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154
샌디의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샌디가 보여 주고자 했던 천운의 일생의 기억들이.
그러나 난 그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샌디.”
난 샌디를 불렀다.
“전부 보여 줘.”
[…….]
“괜찮아.”
오직 끔찍했던 과거들만 뺀 기억들.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한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전부 보여 줘.”
나는 샌디에게 말했다.
* * *
첫 번째 회귀에서 천운의 죽음을 보았다.
그것이 두 번째가 되고 세 번째 네 번째 무수한 죽음이 반복된다.
그 일생의 기억들 전부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온다.
“그렇네.”
그 상황에서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오직 불행만이 가득한 기억은 아니었으니.
“미르마가 라면을 좋아하긴 하지.”
과거의 김천운은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회귀를 반복하며 미르마를 만나고 라면을 건네며 술식을 얻는다.
각 회귀차 때마다 다른 마법을 부탁했으니 어쩌면 현자의 경지에 가장 가까웠을 수도 있었다.
“이런 것도 있네.”
나는 그저 들어오는 기억들을 조용히 떠올리고 있었다.
무수한 한 소년의 일생.
그 전부를 보는 것은 시간이 걸릴 테니.
과거 운만 좋고 겁이 많던 소년이 회귀를 거듭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여러 번의 불행이 겹쳐 이제는 익숙해져 가는 천운을 지켜봤다.
그저 행운 자체가 김천운 외에는 아무도 필요 없다는 듯이 내쳐 버리는 잔혹한 기억을 바라봤다.
소년은 죽어도 살아남는다.
회귀라는 알 수 없는 능력으로 인해 행운은 이제 천운의 죽음을 죽음이라 인식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넘나들며 계속해서 지켜본 순간.
“마지막이구나…….”
샌디가 진정 보여 주고자 했던 기억.
김천운의 마지막이 보였다.
김천운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네.
몇 회차를 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천운의 감정.
천운의 눈빛에 이채가 돌아왔다.
눈앞에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고 곧 천운은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녀석에게 말했다.
-왜…… 이딴 거지 같은 세계를 만든 거야?
빛나는 무언가의 뒤에 문이 있었다.
천운은 그 문을 향해 다가갔다.
곧 녀석의 손을 뻗어 천운의 앞길을 막았다.
-저 문 너머에 있는 거지?
천운은 물었고 여전히 녀석의 대답은 없었다.
-비켜.
낮게 가라앉은 서늘한 목소리.
크게 떠진 눈이 분노에 차올랐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천운은 마력을 터트렸다.
몇백 회차를 거듭한 소년의 마력은 이미 한계를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손에서 기다란 빛의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천운의 등 뒤에서 샌디가 파도처럼 솟아올랐고 곧 녀석과 대치할 순간.
“…….”
기억이 끊겼다.
샌디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그다음은 샌디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천운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거대한 태풍을 일으키는 샌디를 바라봤다.
“고마워.”
몇백 번의 김천운의 죽음에 샌디는 항상 함께 있었으니.
나는 그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 모든 원인이 나였으니.
치지직-
그 순간.
샌디의 마지막 기억이 재생됐다.
‘여긴…….’
천운은 이 장소가 익숙했다.
가장 처음 이세계에 들어오고 갔던 던전.
무형의 동굴이었다.
입구 앞에 서 있던 천운은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샌디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겠어.”
그 말과 동시에 휘몰아치던 돌풍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샌디의 모래 알갱이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것은 평소의 샌디로 돌아왔다.
나는 샌디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ㅇ?]
“이제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김천운의 죽음은 이번 회차가 마지막일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다.
* * *
“그럼…… 일단 대화가 통하니 물어보겠습니다만.”
[뭐지?]
최아진, 강화두 그리고 분화구 안에 있던 검정색의 모래는 최아진이 만든 염력의 벽을 타고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최아진은 혹시 모를 불안으로 모래에게 물었다.
“분화구 안에 당신 말고 다른 존재는 없었습니까?”
[있었다. 누군가 데려갔지만.]
“데려갔다고요?”
[그래. 누군가 그놈이 누워 있던 바닥에 거대한 게이트를 열었더군.]
“게이트라면…… 설마…….”
최아진은 혹시나 하는 짐작이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천왕의 위치를.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면 상태의 녀석을 그 녀석들이 게이트를 이용해 어딘가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런 미친 짓을…….”
할 놈들이긴 하다.
애초에 그들의 목적이 마기와 마인들을 퍼트리는 것이니.
“상황이 변했다. 화두야.”
“예, 예?”
“일단 대장하고 합류하자.”
나는 것을 멈춘 최아진이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연결했다.
받은 것은 크롬벨이었다.
“크롬벨 급합니다. 대장이 있는 위치로 게이트를 열어 주실 수 있습니까?”
-안 돼. 여기도 위험해.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최아진의 귓가로 전해져 왔다.
그 순간 찢어지는 듯한 새의 포효가 들려왔다.
“설마…….”
안 좋은 예감이 적중했다.
“크롬벨! 그럼 대장을 그쪽으로 부르세요. 저희도 금방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상황을 금방 이해한 최아진이 급하게 방향을 꺾어 한국으로 향했다.
최아진의 염력이 속도를 높였다.
“모래 씨. 일단 나중에 가죠. 지금 더 급한 곳이 생겼으니.”
[……알겠다.]
모래는 그저 수긍했다.
아니,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왜인지 그 한국이라는 곳으로 갈수록 그녀와의 연결이 더욱 강해지니.
* * *
“검은 거인이…….”
한우성은 생각했다.
자신의 삶 중에 이토록 허무하고 놀라운 광경이 또 있을까.
“사라졌어…….”
그토록 원망하고 없애고 싶던 그 검은 거인이…….
그저 조용히 사라졌다.
어느 한 소년에 의해.
“하하, 하하하!”
그 허무함과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가장 바라던 광경이 어처구니없이 일어났으니.
“그런가…… 사라진 건가.”
지왕이 찢어발기던 그 검은 거인이.
세계를 흡수하여 여러 번 멸망시킨 검은 거인이 사라졌다.
그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한 소년이 보였다.
자신의 오랜 숙원을 그저 손쉽게 해치운 녀석이.
“김천운.”
“네…….”
“정말…….”
뭐라 말해야 할까?
막상 하려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우성은 그저 멍하니 천운을 바라봤다.
고맙다는 낯간지러운 말보다는 황당함이 앞섰으니.
“너무 빠르잖냐…….”
“그러게요.”
“당돌한 녀석.”
후우웅-
그때였다.
말이 끝난 동시에 한우성과 천운을 갈라놓는 게이트가 열린 것은.
“뭐지?”
그 익숙한 마력에 게이트의 주인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크롬벨인가?”
-대장!
게이트 너머 크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위험해 빨리!
“뭐?”
쿠쿵! 쾅!
게이트 너머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거대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한우성의 옆에 있던 카스퍼와 제니퍼가 말했다.
“한국은 충분히 대비해 놨다고 하지 않았나? 한우성.”
“그래. 근데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그런가…….”
카스퍼는 주위를 들러보았다.
마력이 탕진하여 쓰러진 몇 명이 보이긴 했으나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충분했다.
“제니퍼. 움직일 수 있는 길드원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겠다.”
“나도 가겠어.”
“아니, 넌 이곳에 남아. 숲이 사라졌다 해도 마경이다. 그 한복판에 부상자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잖아.”
“으…… 알겠어.”
“한우성. 얼른 가지.”
“알겠다.”
한우성은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김천운.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이곳에서 쉬어라.”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거죠?”
“그래…….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많을수록 좋을 거예요.”
해왕의 능력 중 하나는 바다의 마수들을 조종시킨다.
아무리 한우성이라도 그 물량을 전부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데려가는 게 좋아요.”
“알겠다……. 쟤들도 말이냐?”
한우성이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선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가만히 대답 없이 의철을 지켜볼 때 의철이 다가와 말했다.
“아직 괜찮아요. 갈게요.”
“정말 괜찮냐?”
한우성이 물었다.
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뒤에서 쉬고 있던 아이들이 일어나 의철에게 다가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요.”
“아직 마력이 남아 있어요.”
그 장면을 보며 천운은 무언가…… 아이들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가…….’
김천운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죽이지 않았다면 앞으로의 이야기의 흐름은 이렇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 * *
“어떻게 저럴 수가…….”
한민아의 눈앞.
바다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와 하늘의 뜨거운 열을 내뿜는 거대한 새가 보였다.
“마수왕 두 마리라니…….”
해왕 혼자라면 한국의 길드와 영웅들이 힘을 모아 어떻게 막을 수는 있었으나 천왕이 이곳에 등장했다.
나타날 리 없는 녀석의 등장이 절망을 안겨 줬다.
후우웅-
쿠쿠쿠쿵!
콰쾅!!
천왕의 날갯짓 한 번이 주위의 건물을 반파시킨다.
뒤를 돌아본 한민아의 눈에는 무너져 가는 건물들이 수두룩했다.
“크윽!”
한민아는 입술을 깨물고 곧장 모든 마력을 발산하여 한곳에 끌어모았다.
끌어모아진 마력이 곧 검은 태양으로 돌변했고 곧 검은 태양은 저 하늘에 고고하게 날갯짓하는 천왕에게 향했다.
팔락- 한 번의 날갯짓으로 검은 태양의 불이 꺼졌다.
천왕의 시선이 태양이 날아온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유인할게.”
한민아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해왕과 천왕을 떨어트려 놔야 한다.
“네? 하지만.”
“곧 다른 장로들도 이쪽에 올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하, 하지만!”
“한아.”
한민아가 이한을 향해 말했다.
그 뚜렷한 눈에 이한은 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탁해……. 크롬벨!”
다정히 미소 지은 그녀가 곧장 어딘가를 향해 달렸다.
크롬벨은 그녀의 앞에 게이트를 열었고 어느 고층 건물 위로 넘어온 그녀가 다시 한번 태양을 만들어 천왕에게 날렸다.
곧이어 천왕이 울부짖었다.
분노한 천왕이 도망치는 한민아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언니…….”
그때 떨리는 목소리로 이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해왕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거대한 그림자 주변에 검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수한 마기들이 요동치며 마력과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 검은 점들 하나하나가 해수면 위로 올라오려는 마수들인 것이 분명했다.
“너무 많아…….”
암 가문의 전투 아베타를 전부 불러도 막지 못할 물량이었다.
적어도 한국의 길드들 전부가 힘을 합쳐야 막을까 말까 하는 물량.
그 순간.
이한의 앞에 게이트 하나가 열리는 동시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