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아이는아프다
“같이 가자꾸나.”
“아니요. 아버지. 제가 금세 다녀올 테니 좀 더 주무세요.”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아들의 말에 송노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벗어둔 허름한 작업복을 몸에 걸쳤다.
“어... 제황이 아니냐.”
“예. 재식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문밖에서 아들과 제황의 목소리가 들린다. 송노인은 눌린 머리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섰다. 국방색의 야상을 걸친 제황이 송노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그래. 제황아. 이 새벽에 어쩐 일이누...”
제황의 인사를 들으며 송노인이 제황의 행색을 살폈다. 검은 야구모자를 눌러 쓴 제황의 몸에는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러다가 문득 제황이 등에 맨 컴파운드보우와 헌팅벨트에 체결한 전통을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밤사냥 했니?”
“예.”
제황의 대답에 송노인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어렸다. 제황의 아버지인 산대장이야 워낙 강건하고 노련한 사냥꾼이었기에 걱정 없었지만 제황은 이제 고작 18살이었다. 노련한 사냥꾼도 짝패를 이뤄 서너 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움직여야 안전한 궁기산에서 도와줄 어른이 없는 제황이 사냥을 했다니 걱정이 앞선 것이다.
“전화도 안 터지는 곳인데 항상 조심해야해.”
“예. 항상 조심하고 있어요. 멧돼지를 좀 잡았는데 혼자 가져오기는 좀 무리가 있어서요.”
“오...그래.”
송노인은 눈에 띄게 반색했다. 제황이 그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멧돼지 사냥을 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홀로 움직여 멧돼지를 잡았다는 건 보통내기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역시 그 피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얘야. 밭에는 나 혼자 갈 터이니 제황이를 도와주거라.”
“어...어... 그렇지만...”
늙은 아버지 홀로 밭에 가신다는 말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아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황이 멧돼지 사냥을 한 것이 단순한 사냥이 아닌 마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준비하고 올 테니 기다려라.”
아들이 제황에게 말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송노인은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실부모한 것도 모자라 몸과 마음까지 다쳐 보는 게 안쓰럽던 아이였다. 재활을 한다며 다친 몸을 이끌고 홀로 산에 오르는 것을 보며 얼마나 안타깝던가.
이제 다시 건강한 몸으로 사냥을 하니 마치 제 자식이 일인 양 반갑기만 하다. 그렇지만 아들의 말에 제황이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근데... 할아버지...”
“왜?”
“재식 아저씨 혼자서는 무리 실 텐데...”
“음?”
***
동네에서 산을 탈 수 있는 장정들을 모두 끌어 모아 궁기산에 오른 어른들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후욱...후욱... 장씨! 힘 좀 써봐!”
“아이고... 크다. 커...”
나무로 옭아 맨 거대한 멧돼지들이 어른들의 손에 끌려 속속들이 내려올 때마다 마을의 노인들과 여자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이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어머... 저게 대체 크기가 얼마야.”
“아휴...끔찍해.”
“정말 크네. 300근은 나가겠네.”
“저 살벌한 이 좀 보소...”
수컷 멧돼지는 워낙 커서 어른 넷이 달라붙어 질질 끌고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산에서 들고 내려온 멧돼지의 숫자는 총 11마리였다.
암컷도 말이 암컷이지 100킬로그램은 너끈히 넘어갈 지경... 한쪽에서는 송노인이 파출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잘 좀 부탁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저희가 앞장서서 해드려야 하는 건데... 송구합니다. 수렵허가 부분은 깨끗하게 만들어 두겠습니다.”
파출소장의 말에 송노인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뭔 한 동네 사람끼리 그런 걸 따지고 그러나. 아무튼 고기는 넉넉히 챙겨 줄 테니 파출소 식구들도 좀 챙기고... 한 마리는 파출소 식구들 챙기고...”
“아이고 뭘 그런걸... 오랜만에 목에 기름칠 좀 하겠습니다. 하하”
“옳지. 그러고 보니 내가 집에 담가놓은 약술도 좀 내줘야 겠구만...”
“말씀만 하셔도...”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골 중에서도 시골인 궁기리 같은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파출소장 하나에 경장과 순경 하나 달랑 있는 곳이기에 공무원이라 유세 떨 것도 없으려니와 이런 산골에 있다 보면 있던 욕심도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그 뭐냐. 워낙에 멧돼지가 많으니 자네가 좀 나서서 읍내에 저걸 사갈 사람 좀 수배해 주게.”
“예. 어르신 아닌 게 아니라 도축장이랑 읍내에 고기집 하는 사람들한테 연락 쫙 돌려 놨습니다.”
“허허 역시 우리 파출소장이 손이 빨라.”
18살이기는 하지만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워 멧돼지를 잡는 것만 생각했지 처리할 방도는 모르는 제황이를 대신해 송노인이 나섰다.
“그런 그렇고 정말 저걸 혼자 잡았습니까?”
파출소장은 들지도 못하고 거의 질질 끌려 내려오는 수컷멧돼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18살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간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냥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려 11마리의 성체 멧돼지를 활 하나로 잡았다는 것을 그는 처음 믿지 못했다. 멧돼지는 사람이 기르는 일반 돼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해야 했다. 멧돼지는 맹수이며 산의 포식자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이걸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그것도 수컷은 많아야 3발에서 4발이고 암컷들은 죄다 단 한발의 화살로 절명시켰다. 화살이 꽂힌 곳은 모두 머리... 사체들도 아주 깨끗했다. 사냥개가 물어뜯은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일반적인 사냥꾼들은 멧돼지를 사냥할 때 머리를 겨냥하지 않는다. 인간도 그렇지만 야생동물도 가장 강한 뼈는 역시 허벅지와 머리뼈였다. 특히나 불도저와 같은 박치기가 주특기인 멧돼지의 두개골은 얼마나 단단할 것인가. 잘못 노렸다가 총탄이 튕겨나가거나 피륙의 상처만 내 멧돼지를 더욱 성나게 하기 십상이었다.
그렇기에 노련한 사냥꾼들은 주로 허파나 심장 ... 다리 등을 노린다. 그편이 상대적으로 노리기도 편하고 위험성도 적다. 그런데 실려 내려온 멧돼지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 있었다. 단숨에 뇌를 곤죽내 버렸다.
"산대장 아들일세."
"아.... 그렇다면 저 아이가..."
노인의 한마디에 파출소장은 금세 알아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근방에서 산대장을 모르면 간첩이다. 직접 만나본 건 아니지만 들은 것의 반에 반만 감안해도 제황의 실력도 대략 이해가 갔다.
그와 함께 산대장 집안의 불행이 떠올라 못내 마음이 씁쓸하다.
"자네도 신경 좀 써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는..."
"내 집에서 눈 좀 붙이라 했어. 밤사이에 저렇게 잡아댔는데 몸이 성하면 그게 이상하지."
"으음. 몸은 괜찮답니까?"
파출소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강한 아이니까 괜찮을 거야.”
“예.”
“얘... 여기니?”
“맞아. 맞아.”
송노인의 대문근처에 두 개의 그림자가 서성였다. 산골에 어울리지 않은 뽀얗고 고운 피부의 두 소녀가 연신 대문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 다 상당히 예쁜 편이었는데 산골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말 저기서 자고 있어?”
“응, 할아버지가 자고 가라고 했대. 밤새도록 산에서 돼지 잡았다고...아까 봤지?”
“응응.”
앞에선 소녀의 말에 그녀의 뒤에 선 소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봤다. 십여 마리의 멧돼지들이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그녀의 몸보다 훨씬 거대한 멧돼지 십여 마리는 그녀에게 신세계였다.
아무리 몬스터가 날뛰는 시대라 해도 평범한 도시소녀인 그녀는 티브이 속에 지겹게 나오는 몬스터보다 당장 눈앞에서 목도했던 그 거대한 멧돼지들의 모습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당장 산에 오르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데 한밤중에 산에서 그것도 활 하나 만으로 멧돼지를 사냥했다는 건 그녀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겼어? 덩치도 엄청 크겠지?”
“나도 잘 몰라. 그냥 좀 키가 크긴 하던데... 나도 이 촌 동네 온지 얼마 안됐다니까.”
궁기리의 아래쪽에 위치한 청사골이라는 작은 마을 친척집에 놀러왔던 그녀는 송노인의 손녀와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고 오늘 처음 보는 신기한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그 멧돼지들을 잡은 이가 자신들보다 고작 한 살 많은 남자라는 것과 송노인의 집에서 자고 있다는 말에 와본 것이었다.
“혹시 헌터일까?”
“아니, 우리보다 고작 한 살 많은데 각성자일 리가 있니.”
이곳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제황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것 밖에 알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헌터냐는 질문에는 단정하듯 부인했다. 상식적으로 헌터라 치기에는 너무 어렸다.
물론 어린 나이의 각성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각성자들 일명 디바우저들은 나이 같은 건 상관하지 않은 채 나타난다. 그렇지만 디바우저는 정말 희귀했다. 각제각성자인 비욘더와 다르게 디바우저들은 그 혈통과 재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한 이들이었다. 그만큼 특별한 이들이니 전 세계에 고작 오만 안팎밖에 되지 않았다.
다버우저는 비욘더들과는 애초에 출발점 자체가 틀린 귀족 중에 귀족이었다.
본디 진짜 각성자는 그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성장 문제가 아니었다. 비욘더들은 각성했을 때 세이브로부터 간신히 커먼스킬 하나를 얻고 시작하지만 디바우저들은 그 상위 등급인 스페셜이나 레어 스킬을 두 세 개씩 얻고 각성한다.
각설하고 그녀들은 지금 저 거대한 멧돼지를 사냥해온 이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지루하디 지루한 산골에 나타난 특이한 남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