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150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 숲 형태의 마경은 녀석의 첫 번째 발걸음으로 모든 나무와 풀이 충격파에 휩쓸려 아스러지고 사라져 황무지로 변할 테니.
천운이 생각한 것은 그 충격의 최소화다.
물리 공격이 안 통하는 샌디라면 녀석의 첫 번째 공격은 한번은 버틸 수 있을 테니.
후우우웅!
짓누르는 듯한 거대한 폭풍이 쇄도한다.
녀석의 앞발이 천천히 지면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며 나는 녀석의 발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게 멸망의 단초다.”
“알고 있어요.”
“저걸 막을 생각이냐?”
천운은 한우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걸 막을 방법은 없을 거예요.”
“그럼?”
“최소화라도 시켜야죠.”
드리우는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진다.
나는 저것이라도 최소화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 방법을 선택했다.
녀석의 앞발이 마경을 넘은 일부까지 영향을 끼쳐 영역을 넓힐 테니.
“샌디야.”
여전히 대답 없는 샌디.
샌디는 그저 고고히 몸을 키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런 샌디에게 천운은 당부했다.
“저걸 막을 생각은 하지 마. 그냥 녀석의 앞발이 닿는 순간 몸에 마력을 터트려.”
샌디의 몸 자체를 단단히 해놓은 상태는 아니다.
그저 스펀지 같은 형태로 녀석의 앞발에 짓밟힌 순간 몸에 내재된 마력이 녀석의 마기 일부를 무마시킬 것이다.
“내 일부를 넣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어.”
“부탁해.”
샌디와 한우성이 게이트를 통해 사라졌다.
그저 휘몰아치는 폭풍만이 적막을 대신했다.
그리고.
-지왕…….
번뜩 떠진 샌디의 눈.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샌디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샌디의 눈이 지왕의 앞발을 향했다.
* * *
“헉!”
[무슨 일이니?]
메리헨이 화들짝 놀라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있어요.”
[응? 뭐가?]
“샌디가요.”
바라본 방향은 지왕의 고고하게 선 마경 숲 중심.
[설마…… 저기 말이야?]
“아니에요. 뭔가…… 마치 땅 밑에 있는 거 같아요.”
[허…….]
“다행이다.”
메리헨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아이들한테 가자.]
“아, 네……. 근데 저는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데.”
[괜찮아. 내가 이미 찾았으니까.]
많은 인파에 비해 아이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어른밖에 없는 인파 사이에서 아이들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르마는 곧장 아이들에게 향했다.
아이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팔스 길드원에게 구조받고 있을 뿐이었다.
“어, 어 잠깐 여기 아이가 한 명 더 있어!”
“아니, 대체 무슨 얘들은 왜 이동이 안 된 거야?”
던전이 사라지고 그 던전이 있던 자리에 아이들 4명이 허망한 얼굴로 나타났다.
팔스 길드원들은 곧장 구조를 시작했고 동시에 지왕의 움직임이 보인 순간이었다.
“이런……. 전부! 실드 준비!”
성녀의 예언 중 하나.
지왕이 앞발을 위로 들어 올렸을 때 대피 또는 방벽을 전개해 그 충격파를 막아라.
녀석의 움직임이 마경 전체를 반파시키는 충격파로 이어지니.
‘크윽!’
카스퍼는 어느 한 기억이 떠올랐다.
성녀가 말했던 예언 중 또 하나.
자신에 질문에 대답한 성녀가 한 말.
그것은 저 충격파 자체가 사람의 힘으로 막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운아! 아이들을 찾았다!]
‘그쪽으로 갈게요.’
곧 미르마의 앞에 천운과 한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카스퍼의 눈에 비친 한 가지.
바로 천운과 한우성이 넘어온 게이트였다.
“한우성!”
“뭐지 카스퍼?”
“이곳을 벗어나야 해! 빨리 게이트를!”
그 말에 한우성은 고개를 저었다.
“내 능력도 아니고 이 많은 인원으로는 못 벗어난다.”
“그래도 살릴 수 있는 인원은 살려야 해!”
“하…… 김천운.”
“네.”
“가능하냐?”
한우성이 물었다.
당연히 천운의 대답은 뻔했다.
“아니요. 입구가 작아서 불가능하죠.”
“이, 이 아이가…… 그럼 한우성. 네 능력으로 많은 인원을 공중에 띄우는 건 불가능하나?”
“불가능하다. 이미 녀석의 충격파 범위를 피하기에는 늦었어.”
“크윽!”
카스퍼는 이를 꽉 다물며 자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무엇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포함한 길드원들이 죽을 테니.
“제니퍼.”
-무슨 일이야?
“길드를 부탁한다.”
-?! 뭔 소리야 일단 도착했으니까 코앞에서 말해.
“뭐, 뭐?! 아니 여길 왜 찾아온 거야?!”
곧이어 헬기를 타고 찾아온 제니퍼가 보였다.
카스퍼는 그런 제니퍼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런…….”
“무슨 상황이야……? 헉! 한우성 영웅님!”
제니퍼가 화들짝 놀라며 한우성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볼이 발그레해지며 붉게 물들었다.
“아는 사이예요?”
“모른다.”
나는 그게 궁금하여 물어봤고 한우성은 단답으로 대답했다.
“조, 존경합니다 한우성 영웅님…… 응 잠깐?”
막상 떨리는 목소리로 발그레하던 제니퍼가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고는 어느 소년의 앞에 멈췄다.
“너…….”
지그시 올려다보는 제니퍼.
나는 그럼 제니퍼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니퍼 씨.”
“나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가! 뒈지고 싶어서 어딜 던전에서 꼴값을 떨어.”
제니퍼는 천운을 보는 순간 익숙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마력이 던전 속 녀석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고.
“제니퍼 씨도 던전 안에서랑 크게 다를 건 없네요.”
“뭐, 뭐? 이 미친놈이!”
“자, 잠깐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저 멀리 지왕의 앞발이 지면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 거기 소년 부탁 하나만 하지. 이 녀석하고 저 아이들을 데리고 대피해 줄 수 있겠나?”
“뭐, 뭔 X! 뭔 소리야? 어딜 가라 마라야 카스퍼.”
카스퍼가 고개를 푹 숙이며 물었다.
막상 제니퍼는 땍땍거리기 바빴지만, 확실히 10명 정도면 지왕의 충격파가 오기 전 대피시킬 수 있겠으나 천운에게는 이미 생각해 놓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여기 모두가 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천운이 말했다.
그 말에 카스퍼의 눈이 희번덕 떠졌다.
“애초에 그 방법이 있으니 여기에 왔겠지.”
“네.”
“저, 저기 무슨 상황인데…… 요?”
제니퍼가 한우성에게 물었다.
한우성은 그저 말없이 지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니퍼의 시선 또한 한우성을 뒤따랐고 곧이어 상황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미친.”
“한국말을 의외로 잘하는군.”
“아, 그게 네.”
제니퍼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그때 천운이 말했다.
“일단 작전을 설명할게요.”
천운은 모여 있는 그들에게 작전을 설명했고 동시에 카스퍼와 제니퍼의 눈이 크게 떠지며 구조를 받고 있는 한 소년에게 휙 고개를 돌려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능하겠어.”
* * *
“야, 일어나.”
천운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의철에게 다가갔다.
천운의 눈앞에 김의철은 상상 이상으로 상태가 심각했다.
퀭한 눈과 기력을 잃은 듯한 몸.
녀석의 상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천운아.”
그런 의철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혹시 기억하고 있어?”
“뭘?”
“…….”
의철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 허망한 과거가 머릿속에 반복된다.
무엇도 하지 못한 채 천운의 죽음을 바라봤다.
그것이 다시 재생되기를 반복한 순간.
천운이 말했다.
“좀 도와줘라.”
“…….”
“우리 이대로 있으면 전부 죽을 거 같거든.”
의철이 고개를 들었다.
크오오오오⎯⎯⎯⎯⎯⎯!
그 순간 울리는 지왕의 포효.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생각은 없었다.
의철은 그저 또다시 눈앞의 천운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섰다.
천운이 말했다.
“나는 또 죽기 싫거든.”
천운은 바로 다음 미래를 알고 있었다.
이번 녀석의 공격에 천운은 죽는다.
“알겠어.”
의철은 의지를 굳게 다졌다.
지금 그 고뇌를 반복해 봤자 바뀌는 건 없을 거다.
* * *
“전원! 준비됐나!”
카스퍼가 말했다.
동시에 마법을 쓸 수 있는 길드원 일제가 방벽을 구사했다.
사람 몇백 명은 가릴 수 있는 방벽이 대각선으로 세워졌고 그 앞에 천운과 의철이 섰다.
“원형으로 말고 녀석의 충격 여파가 오는 방향으로 전개하세요.”
충격 여파를 막기 위해서는 한 방향으로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좌우로 날아오는 여파의 파편은 다른 검과 방패를 든 아베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미르마’
[알겠다.]
미르마가 전개된 방벽의 술식에 손짓을 하며 수정, 보완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방벽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며 동시에 누군가의 특성과 마력 또한 추가가 가능할 테니.
“제니퍼 씨!”
“아, 알겠다고!”
제니퍼의 고유 스킬 확장을 발동해 길드원의 방벽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동시에 몇몇 남은 길드원들이 천운에게 다가가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나도 몰라. 근데 저 녀석은 가능하더라고?”
마력에는 특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 특성은 다양하며 다른 것에 섞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데 눈앞의 소년의 몸에 거부감 없이 주입되는 광경은 카스퍼와 제니퍼를 놀라게 만들었다.
녀석은 모든 다양한 특성의 마력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소년의 마력 특성이 대체 뭐지?”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천운의 마력 특성 ‘흡수’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본래 흡수 자체가 마력이 아닌 특성을 흡수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흡수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마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마력과 동시에 특성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천운은 다시 마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야. 얘들아.”
천운은 남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 아이들 또한 표정이 안 좋았다.
한설아, 윤시혁, 질 로벤.
천운의 부름에 아이들이 천운을 바라봤다.
“좀 도와줘.”
“으응.”
“……알겠다.”
“…….”
아이들이 대답했고 질 로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 세 명의 마력이 주입됐다.
천운 또한 마력 내포할 수 있는 한계가 있으니 곧바로 그 마력을 전개된 방벽에 주입했다.
전개된 방벽에 영롱한 빛이 띠기 시작했다.
무지개색의 방벽이 빛을 뿜었고 그 순간 천운은 의철에게 말했다.
“준비됐지?”
“그래.”
팔테인을 든 의철이 말했다.
천운의 마력 특성 반마로도 녀석의 마기 충격파를 전부 막을 수는 없을 거다.
그렇기에 마기와 천적과도 같은 힘.
녀석의 검이 가장 크게 빛을 발할 거다.
“대체 저 소년은 정체가 뭡니까?”
카스퍼와 제니퍼가 한우성에게 물었다.
그 옆에 있던 제니퍼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나도 정확히 모른다.”
천운의 정체에 대해 자신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갈수록 녀석에 대해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단 우리 친목회의 6번째 단원이다.”
“엑, 네?”
그 말과 동시에 제니퍼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경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