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각성으로 달립니다
"아..."
사당에서 몸을 일으킨 제황은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엉망으로 변한 사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사당 안에서 태풍이라도 몰아친 듯한 풍경...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황은 문득 하체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그는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다. 물론 그것은 환골탈태를 거치며 옷들이 기운에 휩쓸려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것이었지만 당시 반기절상태였던 제황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 산이기에 제황은 다른 것에 주목했다. 아니 그보다 더욱 놀랄 일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것은 까맣게 잊혀 버렸다.
"눈이..."
오른쪽 눈을 잃으며 시야의 30퍼센트가 날아갔었다. 좁아진 시야에 적응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남은 한 눈을 통해 세상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양궁 과녁이야 눈감고도 잡아낼 수 있었기에 상관없었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야가 갑자기 확 트였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보인다.
오히려 너무 심하게 잘 보여서 문제랄까...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끙..."
사람의 눈에는 중심시와 주변시라는 게 있다.
중심시는 정면을 기준으로 좁은 각도의 또렷한 시야와 세심한 분석을 가능케 하는 부분을 말한다. 그 주변의 주변시는 중심영역에 비하여 명확한 탐지는 어려운 대신 변화에 민감하며 중심시에 있는 시각상에 비하면 불명확하다.
그런데 그 중심시가 30도가 아닌 거의 시야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듯 보였다. 한동안 적응하려면 고생 좀 할 듯 하지만 유심히 관찰해보니 주변시의 기능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 기능이 그대로 살아있는 채 모든 게 뚜렷하게 보인다. 희안한 것은 그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눈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환장하겠군. 이게 뭐지."
사고 전 시력은 1.2였는데 그 때와 비교하면 3.0도 가쁜히 넘어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놀람은 아직 시작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황은 몸에서 느껴지는 믿을 수 없는 힘과 활력은 둘째 치고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인 오른손에서 느껴지던 무감각함 마저 사라졌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오른손을 들어 바라보니 사고로 걸레가 되었던 그 손이 아니다. 흉터마저 사라진 오른손은 자잘하게 남아있던 상처들까지 사라지고 마치 처음 세상에 나온 듯한 백옥같이 흰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고민하던 제황은 문득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와 어제 어떤 꿈을 꿨는지를 떠올렸다.
'난 분명...'
그렇다. 자신은 어제 멧돼지 사냥을 하던 중 3티어급 몬스터에게 만나 거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었다. 그 상황에서 거의 기다시피 하여 산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사당에 들어오고는 그대로 기절했다. 그리고...그 꿈...
"아아..."
떠올랐다. 안개 낀 사냥꾼쉼터... 조상님들과의 만남... 그리고... 어머니...아버지...
"꿈이..."
단순한 꿈이라 치부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명료했다.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 타인으로 인해 상처입고 덧나서 비틀어져 가던 그의 가슴 속 응어리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니구나."
제황이라고 마냥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비몽사몽 중 깨어났었으니까.
그것은 마치 온몸이 갈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그들이 외치는 소리도 들었다. 아니 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영혼의 울림이었다. 자신을 위해 선조들이 대체 어떤 것을 포기한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단 하나는 말할 수 있었다.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다고...
그 때 뭔가 시야에 이질적인 게 걸렸다. 시야 한구석에 녹색의 작은 점이 깜빡이고 있다.
그게 뭘까 하고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제황아. 집에 있니?”
사당 밖으로 송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제황은 엉겁결에 사당을 나서려 그의 머릿속으로 미성의 여자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발가벗고 나설 참이냐.
“음?”
기이한 일의 연속이기에 제황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둘째 치고 그걸 지적한 이가 여성이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하고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어떨까 싶구나. 보아하니 어린 암컷들도 보이는군.
그 말에 제황은 사당의 문사이로 밖을 슬쩍 내다봤다. 그곳에는 송노인이 서 있었는데 그 뒤로는 전에 봤던 소녀 둘이 노인의 뒤에 퍼져 있었다.
“젠장!”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 나타난 둘로 인해 제황은 육성으로 욕을 뱉어 버렸다.
“제황이 거기있니?”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송노인이 재차 물어왔다. 대문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곳은 외인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산장이 워낙 깊은 산속에 있고 길이 험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제황이 내려오지 않자 조바심이 난 송노인은 손녀와 그녀의 친구를 끌고 산을 올라왔다.
물론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런 깊은 산중에 여자아이들을 끌고 오는 게 아니었지만 손녀와 함께 있던 아랫마을 소녀는 사과를 하겠다며 바득바득 손녀를 따라 왔다. 물론 궁기산을 발을 올리는 순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산세의 험악함에 후회하고 말았지만..
“할아버지 어디 좀 앉아서 쉬면 안될까요?”
가을임에도 온몸을 땀으로 범벅한 소녀 둘이 송노인에게 매달렸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송노인도 큰맘 먹고 오를 산을 따라 올랐으니 지치는 건 당연했다.
“으음...”
송노인은 송노인 대로 난감했다.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제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마을 사람이라면 대뜸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붙여도 상관없지만 이곳은 과거부터 외인을 거부하던 무련가의 집안이었고 과거 산대장과 교류할 때도 이곳은 금지와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난감한 것은 사당안의 제황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모습은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
몸을 좀 숨겼으면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시야 한편에 작은 글씨가 올라왔다.
[제황식-호랑이사냥]
글씨가 떠오르는 순간 기현상이 일어났다. 단전 부근에서 뿜어진 무언가가 사지백회로 퍼지고 동시에 온몸에 기이한 감각이 일어났다.
-흠... 특이한 술법이구나. 육신의 모든 자취를 감춰버리다니... 무련가의 활쟁이 놈들은 그동안 술법을 판 건가.
-넌 누구야?
제황은 내면에서 울려오는 그 목소리에게 물었다. 방법은 의외로 쉬웠는데 마치 나 자신에게 묻듯 생각하니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답이 들려온다.
-애송이... 나에 대해 안다면 그 따위로 물을 수 있을까. 뭐 좋아. 좋던 싫던 함께 있게 되었으니 소개는 해야겠지. 난 고대의 제왕 소호씨의 자손이며 중원의 서방을 지키던 궁기라 한다.
그녀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야 이름은 알고 있지만 소개가 좀 틀리게 때문...
-천하사흉? 대요괴 궁기?
제황의 되물음에 쩌렁쩌렁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어딜 감히 그런 요사한 헛소리를...
사흉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름 청아하던 여성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변한다. 말에 분기가 섞여 있다.
제황이 제차 물으려 하는 순간 사당의 문이 빼꼼이 열렸다.
"계세요?"
작은 얼굴이 삐죽 들어왔다. 송노인의 손녀다. 당장에 몸을 가릴 게 없어 그대로 얼어붙었는데 그녀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제황의 나신을 아예 보지 못했는지 사당 안을 둘러보다 그대로 사라졌다. 무려 눈앞에 덜렁(?)거리는 걸 두고서도 말이다.
“여기 없어요.”
“녀석아. 함부로 들어가선 안 돼!”
송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못 봐? 어찌 된 거지?’
제황은 자신 또래의 소녀가 자신의 나신을 봤다는 충격은 둘째 치고 그녀가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지나치자 그나마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듯한 궁기라는 여자에게 물었다.
-흥. 재주껏 알아내 보시지.
그러나 답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다. 한기가 폴폴 날린다.
삐졌다. 새침하게 말하는 폼이 분명 삐진 게 분명했다. 고작 천하사흉 대요괴 궁기라 불렀다고 삐졌다는 것에 머리가 아파오지만 아쉬운 것은 자신이라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그 일은 사과할게.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줘.
왠지 속으로 말하는데 입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쉽다. 제황이 정중하게 묻자 그 목소리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싶더니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신의 법을 썼는데 범인(凡人)의 눈으로 보일 리가 있는가. 아마 네가 저 아이 앞에서 알몸으로 춤을 춰도 모를 거다.
그 때 몸을 감싸고 있던 기이한 감각이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그 힘이 미약하여 은신이 끝났구나. 일단 옷부터 걸치는 게 어떨까. 애송이...
‘그래야겠네.’
궁기의 말에 제황은 슬그머니 뒤편의 창을 열고 빠져 나왔다. 상당히 높은 곳에 달린 창문이지만 몸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그것은 매우 쉬웠다. 사당을 빠져나온 제황은 본채로 들어가 가방에서 여벌의 옷을 꺼내 입었다.
-500년이 길기도 길었구나. 복색이 완전히 달라졌어.
왠지 조금 우울해 보이는 목소리에 제황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는 해야 할 듯싶은데 지금은 밖에 찾아온 송노인이 우선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벽에 붙은 거울을 잠시 쳐다본 제황은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 얼굴이...”
손으로 얼굴을 더듬은 제황은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을 정도로 길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맙소사.”
-얼굴은 반반하구나. 애송이
그의 얼굴에 대한 품평이 들려왔지만 제황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져 얼굴 자체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에는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깨끗했다.
“누구야...”
너무나 생소한 미남이 눈앞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성장기에 벌어진 사고 이후 2년이 지났다. 과거 그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얼굴은 너무 낯설었다.
제황은 옷걸이에 걸어놓은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