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175
사아아아-
들판에 잔디를 뒤흔드는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그 가볍고 시원한 바람에 한 소년의 눈이 서서히 떠진다.
눈을 뜨자 밝은 빛이 망막을 비춘다.
그 너무도 밝은 빛에 잠시 눈을 질끈 감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뭐야 여긴?”
“왔냐?”
휙- 소년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했다.
소년의 눈이 둥그렇게 커지기 시작했다.
“김의철?”
목소리에 주인은 잘 아는 소년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가장 지겹게 마주친 지겨운 얼굴이고 말투인데.
의철이 말했다.
“야.”
“응?”
“여기 기억나냐?”
후우웅-
산들바람이 시원한 평온한 장소였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을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왜 모르겠냐. 네가 내 배에 칼빵 꽂은 곳인데.”
“그래. 기억하네…….”
의철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들판에 누워 있던 소년 ‘김천운’을 바라봤다.
“김천운이지?”
언뜻 이상한 질문이겠지만 저 질문에 많은 의미가 내포됐다는 것을 천운을 알 수 있었다.
천운은 그저 한마디로 대답했다.
“그래.”
“그런가…….”
그저 영혼이 빠진 듯한 멍한 반응이었다.
“그 녀석은…… 누구였어?”
침울한 표정으로 의철은 물어왔다.
복잡한 마음이 감정에 맴돌았다.
굳이 지금 떠났어야 했냐는 마음이 가장 컸다.
그렇기에 이 모든 걸 알고 있을 거 같은 눈앞의 천운에게 물어봤다.
천운은 대답했다.
“신이라고 하면 믿겠냐?”
“신?”
“그래, 신.”
피식 웃은 천운이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을 만든 가장 무능한 신이라고 말하면 믿겠냐?”
“…….”
의철은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게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신.
굳이 그 말의 의미를 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그 녀석은 분명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냐?”
천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녀석의 감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까.
녀석의 느낌이 그렇다면 그런 것일 거다.
“있잖아. 나는 그 녀석을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아.”
천운이 말했다.
그 녀석이랑 이 몸을 차지하고 있던 ‘이정원’을 말하는 거였다.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어느 순간 수를 헤아리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으나 1,000이 넘는 수를 회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정이 쇠퇴하고 마모되며 사라져 갈 때쯤.
이곳에서 김의철이 자신의 정신을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오히려 너한테 고맙지.”
의철은 그 말에 대답 없이 멍하니 푸른 하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휴…… 한숨을 쉰 천운이 일어섰다.
저 상태에서 계속 말해 봤자 소용도 없고 듣지도 않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띠이잉-
천운의 머릿속을 울리는 이명이 들려왔다.
“윽!”
“천운아?”
잠시 몸을 비틀거리던 천운이었다.
그러나 천운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이 현상은 자신도 잘 알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니.
“기억이네.”
정확히는 이정원의 기억이었다.
몸에 들어온 순간 이정원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
천운은 우뚝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가 당황과 경악으로 물들어간다.
“이, 이건 말도 안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기억 속에 일어나 있었다.
자신이 평생을 투자해도 1,000번을 회귀해도 방법이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면…… 이러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피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운은 하늘을 노려보며 말했다.
왠지 모를 눈물이 볼을 타고 호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어머니를…… 살려냈구나…….”
‘확정’ 정확히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
어느 나비 효과에도 영향이 없는 사람들.
그것이 자신의 부모님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은 필연일 터인데…….
“이러면 방금 말을 취소할 수밖에 없잖아.”
처음 이 세상을 만든 가장 무능하고 나약한 신에게 자신이 당한 것을 똑같이 갚아 줄 생각으로 한 행동이…… 그 행동의 결과가 이런 우연을 낳아 버렸다.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구나.”
천운의 시선이 눈앞에 떠오른 한 스탯을 향했다.
행운.
이 녀석이 드디어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야 김의철!”
천운이 뒤돌아 의철을 불렀다.
의철의 시선이 천운을 향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인마.”
천운이 말했다.
왠지 신이 난 목소리로 즐겁다는 듯이 말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병X같이 앉아 있지 말고 따라와.”
그리고 천운이 말한 마지막 말에 의철의 동공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네 말대로 그 녀석이 돌아오고 싶다면 돌아올 수 있겠지. 명색에 신이라는 놈인데.”
“방법이…… 있다고?”
“그래.”
천운이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 * *
삑- 삑- 삑-
“으…….”
정원의 눈이 살며시 떠진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정원의 눈이 떠졌다.
정원은 익숙하게 손을 내밀며 알람을 끈 뒤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커튼 사이의 밝은 빛이 방 안을 내비친다.
“몇 시지?”
정원이 근처 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한다.
14시
정오가 넘은 것을 확인한 정원이 몸을 일으켰다.
“끄으윽! 하암~.”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자연스럽게 컴퓨터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잠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소설을 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괜스레 컴퓨터를 켜기 싫었다.
어제의 250화 때문이었다.
“하…….”
잠깐 멍하니 컴퓨터 전원 버튼을 바라보던 정원이었다.
‘뭐 별수 있나?’
버튼을 누른 정원은 컴퓨터가 켜질 때까지 멍하게 기다렸다.
그 잠깐 사이에 온갖 고민이 들었다.
뭐, 다음 내용을 포함한 이 터진 사태를 잠재울 방법을 말이다.
“쩝.”
뭐, 생각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냥 사죄하고 수정 작업에 들어가는 수밖에.
그렇게 멍하게 작업 파일을 연 이정원은.
“응?”
순간 눈이 좁혀졌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게 멍하니 파일을 보다 그다음에는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다름 아니라 파일 제목이 심상치 않았다.
‘350화 에필로그’라고 적힌 파일의 제목이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정원은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 이내 251화 파일을 열었다.
쓴 기억도 없는데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천운이 죽은 이후에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난 이 내용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어?”
그리고 다음은 252화 253화 254화.
다음 내용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을 나는 차분히 읽어나갔다.
그리고 희미하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나?
기억은 하고 있다.
내가 소설에 들어간 3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하……. 꿈이 아니었구나.”
나는 멍한 얼굴이 되어 천장을 바라봤다.
언제나 잠에서 일어나면 익숙하게 보이던 천장이 낯설어 보였다.
“아.”
내 시선이 다시 모니터를 향한다.
마우스 휠을 내리며 다시 글이 써진 파일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이 글을 누가 쓴 것인지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형편없이 못 쓴 내용이지만 그 이야기의 주연이 ‘나’였기에 미소가 흐른다.
“재밌네.”
드륵- 드르륵-
스크롤을 내리는 속도가 계속 이어진다.
270화 290화 300화 천천히 350화를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누가 쓴지 모를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여유와 평온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349화.
나는 스크롤을 내려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다.
“…….”
천천히 글을 읽을수록……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원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 간다.
“너희들은…….”
어둡고 무거운 글의 내용.
아이들이 절망과 본심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미래였다.
3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니.
“하…….”
정신이 멍해졌다.
순간, 이 선택지에 후회가 생겨났다.
너무도 빨리 헤어진 것은 아닌가…… 조금도 머물러도 되지 않았느냐 같은.
그러나 만약 조금 더 오래 있었다면 아마 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이곳에서 아직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 남아 있으니까.
내 가족이 남아 있다.
정 때문에 이곳을 버릴 수는 없었다.
“…….”
내 몸에 점점 힘이 빠진다.
이 글이 혼란스럽게 머리를 뒤흔든다.
결국 후회라는 감정이 서서히 물들어 간다.
아이들의 심정이 쓰여 있는 글을 읽었다.
지금의 나 또한 아이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돌아가고 싶다…….”
라는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돌아가서 만족할 정도로 그들과 보내고 다시 이 세계로 넘어오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겼고 허망한 꿈으로 자리 잡는다.
드르륵-
마우스 휠을 내렸고 스크롤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문장이 끝난 것이다.
나는 마지막 화.
350화의 파일을 열었다.
눈에 보인 것은 백지였다.
글 하나 안 보이는 새하얀 백지 파일이었다.
“…….”
마지막 에필로그라고 적힌 파일의 내용은 빈 백지였다.
온통 새하얀, 글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백지.
그 순간 갑자기.
글이 쓰이기 시작했다.
문장이 저절로 쓰이고 나는 그 문장의 주인이 누군지 알 거 같았다.
-네 말대로 그 녀석이 돌아오고 싶다면 돌아올 수 있겠지. 명색이 신이라는 놈인데.
-방법이…… 있다고?
김천운과 김의철.
그 두 녀석의 대화였다.
-그래, 그 녀석이-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다음을 기다렸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돌아갈 방법…….”
이 소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돌아가는 방법…….
만약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방법이 맞다면.
덜덜 떨리는 내 손이 키보드를 향한다.
만약 그게 다시 가능하다면…….
“아…….”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다고.
“하하, 그렇네…….”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굳이 김천운 그 녀석의 다음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방법을 이해하고 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은 내가 유일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내가 해야 할 행동은 간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이곳에서 여한이 없는 삶을 보낸 이후로도 충분하니.
* * *
3년 뒤.
추운 겨울이었다.
추운 겨울바람과 새하얀 눈이 뒤덮인 하늘이었다.
새하얀 눈이 지면에 쌓이고 그 거리를 사박- 소리를 내며 걷는 소녀가 있었다.
“오늘도 시작해 볼까?”
한설아는 몸을 펴며 자세를 잡았다.
오전 6시에 기상하여 시작하는 아침 구보는 일상 중 하나였다.
민아 언니의 집을 시작으로 개천산을 향해 달린다.
“춥네…….”
입으로부터 입김이 흘러나온다.
오늘은 생각보다 추운 겨울이었다.
몸을 튼튼히 유지하고자 마력을 계속 돌렸음에도 추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우웅-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개천산의 정상은 더욱 추웠다.
예전에는 저 바위 위에 앉아 명상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들고 온 핫초코를 따라 마실 뿐이었다.
“맛있다.”
한설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후릅- 하…….”
한설아는 잠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바라봤다.
고요하고 조용하며 산의 정상.
그곳에서 바라보는 설산의 풍경은 경이롭게 예뻤다.
잠시 10분 정도 그 풍경을 구경하던 한설아는.
“이제 갈까?”
자리에서 일어나 하산을 시작했다.
개천산을 내려오는 와중 눈이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산에서 내려와 한설아는 다시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출근하고 차가 경적을 울리며 아이들이 출근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한설아는 구보를 이어 나갔고, 몇 분 후 언니의 집 앞 가까이에 도착한 한설아였다.
“어?”
그리고 한 남자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검은색 저지를 입은 남자였다.
그가 멍하니 언니의 대문을 바라보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누구세요.”
한설아의 목소리에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오랜만이네.”
“네?”
한설아가 눈을 좁힌 채 남자를 노려봤다.
따뜻한 미소를 품은 남자가 한설아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 누구신데 아는…….”
한설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다가올수록 좁혀진 한설아의 눈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입이 천천히 벌어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
손에 들려진 고급 초콜릿 상자.
익숙하지만 조금 달라진 얼굴.
그럼에도 그가 누군지 한설아는 알 수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든다.
목이 콱 막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흑, 너무 늦었잖아.”
한설아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는다.
그 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 바보야.”
한설아는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서 와.”
휘몰아치던 추운 바람이 멈추고 떨어지던 새하얀 눈이 그쳤다.
정원은 그런 한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