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6화 (6/301)

# 6

다시산으로...

“웃차...”

제황은 무려 40킬로의 배낭을 등에 지고서도 궁기산을 나는 듯 올라갔다. 걸음마를 시작 했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심심찮게 올랐던 곳이고 방학이나 휴일 같은 날 산에서 사시는 아버지를 뵈러 갈 때면 제 앞마당 같이 뛰어놀던 곳이었다.

일반적인 등산인 이라면 오르는데 3시간에서 4시간은 족히 걸릴 험한 산이지만 제황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지 고작 한 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헉헉... 헉... 후우...후우...”

제황은 잠시 심호흡을 한 채 송골송골 솟아오르는 땀을 닦으며 등에 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놨다. 아무리 제황이라도 40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궁기산을 전력으로 뛰어 오르는 것은 숨이 차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제황은 이것도 마음에 안 드는 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 했다.

“학교에 있었더니 체력이 많이 안 좋아졌구나.”

누군가 그 말을 듣는다면 기함하겠지만 제황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산 밑에서 업고 이곳까지 뛰어 올라오는데 맨몸으로 뛰어 올라오는 자신보다 훨씬 빨랐었다. 그렇게 올라오고서도 숨 한번 차지 않는 아버지였기에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제황은 당연히 체력의 기준이 그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휴..."

산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훨씬 규모가 큰 목재건물들이 나타났다. 나무로 지은 수채의 건물들이 있으며 거대한 나무들로 목책을 두른 이곳은 친척하나 없는 아버지의 친가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제 남은 이라고는 자신뿐이지만...

"다행히 도둑은 안 들었네."

제황은 정문에 걸어놓았던 자물쇠가 그대로인 것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궁기리 사람들과 산을 오가는 약초꾼 아저씨들이 이곳을 틈틈이 지켜 준다지만 호기심 많은 좀도둑들을 둘째 치고 욕심 많은 외삼촌 때문에 안심할 수 없었다.

물론 당시에는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은 충격과 장애가 생긴 몸으로 인해 맥 놓고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의 제황은 그 때의 제황과 틀렸다.

아마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다면 몸 성히 돌려보내지는 않으리라.

"후우..."

할일이 태산이지만  제황은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배낭에서 하얀 비닐봉지를 꺼내 든 뒤 산장의 뒤편으로 향했다. 목책을 따라 주변을 도니 주인을 잃어 다 망가져 버린 어머니의 텃밭이 나타났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자그마한 두 개의 봉분이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해 있다.

제황은 가져온 것들을 두 봉분 앞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소주 한 병과 북어 한 마리..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찰떡이 쌓인 일회용 접시가 산소 앞에 놓였다.

“아버지, 어머니... 제황이 왔어요.”

독하디 독한 외삼촌은 엄마의 시신까지 자신의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했지만 뒤늦게 정신 차린 제황이 결사반대해서 가까스로 두 분을 이곳에 함께 모실 수 있었다. 묘소를 인적 없는 산속에 쓴다며 결사반대하던 외가는 그나마 외삼촌이 한 짓이 미안하긴 한지 아니면 가져간 돈 내놓으라고 고소당할까 두려웠는지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고소고발을 할 수 있었지만 하는 짓이 워낙 역겨워서 그냥 외면해 버린 것이다.

"어머니... 미안해요."

양궁인 으로의 삶이 어머니가 강요하신 길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활을 광적으로 좋아했을 뿐이었고 어머니는 그 길을 열심히 닦아주신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양궁과 학교를 모두 놓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은 지금껏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어머니의 노력을 모두 허사로 만드는 것이었기에 어머니께 미안했다.

한동안 부모님의 묘를 바라보던 제황은 비닐봉투에서 장갑을 꺼냈다. 오며가며 누군가 손질을 했는지 산소는 깨끗했지만 산속이기에 잡초는 금세 자란다. 산소 주변을 모두 정리할 참으로 장갑을 챙겨온 것... 그러나 장갑을 끼고 산소를 돌던 제황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응?"

앞에서 봤을 때는 멀쩡했는데 뒤로 돌아가니 야생동물의 짓인지 아버지 쪽 산소 뒤편이 엉망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다가간 제황이 주변을 손으로 쓸고 남아있는 흔적들을 살피더니 이내 이를 뿌드득 갈았다. 하나 남은 왼쪽 눈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멧돼지... 이 새끼들이..."

산속이기에 야생동물의 침습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돼지들이야 이곳이 산소인지 언덕인지 알게 뭔가. 그렇지만 제황이 지금 이렇게 분노하는 건 부모님의 묘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일어나 활을 들고 멧돼지들을 찾아 궁기산을 이 잡듯이 뛰어다닐 듯싶던 제황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흡을 이어갈 때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간다.

'용혈기'

아버지에게 배운... 아니... 조선시대 전문적인 호랑이사냥을 목적으로 조직된 착호군의 전신인 착호단의 초대 착호단주(捉虎團主) 인 시조로부터 제황의 가문 무련가 내에 전승되어 내려온 호심법이 분노로 인해 들끓는 제황의 마음을 순식간에 진정시켜 줬다.

무련가

당시 착호단이 사용하던 모든 무예의 근원이 무련가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공으로 한 때 조선 군부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랐던 무련가는 임진왜란을 지나 일제강점기...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금은 이런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었다.

"후우우..."

아버지의 엄한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용혈기를 수련한 제황은 그런 기초가 있었기에 지금껏 양궁에서도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각성자들이 사용한다는 마나를 다루는 신외지물은 아니었지만 정과 신을 강건히 만들어주는 효능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제황은 무너진 곳을 정성껏 보수한 뒤 산소 주변의 잡초들을 깨끗이 손질했다. 최소한 사람의 체취가 있으면 멧돼지의 침습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기에 꼼꼼히 주변을 청소한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자물쇠를 따고 산장의 안으로 들어선 제황은 선조들의 위패를 모아놓은 작은 사당을 시작으로 산장 곳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산중이기에 초저녁임에도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어느 정도 청소를 마친 제황은 별채에 있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위이이잉

마나석으로 움직이는 보일러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잠시 후 뜨끈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당한 고가의 보일러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산장에 있을 때를 위해서 마나석보일러를 들여놓았다. 문득 옛날 아버지가 이 거대한 보일러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르며 굼실굼실 웃던 모습이 떠올라 제황은 다시금 우울해졌다.

“얼른 씻자.”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주변정리에 들어갈 참이기에 제황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보일러에서 나온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온몸이 노곤하게 풀리기 시작한다. 낮 동안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것...

누군가는 정기신을 닦는다며 매일 냉수마찰을 한다는데 아버지는 그런 이들을 보며 콧방귀를 뀌셨다. 사람의 몸은 정직하다. 정신력을 수양하기 위해서 냉수마찰을 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정신 수양할 것들은 많았다. 쉴 때는 푹 쉬어야 한다는 주의...

찰박...

제황은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그의 몸은 날씬하면서도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차 있었는데 그것은 헬스나 약을 통해 일부러 만든 근육들이 아닌 순수하게 궁술을 수련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근육들이었다. 궁술에 가장 알맞게 변형된 몸...

특이한 것은 꿈틀거리는 그의 가슴 근육 위로 하나의 작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어떤 동물을 형상화 한 듯 보였다.

이 문신을 정확히 언제 새겼는지는 제황도 모른다. 단지 그 문신이 무련가의 직전 후계자들만이 가지는 것이라 아버지에게 들었을 뿐...  아버지의 가슴에 새겨진 그 커다란 문신을 떠올리던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내 몸을 닦는데 열중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제황은 곧장 자리를 정리하고 아침 운동에 나섰다. 아침운동은 항상 가벼운 달리기로 시작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뛰는 달리기 코스는 남들이 보면 조단당해 죽기 딱 알맞아 보이는 어둡고 험한 바위 산길을 뛰는 것이었다. 정확한 길이는 알 수 없지만 대략 4에서 5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전력으로 돌파해야 했다.

코스의 절반정도를 뛰자 항상 아버지와 수련하던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약 120보 길이의 과녁 두 개가 놓인 이곳은 함께 화살을 날리거나 용혈기를 수련하며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

“후우... 후우...”

헝클어진 호흡을 조절하며 과녁들의 상태를 확인한 제황은 곧바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놓인 거대하고 납작한 오금석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았다. 이 오금석이라는 것은 흔히 남한강 쪽에서 나오는 돌 중 검은색의 토파석과 비슷했으나 단순한 검은 색이 아닌 번들거리는 질감의 은빛의 조각들이 은하수처럼 뿌려진 거대한 바위였다.

“후아...”

깊게 숨을 내쉰 제황은 해가 뜨는 곳으로 가슴을 내민 채 입을 통해 한 가득 숨을 머금었다. 한계까지 도달한 숨을 근 1분여를 참은 채 총 10번으로 나눠 조각조각 끊으며 코를 통해 숨을 내뱉는다. 그렇게 한 번의 숨을 쉬는데 걸린 시간은 약 2분... 간단하다면 간단한 호흡법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 제황이 아버지에게 이 호흡법을 전수 받았을 때 섣불리 따라하던 제황은 호흡곤란으로 기절할 뻔 했었다.

그나마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된 것이 그의 나이 9살 때였는데 아버지는 그 또한 빠르다며 무척 기뻐해 주신 기억이 있다.

한참 용혈기를 수련하던 제황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새 해가 눈앞에 나타난 것... 자리에서 일어난 제황은 곧바로 무련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용혈무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춤을 나타내는 무(舞) 를 쓰고는 있지만 손동작 보다는 주로 발동작과 걸음걸이가 많은 이 용혈무는 그 걸음이 느린 듯하지만, 순간순간 정밀한 무게중심 이동이 없으면 금세 엉덩방아를 찧게 만드는 고도의 보법이었다. 한참 구슬땀을 흘리며 용혈무를 수련한 제황은 어느새 해가 머리 위로 오르는 것을 느끼며 동작을 멈췄다.

아침 수련을 끝내고 산장으로 돌아온 제황은 사당을 깨끗이 닦고 선조들의 위패에 절을 올렸다.

“무련가 52대손 천제황 조상님들께 문안인사 드립니다.”

성심을 다해 절을 마친 제황은 사당에 모셔진 위패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위패들은 본디 북한의 양강도에 있는 본가에 있던 사당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상으로 인해 본가의 세가 급격히 줄어들고 결정적으로 625전쟁 때 본가가 전쟁에 휩쓸리며 조상들은 위패들과 가문의 보물을 챙겨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상처가 남아있는 위패들을 천천히 눈에 담던 제황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본채의 뒤로 돌아가 교묘히 숨겨진 바닥판을 들어내자 지하로 뚫린 통로가 드러났다.

철컥... 피이잉...

한참을 지하로 내려간 제황은 어둡고 구불구불한 복도를 천천히 걷다가 잠시 후  지하 내부를 밝히는 불을 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