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0화 (10/301)

# 10

허물을찢다.

'온다.'

뒤따라오는 걸 육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제황의 감각은 소리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사냥이고 뭐고 지금은 목숨을 걱정해야 할 때다. 제황은 숨죽인 채 수컷 멧돼지가 뛰어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감각이 외치던 불길한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슈슈슈슉...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얼핏 본 체고만 봐도 근 3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몸집... 소름끼치는 건 발소리가 안 들린다. 조금만 움직여도 요란한 낙엽 밟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을 산중이건만 놈이 다가올 때 들리는 소리는 지면을 스치는 듯한 미약한 파공음  뿐이다.

놀란 가슴에 호흡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할 지경이다. 궁도를 걸으며 수련한 평정심이 아니었다면 당장 호흡곤란이 왔을 것이다.

터텁!!

그 거대한 뭔가에서 쑤욱 튀어나온 게 재수 없게도 하필 제황이 숨어있는 나무 옆을 지나치던 수컷 맷돼지를 덥썩 물었다.

우두둑

뀌에에엑!

수컷 멧돼지는 앞으로 달려 나가려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고통이 엄청난 지 공중에서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른다. 나타난 그것은 멧돼지의 발버둥이 별로 힘겹지 않은 지 공중에서 신나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300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멧돼지를....'

통째로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도 모자라 장난감 다루듯 사방으로 흔들어 재꼈다. 평범한 야생동물은 절대 아니다. 저 정도 크기가 움직인다면 필연적으로 발자국이나 그 흔적이 남고 자신이 그것을 놓쳤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순간... 섬뜩한 소리가 적막한 산속을 울렸다.

와드득...

저 거대한 멧돼지가 반으로 접혔다. 상상을 초월하는 치악력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꽈드득...꽈드득...

제황이 숨어있는 나무 밑에서 소름 돋는 먹방이 벌어졌다. 무려 300킬로그램짜리 멧돼지를 단숨에 먹어치우는 먹방이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제황은 멧돼지를 공중에서 씹어 삼키는 그것을 바라봤다.

밤이라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계열의 색을 지닌 털을 두른 사족보행의 생명체였다.  비슷한 것으로는 곰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궁기산이 아무리 외진 곳에 있다 해도 곰 따위가 살 정도로 먹이가 풍부한 곳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저것이 곰이 아니라는 증거는 양 어깨 위로 길게 솟은 쩍쩍 갈라진 수정뿔과 마치 뱀의 머리와 악어의 머리를 합쳐 놓은 듯한 그 두상에 있었다.

'몬스터다.'

디멘션 게이트를 끼고 살아가는 현대에서는 정규교과 과정에서 몬스터들에 대하여 공부를 한다. 물론 그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것들의 종류가 워낙 많아 티어를 통한 간편한 분류체계를 따르지만 대략적으로 구분하는 법은 나와 있었다.

'덩치로 보면...최소 3티어다.'

3티어라면 절대 이 궁기산에 나타나서는 안 될 급의 몬스터다. 마나를 사용하는 B급 헌터가 포함된 한 개 파티가 레이드를 시도해야 하는 크기... 아마 근처  디멘션게이트에서 탈출한 건 아닐 것이다.

한국에 존재하는 디멘션게이트는 수십 대의 카메라로 철저히 감시된다. 감시만 되면 모를까.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헌터들이 드나드는데  저만한 크기의 몬스터라면 놓치려야 놓칠 수가 없다.

꿀꺽...

충분히 씹었는지 그것은 멧돼지를 공중으로 쑥 들어 올린 뒤 입을 크게 벌려 마치 뱀이 사슴을 삼키는 것처럼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멧돼지를 밀어 넣던 몬스터의 목운동이 딱 멈췄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 그 정적 속 당사자의 머릿속으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빌어먹을...'

투명한 붉은색의 유리구슬 한 개가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거의 제황의 주먹 만해 보이는 그 눈은 고개를 들던 중 제황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쳐 버렸다. 멧돼지의 특성은 머리를 못 든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제황은 나무 위를 스팟으로 삼았던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이런 몬스터가 있는 줄 알았다면 나무 위에 숨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사냥 자체를 시도하지도 않았겠지.

타탁...

발각  당했다는 걸 느낀 순간 제황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다.

슈슈슉... 퍼퍽

공중에서 떨어지며 고개를 돌려 자신이 숨어있던 곳을 바라본 제황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 거대한 몸집의 몬스터가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을 한쪽 발로 후려치고 있었던 것...

와당탕! 드드득!!

"크흐흡..."

등에 느껴지는 숨 막히도록 아릿한 통증을 무시한 채 제황은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저 거대한 몬스터를 따돌릴 만한 경로를 모색함과 동시에 손은 기계적으로 컴파운드 보우의 리미터를 풀었다.

쏠 생각은 추호에도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 물론 리미터를 풀었어도 기껏해야 2티어 정도의 몬스터가 최선이었지만 살아남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크르륵..."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머리 위로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사라졌다.

일반적인 야생동물이라면 울음소리라도 내건만 이 몬스터는 그런 것도 없었다.

철저히 숨을 죽인 채 사냥을 한다. 게다가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으로 유연하기 이를 데 없다. 발자국이나 소리가 나지 않는 이유는 확인했다. 몬스터의 발바닥은 평평했고 두터운 털로 둘러싸여 있었다.

타탁..탁...

제황은 최대한 나무들을 낀 채 달렸다. 자신이 몬스터에게서 유일하게 유리한 것은 단 하나 몬스터보다 몸집이 작다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장애물을 낀 채 뛰어야 그나마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콰콰쾅!

거대한 침엽수를 도는 순간 처음으로 큰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반쯤 씹힌 수컷 멧돼지의 머리가 낙엽 위를 뒹굴고 있다. 그 살벌한 광경에 잠시 주춤한 틈에 발을 헛디뎠다. 한쪽 눈의 시력이 너무 안 좋아 공간지각력이 최악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몸을 굴렀는데 지금은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따딱...딱...

훅 하고 풍겨오는 더운 피냄새와 노린내가 얼굴에 느껴졌다.

'이대로는 죽는다.'

지금 몬스터는 자신을 온전히 저항 할 수 없는 사냥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신이 만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줘야 한다.

다시금 으로 두 바퀴 구른 제황은 재빨리 전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컴파운드 보우에 걸었다.

우드드득...

리미터를 제거한 컴파운드 보우는 무려 200파운드 가량의 힘을 필요로 한다. 건장한 일반인은 움직이지도 못할 시위지만 제황은 이를 악문 채 시위를 당겼다. 등과 팔 근육 파열되는 느낌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덜덜덜...

힘겹게 당기기는 했지만 컴파운드 보우의 렛오프가 걸리는 지점까지는 당기지 못했다. 아니 당길 겨를 도 없었다. 몬스터의 주둥이가 지척에 있었다. 망설임 따위는 사치다.

파아앙...

거친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쏘아져 날아갔다. 목적지는 몬스터의 눈... 그러나 그 필생의 공격은 몬스터의 가벼운 도리질 한 번으로 무산되었다. 옆목 부분에 꽂히기는 했다. 그렇지만 덜렁거리는 게 제대로 꽂히지도 않아 보인다.

그리고 제황의 공격에 대한 댓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퍼어어억!

"크아아악!"

몬스터가 내뻗은 앞발에 정통으로 걸렸다. 이 때 만큼은 제황도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그 공격은 제황의 어깨와 갈비뼈를 후려 갈겼는데 단숨에 갈비뼈가 우두둑 하고 부러져 버렸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제황은 나무에 부딪힌 뒤 그대로 낙엽 속으로 처박혔다.

삐이이이....

귀에서 이명이  들려오고 몸은 마치 물먹은 휴지조각처럼 땅에 구겨졌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당장 일어나 뛰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한가득 쌓인 낙엽이 쿠션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죽는다.'

맥이 풀린 제황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문구는 단 하나였다. 이대로 죽는다. 부모님 산소도 돌봐야 하고 산장 청소도 해야 한다. 한수지도 만나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다. 활을 계속 쏘고 싶다.

아니...사실 저것은 본심이 아니다.

...

제황은 자신을 배신한 모든 이에게 복수하고 싶다.

가슴 속 꾹꾹 눌러 참았던... 그 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그 말... 입으로 꺼내는 순간 마치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이 더럽혀 질까 모질게 외면했다. 그런데 다 소용없다.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다. 지금 그는 앞마당과도 같은 궁기산에서 몬스터에게 물려죽는 것이다.

바스락...바스락...

거대한 체구가 내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낙엽을 밟으며 그 몬스터가 다가왔다. 이제 거리는 고작 10미터도 되지 않을 상황... 이를 질끈 깨문 제황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크르륵...

몬스터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바닥을 훑었다. 낙엽 속에 처박혀 밖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고작 4에서 5미터 안쪽에 있는 그를 몬스터는 못 찾겠다는듯 킁킁거리며 한참을 돌아다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도리질을 치며 주위를 뒤지던 몬스터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킁킁 거리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낙엽을 박차는가 싶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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