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1화 (11/301)

# 11

허물을찢다.

제황은 꿈을 꿨다.

그것은 안개가 자욱한 궁기산을 오르는 꿈이었다. 꿈속의 자신은 산길을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잘 알고 있는 몇 개의 큰 바위를 지나 가파른 절벽 쪽으로 향하는데 문득 그의 앞에 그리 크지 않은 통나무 계단이 나타났다. 두꺼운 통나무로 만들어진 그것은 절벽 중간 정도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그 위로는 통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과거 아버지에게 들었던 사냥꾼들의 쉼터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편에는 호랑이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들이 틀에 걸려 펼쳐져 있었다.

제황은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느낌은 없었지만 꿈이 달리 꿈이겠는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을 밟고 끝에 당도했을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우리 후손들에게 이 저주스러운 업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나도 알고 있네."

그 말을 받는 이의 목은 마치 성대를 다친 듯 쇳소리가 섞여 들렸다.

"가문의 마지막 후손입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요괴는 어찌할 텐가. 수백 년을 눌러놓기는 했으나 아직 그 힘이 강성하네."

"세상의 기운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굳이 우리 무련가가 짊어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만한 요괴가 아니야."

"선조시어...이대로라면 저희 무련가는 끝장입니다. 언제까지 숙명을 두고 후손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어야 합니까.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요괴를 누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후손들의 정기가 더 필요한 겁니까!"

두 남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단어로 인해 귀가 쫑긋해졌다.

'무련가?...그렇다면  저분들은 내 조상들인가.'

자신의 가문... 이런 산골 벽촌 산속에 처박혀 있지만 한 때 찬란했던 역사를 지녔다고 아버지께 배웠다.

"제게 묘안이 있습니다."

그 때 문득 청명한 목소리의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야기 해 보거라. 충요."

"궁기와 저 아이를..."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 작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제황은 좀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욱한 운무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자신이 서 있던 곳이 달라졌다.

"아아..."

제황은 눈앞에 편한 자세로 앉거나 기대있는 이들을 바라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한 사람은 마치 장수라도 되는지 징이 박힌 화려한 두정갑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선비라도 되는지 망건과 황토빛의 한복을 곱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충격적인 이는 한쪽에 기대고 앉아 있는 이였는데 그는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팔을 덮는 거대한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쓴 인물이었다.

마치 아버지가 옛날에 그림책으로 보여줬던 조선의 호랑이 사냥꾼 착호갑사를 보는 것 같다.

"아이야."

"예."

두정갑을 입은 이가 자신을 부르자 제황은 저도 모르게 무릎이 꿇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숙연해졌는데 그건 마치 피의 이끌림 같은 것이었다.

“너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아 가진바 기운을 허투루 낭비할 수가 없구나. 우리는 이제 우리 무련가를 옭매고 있던 숙명의 사슬을 풀려 한다. 어쩌면 조금 더 일찍 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가문이 이지경이 된 후에야  이런 결정을 내린 우리를 용서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제황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사라졌다.

"이놈아! 무련가의 하나 남은 후손으로써 넌 우리 가문을 다시 크게 일으켜야 한다!"

이 말을 한 이는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쓴 인물이었다. 그 또한 두정갑의 사내와 같이 뒤돌아서 서서히 사라진다.

"미안하구나. 무련가의 마지막 후손이여... 우리의 힘으로는 ...놈들이 풀어놓은 궁기를 잡아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십 대에 걸친 후손들의 고련과 수련으로 궁기를 눌러놓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 무련가를 말라죽게 만들었구나.  이제 우리는 이 저주스러운 주술을 바꾸려 한다.

아이야. 마지막으로 네게 부탁할 게 있으니 후일 네 운명의 별이 너를 우리 무련가의 고향으로 이끌거든 무련가의 마지막 자취에서 우리의 시조를 찾거라. 그 분께서 네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실 것이다."

파앗...

그 말과 함께 선비차림의 남자 또한 뒤돌아 사라졌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제황은 깜짝 놀랐다. 단 셋뿐이라 생각했었건만 수십 명의 남자들이 제황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 있었다. 입고 있는 복색, 나이... 모든 게 틀렸지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무련가의 마지막 아이야.”

바로 자신을 향한 안쓰러움과 자애로움이 섞인 눈빛이었다.

그 때 그런 이들을 헤치고 한 거한이 나타났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의 그 남자는 제황의 앞에 와서 섰는데 그의 눈빛은 다른 이들과는 또 다른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끝을 알 수 없는 사랑과 슬픔이었다.

제황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상님들이 나누던 대화도 이때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들아."

"아..버...지..."

꿈속이었지만 제황은 두 눈에 눈물이 왈칵 고이는 걸 느꼈다.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고는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잠시라도 아버지를 시선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황급히 눈을 닦은 제황이 말했다.

"이녀석아... 또 아버지냐?"

"아...아빠..."

그의 아버지는 제황이 아빠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어릴 적에는 곧잘 아빠라고 부르다가 머리가 좀 굵어지자 곧바로 아버지라고 호칭을 바꾸었고 툭하면 그걸 가지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래서 딸 하나 더 낳겠다고 아등바등 용을 썼지만 부부금실만 좋아졌을 뿐 이 자식귀한 무련가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애틋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 아들... 한 번 안아보자."

꾸우욱...

남 못지않은 키를 지닌 제황이지만 지금은 너른 아빠의 품에 가득 안겼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의 품에 안겨 기쁨의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는  단 한번이라도 다시 듣기를 그토록 염원하고 소원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새침때기 아들..."

휙...

등 뒤에서 들려온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에 제황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그곳에는 제황의 어깨어림 정도 되는 아담한 키의 여성이 서 있었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제황은 애써 참았던 눈물을 다시 왈칵 쏟아내며 여성을 부여안았다.

"엄마!"

"어휴... 우리 아들... 덩치는 산만해서... 쯧쯧..."

자신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아들의 등을 말없이 토닥이던 그녀는 자신을 안은 제황의 팔을 풀려 했지만 제황의 두 팔은 요지부동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놓을거야. 가지마! 제발 가지마! 그냥 이렇게 있어. 제발...흐어엉..."

제황은 목 놓아 울어버렸다. 태어나서 그가 이렇게 울어본 기억이 있던가.

제황은 지금 이게 꿈이던 뭐든 상관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온 비극에 휩쓸려 졸지에 두 분을 허망하게 보내버린 제황이었다. 하고 싶던 말도... 해야 했던 말도 너무 많았건만 비극이 가져온 이별은 그 기회를 모두 빼앗아갔다.

"알아. 우리아들... 엄마 아빠는 다 알아."

"흑...아니야. 엄마 아빠는 몰라. 아무 것도 몰라. 흑흑... 내가 얼마나...보고 싶었는데..."

"알지. 알아..."

토닥토닥

가만히 등을 쓸어주자 제황이 목 놓아 울며 말했다.

"흑... 미안해.  내가 엄마 아빠한테 해준 것도 없이 그렇게 보내고... 아무것도 없고... 흑..."

제황의 말에 어머니는 제황을 슬쩍 떼어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우리 아들 네가 해준 게 왜 없어."

"이 녀석아. 네가 있어서 우리는 너무 행복했단다."

"그래. 바보아들... 네가 있어서... 우리 곁에 있어줘서... 그것만으로도 엄마아빠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어. 널 보고 있으면 항상 너무 행복했단다."

"엄마...아빠...“

부모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까보면 그냥 존재 자체가 부모의 행복이었다.

아버지의 큰 품이 둘을 감싸자 제황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뭔가가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홀로 다친 몸을 이끌고 재활하며 얼마나 남몰래 눈물 흘렸던가. 아무도 없는 산장에 처박혔던 건 그런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었던 고집의 발로였다. 점점 폐쇄적이고 비관적으로 변하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바꾸려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바꿀 심적 여력이 없었다는 게 정답이리라.

"아들..."

"응...아빠..."

"힘들 거야. 고통스러울 거야. 그렇지만... 내 아들은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믿어."

"이제... 엄마 아빠는 가야 해. 우리 아들...."

둘의 말에 깜짝 놀란 제황은 양팔에 안은 둘을 놓지 않으려 꾸욱 안았다. 제황은 생각했다. 두 분과 함께라면 차라리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고... 그러나 둘은 단호했다. 그런 제황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양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 강해져야 해! 항상 지켜볼 테니까! 아들 다섯! 딸 다섯! 낳기 전에는 올 생각도 하지 마!"

"아암! 내가 조상님들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만약 못해내면 나중에 아주 혼날 줄 알아! 손자 손녀! 합쳐서 스물 이상 못 만들면 절대 안 돼! 알겠어?! 항상 감시할 거야."

"흑...네?"

엉겁결에 대답한 제황은 어느새 두 분이 그의 팔에서 사라져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둘은 제황을 바라보며 연신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제황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아니 제황을 둘러싸고 서있던 모두가 제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줄기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엄마...아빠..."

제황은 직감적으로 이제 헤어져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헤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부모님과 자신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벽이 있는 듯 느껴졌다. 아마 이 벽은 아주 먼 후에야... 보게 될 것이다.

"아들... 넌 할 수 있어."

"아들... 사랑해."

둘의 말에 제황은 마치 어린애와 같이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살아 계실 적에 많이 해드릴 걸 하며 항상 후회하던 그 말...

"사랑해요. 사랑해요. 흑... 사랑해요."

"그래. 어휴... 우리 울보아들..."

"엄마...아빠... 사랑해요."

"응. 사랑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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