카락으로 상대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송노인의 집에서 제황의 얼굴을 보고 징그럽다 말했던 소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손녀와 그녀의 친구를 혼낸 송노인은 제황의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에 대해 둘에게 이야기했고 본디 심성이 그리 나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깊히 탄식했다.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얼굴의 반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위험한 밤사냥을 나가 멧돼지를 잡아올 정도로 착한 사람에게 상처를 줘버린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녀의 사과에 제황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시에 상처가 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얼굴의 장애가 사라지자 쿨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근원이 사라졌으니 하등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제황의 담담한 대답을 듣는 셋은 오히려 그 대답이 가시방석과 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울분에 차 있다면 그걸 풀어주려 노력하겠건만 제황은 너무나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마치 긁어놓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려 왔는데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은 채 아물어 버린 것을 본 느낌이랄까?

"제...제황아. 이거 받거라."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송노인은 품에서 손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두툼한 종이봉투를 꺼내들었다.

"이게 뭐에요?"

"음... 네가 전에 잡아왔던 멧돼지가 하도 많아서 읍내에 좀 팔았단다. 그날 네게 전해주려 했는데 그리 올라가 버려서 이렇게 가지고 왔지."

"아...예."

이걸 전해주기 위해 이 험하디 험한 궁기산을 올라왔다는 송노인의 말에 제황은 편치 않은 심정으로 송노인을 바라봤다. 사실 제황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동안 궁기리에 내려가지 않으려 했었다. 다시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서 오는 거부감이었지만 그로 인해 송노인이 불편한 몸으로 산을 오르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잘 쓰겠습니다."

"오냐. 허허허..."

제황이 받아든 봉투를 품에 넣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송노인은 그제야 한결 마음이 편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점심은 먹었니?"

"아...점심이요."

산중에 살면 그다시 시계를 볼 일이 없다. 송노인의 말에 지금 시간이 정오 정도라고 짐작한 제황은 송노인에게 말했다.

"아직 준비한게 없지만 조금 기다리셨다가 함께 드시겠어요?"

"오...그래. 그럼 고맙지."

정오 정도에 산장에 도착했다면 아침 일찍 마을에서 출발해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아침을 먹었다 쳐도 지금껏 아무것도 못먹었을 것이다.

"예. 그럼 앞별채에 계시면 제가 차려서 갈게요."

"그래. 고맙구나."

제황이 부엌으로 향하자 두 소녀가 제황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온다.

-요즘 인간 아해들은 옷을 저리 헐벗게 입는군.

궁기의 말에 제황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송노인의 손녀는 가을햇살의 무서움을 아는지 등산바지와 긴팔로 몸을 가렸지만 외지에서 온 듯한 소녀는 가슴이 좀 파인 티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더운지 위에 걸치고 있던 난방도 벗어놔서 뽀얀 앙가슴이 보일듯 말듯 하다.

-요즘 인간 수컷들은 저런 걸 좋아하나?

-시끄러.

자꾸 머릿속에 잡음이 들자 조용히 주의를 준 제황은 뒤따라오는 둘을 향해 말했다.

"혼자 준비해도 괜찮아요. 가서 쉬세요."

"아뇨. 저희도 도울게요."

"괜찮아요. 어차피 산중이라 차릴 것도 얼마 없어요."

제황의 말 그대로 차릴 건 밥과 나물 몇 가지 밖에 없다.

어차피 요리에 재능 같은 건 일푼도 되지 않았고 나물이라고 해봐야 말린 산나물에 마늘과 간장 소금으로 대충 만들어 먹는다.

"그럼 구경만이라도..."

그 말과 함께 송노인의 손녀가 할아버지가 계신 쪽을 곁눈질하자 제황은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부엌에 들어선 제황은 쌀독을 열었다.

"얼마 없네."

혼자 먹자면 일주일가량은 먹을 양이 있었지만 셋을 대접하게 되면 곧바로 식료품을 사러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혀를 찬 제황은 쌀독에서 쌀을 퍼서 물로 씻고 밥물을 대충 맞춰 전기밥솥에 넣었다.

[제황식-요리]

그런데 시야 오른쪽 위에 작은 글씨가 새겨지더니 이내 대충 맞춘 밥물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사당에서 '호랑이사냥' 이라는 걸 살짝 체험해 보기는 했지만 '요리' 라는 단어가 떠오름과 동시에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을 밥물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딱 짚을 수는 없지만 뭔가 거북하다.  이들을 빨리 보내고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 겠다고 마음먹은 제황은 다시금 밥물을 맞춘 다음 전기밥솥의 스위치를 넣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반찬을 만들 차례...

"와아..."

부엌 문어귀에서 제황이 요리하는 것을 훔쳐보던 두 소녀는 제황의 손놀림에 감탄을 내뱉었다. 뭔가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재료라고 할만한 건 기본채소와 나물 그리고 계란 같은 것 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요리를 하는 제황의 손놀림은 간결하면서도 무척이나 빨랐다. 나물을 가볍게 씻어낸 뒤 물에 불리는 것과 동시에 계란을 깨서 뚝배기에 담고 갖가지 채소를 리드미컬하게 손질한다. 채소를 자르는 것도 어찌나 깔끔한지 전문요리사 뺨치는 수준이다.

게다가 머릿속에는 무슨 초시계가 돌아가는지 다른 반찬을 준비하다가도 불린 나물을 물에서 빼내 가볍게 털어주고는 갖가지 양념을 뿌린 뒤 조물조물 무쳐냈다. 서너 가지 새로운 반찬을 만드는데 그것들을 순서대로 하는 게 아닌 한번에 만드는데도 한치의 실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사태에 대해서는 제황도 소녀들만큼 놀라는 중이다.

'내가 이렇게 요리를 잘했나?'

머릿속에 레시피 같은 게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일종의 감각이랄까? 머릿속에 어떤 맛을 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만들어야 할 순서가 머릿속으로 주르륵 떠올랐다. 게다가 대충 양념을 하고 간을 봤는데 의도했던 맛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오... 너...요리 좀 하는구나.

궁기마저도 찬탄할 지경... 눈깜짝할 새에 상을 차린 제황은 커다란 상을 들고 부엌을 나섰다. 제황이 워낙 전문적인 솜씨를 보여준 탓에 정말 구경만 해버린 두 소녀는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 게 있는지 밥과 계란찜등을 들고 제황의 뒤를 따랐다.

"어휴...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상을 본 송노인은 놀라며 말했다. 빈말이 아닌 진짜다. 고작 18살의 나이에 산장을 돌보기도 벅찰텐데 산중에서 차린 거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정갈했다.

"어디... 으음..."

고사리나물을 한젓가락 들어 입에 집어넣은 송노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나물 고유의 향과 질감을 전혀 해치지 않았음에도 착 감기는 짠맛과 감칠맛에 놀라는 송노인이었다. 간장과 소금, 마늘과 들기름이 너무나도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다. 계란찜은 마치 스폰지와 같이 부드럽고 밥은 너무 질지도 고들하지도 않게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도시에서 온 며느리가 서툰 솜씨로 차려준 MSG밥상에 날이 갈수록 입이 짧아지던 송노인은 순식간에 밥 세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송노인을 따라온 두 소녀도 매일 똑같은 산골 풀반찬에 강제다이어트를 하다가 간만에 포식을 했다.

"맛있게 드셨어요?"

"아암! 아이고... 제황이가 이렇게 요리를 잘했구나. 허허..."

"정말 맛있어요. 엄마가 해주던 나물이랑은 완전히 다른 것 같아."

"어떻게 똑같은 재료로 이런 맛을..."

인사치레로 물었지만 날아오는 극찬에 제황은 기분이 머슥해졌다. 자신도 먹어봤기에 맛은 안다. 이전의 그라면 절대 흉내낼 수 없는 맛이다. 단지 감각이 시키는대로 한 것 뿐이거늘 전혀 다른 음식이 탄생했다.

그렇게 식사를 대접한 뒤 송씨노인과 자신을 이채롭게 쳐다보는 두 소녀에게 숭늉을 대접한 제황은 송노인과 마주 앉았다. 본래는 이들을 빨리 보내고 싶었지만 식사 중 떠오른 게 있었다. 이 문제는 자신도 그리고 송노인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송노인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몬스터?"

"예. 마을 뒤편 우렁바위가 있는 계곡 끝자락이 었어요."

제황의 말에 송노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산골이고 외지이기는 하지만 이 곳에는 실제 몬스터를 본 이보다 못 본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몬스터에 대해서는 안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오히려 몬스터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준다. 매일 티브이에서 본다지만 지금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3티어 급이에요. 모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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