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다시산으로...
잠시 후 거대한 크기의 석실이 몸을 드러냈다. 약 60평가량의 이 거대한 석실의 사위에는 납작하고 긴 검은색의 나무상자 수십 개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는데 깊은 지하에 만들어 통풍과 이상적인 습도 조절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이 석실에는 시위가 풀어 놓은 수십 개의 각궁들이 검은 옻곽 안에 잠들어 있다.
모두 무련가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다.
“손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무리 당대의 최고궁장들이 만든 각궁이기는 하나 하늘아래 세월을 이기는 것들은 없듯이 모두 낡고 군데군데 접합부가 뜯겨 나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몇 개의 옻곽들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제황은 이내 시선을 돌려 한쪽에 마련된 작은 궁방으로 향했다.
이곳은 그의 아버지가 그동안 수집한 활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정면에는 세 개의 크고 작은 각궁이 시위가 풀린 채 보관대 위에 놓여 있었고 왼쪽에는 갖가지 모양의 전(箭)통 들과 화살들이 마지막으로 오른쪽에는 신소재로 만들어진 듯한 리커브보우와 컴파운드 보우등이 걸려 있었다.
딸깍
궁방에 들어선 제황은 곧장 왼쪽에 있는 컴파운드 보우를 벽에서 내려 주의 깊게 살폈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 자신에게 선물해 주셨던 것인데 일반적인 동물 사냥이 아닌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들이 사용하는 특수합금으로 제작된 컴파운드보우였다.
이 활은 상당한 고가였는데 무려 100파운드의 힘이 걸린 컴파운드보우로 성체의 수컷 멧돼지도 이 컴파운드보우에 급소를 한방 맞으면 그대로 고꾸라질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물론 이차원의 생명체인 몬스터에게는 빈약한 한방이겠지만 말이다.
특수재질로 되어 있어 최대 200파운드까지 힘을 낼 수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100파운드도 상당한 무리이기에 간단한 리미터로 제한되어 있었다.
“휴우... 후우웁..”
몇 가지 조정을 통해 컴파운드 보우의 캠을 조정한 제황은 시위를 몇 번 당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재활을 하며 수십 수백 번 시위를 당겨보기는 했지만 언제나 느끼는 건 그가 즐겨 당기던 각궁의 그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기자면 당길 수 있지만 그가 사용하던 대부분의 각궁들이 거의 우궁용으로 되어 있었기에 잘못 당겼다가 행여 뒤틀림으로 활이 망가질까 손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름 타협한 것이 좌우궁의 구분이 없고 렛오프가 있어 힘의 소모를 줄여주는 컴파운드 보우를 선택한 것...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낸 제황은 오른쪽 벽걸이에서 사냥용으로 제작된 전통과 헌팅 벨트 등을 내려 손에 쥐었다.
“멧돼지 새끼들... 씨를 말려 주마.”
***
타탁...탁...
제황은 부모님의 산소를 시작으로 멧돼지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야구모자에 조금 어두운 국방색의 얼룩무늬 야상을 입은 제황은 멧돼지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타고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한 속도로 움직였다.
본디 사냥에 들어갈 때 준비해야 할 것은 수십 가지지만 제황은 컴파운드 보우의 부속품들도 거의 빼놓은 채 100여발의 화살만 챙긴 뒤 사냥에 나섰다. 멧돼지 사냥에 거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는 사냥개가 없기에 불시에 벌어지는 멧돼지의 반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성체가 아닌 어린 멧돼지라도 정면에서 치이면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쉼터는 바뀌지 않는군.”
제황은 울창하게 솟은 나무와 바위들 사이로 이리저리 눌린 자국이 즐비한 낙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멧돼지의 특성상 궁기산 곳곳에 이런 곳이 여러 군데 존재했는데 쉼터의 크기를 가늠하며 무리의 숫자를 파악하였다.
‘파악된 건 총 세 무리 숫자는 많으면 100마리 이상... 적어도 50마리...’
적지 않은 수지만 겁먹지는 않는다. 멧돼지 따위에 겁을 먹는다면 과거 호랑이사냥으로 명성을 떨치던 무련가의 자손이라는 이름이 울 것이다.
“좋아.”
멧돼지들의 이동통로와 사냥개시 후 예상되는 우회로 등을 모두 재확인한다. 잠시 눈을 감고 모든 계획을 정리한 제황은 이내 눈을 번쩍 뜬 뒤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슈슉...
마치 재빠른 원숭이가 기어오르듯 공중으로 뛰어오른 제황은 능숙한 솜씨로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섰다. 제법 무성한 나뭇잎이 있는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 자리 잡은 제황은 주변을 살피며 눈을 반개했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나뭇가지 위의 제황이 슬쩍 눈을 감자 제황이 있던 곳은 이내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은신이지만 제황은 탐색에서 하나 놓친 것이 있었다. 그의 실수가 아닌 본래라면 절대 없었을 그것... 멧돼지 쉼터의 한쪽에 놓인 거대한 고목나무 상단 3미터 가량 위에는 철사와 같은 길고 굵은 체모가 나무껍질 사이를 파고들어 있었다.
***
어둠이 찾아오고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산마루를 타고 휘몰아쳐 가고 바람을 따라 나무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며 자못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고 했다. 상상력이 뛰어난 이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면 마치 자신 외에 누군가가 있는 착각을 느끼고는 한다.
타탁...탁...
그 때 어디선가 둔탁하고 요란한 소음이 산을 울리기 시작했다. 짧은 보폭의 경망스럽지만 무거운 발걸음... 뀌익뀌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이내 한 떼의 멧돼지들이 나타났다. 대략 20~ 30여 마리의 멧돼지들은 쉼터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땅을 헤치거나 몸을 뒤집기 시작했다. 작은 녀석들은 별 경계심이 없는지 지들끼리 마구 엉키며 놀고 있고 그보다 조금 큰 놈들은 쉼터를 확인하기에 바쁘다. 잠시 후 무리의 대장인 듯한 거대한 수컷 멧돼지가 느릿하게 나타나 쉼터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200킬로그램은 가뿐히 넘을 듯한 이 거대한 녀석은 고개를 들어 사방을 경계하더니 이내 쉼터 중앙에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수컷을 따르는 수 마리의 암컷들 중 발정이 온 녀석은 수컷 멧돼지 옆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고 새끼를 거느린 암컷들은 젖도 뗀 놈들이 달려들자 그걸 피하기 바쁘다.
여느 평화로운 멧돼지 가족의 풍경... 그렇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은 이내 한 발의 화살로 산산조각이 났다.
드드드득... 퉁....퍽...
뀌익!!
짧은 시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새끼들을 다스리던 암컷 한 마리가 머리를 땅에 세차게 박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머리위로 보이는 것은 한발의 화살... 아직 멧돼지들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제자리에 일시정지 하듯 선 그 때 다시금 날아든 한 발의 화살이 다른 거대한 암컷의 머리를 땅에 고정시켜 버렸다.
뀌이익!
두 번째 암컷은 그나마 제대로 된 비명이라도 지르며 절명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돼지들이 사방으로 날뛰며 도망치려 한다. 그것은 수컷도 마찬가지... 적이 눈앞에 있으면 대뜸 미친 듯이 돌진이라도 하건 만 적막을 깨고 날아드는 사신의 부름에 수컷 또한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200킬로그램의 거구이지만 야생동물 특유의 움직임으로 빠르게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뛰쳐나갔지만 채 10여미터도 뛰지 못하고 머리를 강타하는 거대한 충격에 땅에 쓰러졌다.
그러나 크기가 크기인지라 머리 위에 길다란 막대기 하나를 꽂은 채로도 발버둥을 치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막대기가 날아온 곳을 한 번 쳐다본 순간 뒤따라 날아온 화살이 눈에 깊숙이 꽂히며 수컷 멧돼지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뀌에엑! 꽥꽥!
무리의 중심인 수컷이 죽자 돼지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미친 듯이 쉼터를 이탈하고 암컷 멧돼지의 새끼들은 제 어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사방으로 뛰기 바쁘다.
타탁...
작은 소음과 함께 한 인영이 나무 밑에 나타났다. 몸을 풀 듯 가볍게 몸을 뒤척인 그것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날 듯이 뛰기 시작했다.
타탁...탁...
불빛도 길조차 제대로 없는 산이지만 인영은 거침없이 달렸다. 사방으로 도망친 듯 보이지만 멧돼지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자주 애용하던 길로 뛰기 마련이다. 그 인영은 단순히 멧돼지들을 쫓는 것이 아닌 멧돼지들이 다니는 길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뛰다가 이내 시야에 들어온 암컷 멧돼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거리는 약 60미터...
쉬이이잇.... 파악!
뀌에에엑!
측두부에 긴 화살이 돋아난 암컷 멧돼지가 화살이 날아온 반대편을 향해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화살을 날린 인영은 암컷 멧돼지가 죽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다시금 내달리기 시작했다.
***
“어이구...”
송씨 노인은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에 나이 먹음을 증명하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근 반백년이 넘도록 이 시간에 일어났지만 젊었을 적과는 다르게 하루가 다른 몸이 자신의 노쇠함을 알렸다.
타탁....탁...
밖에서는 조용한 소음이 들린다.
“애비야!”
“예. 아버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난 아들놈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 20년간 도외지 생활을 하던 아들은 얼마 전부터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을 하다 다쳤는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