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145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뭘 숨기고 있지?”
녀석은 계약 조항 중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
녀석은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했다.
그 조용한 정적이 흐른 후.
던전의 이지는 의문스럽게 천운에게 물었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나?}
“잃었어. 근데 이상하잖아.”
영혼을 담보로 한 계약이다.
그런 계약을 김천운이 이유 없이 했을 리는 없었다.
“내 메리트는?”
나는 소설 속 김천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녀석의 성격과 행동, 신념.
가끔 멍청한 짓을 하는 녀석이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아낀다.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은 자신에게 메리트도 없는 계약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기억이 있는 건가?}
“아니. 내가 이런 메리트 따위 없는 계약을 맺었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
던전의 이지는 솔직하게 사실을 말했다.
녀석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큰 변화가 없으니 녀석의 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뭔데?”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
“소원?”
{그래.}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녀석의 소원이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영향이 미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큰 메리트는 없어 보였다.
“이 던전 내부에서만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지.”
{그렇다. 이 공간 자체가 나의 영역이니.}
애초에 녀석의 소원 자체는 이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
하지만 한 가지.
소원을 듣기 전 궁금한 점이 있었다.
“3층은 뭐지?”
{무슨 말이냐.}
“네가 만든 환상이야?”
천운은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틀렸다.}
녀석은 이 한마디만을 전했다.
그것만으로 천운은 여러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지. 3층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다시 열 수 있어?”
그렇기에 천운은 가능성 있는 질문은 던졌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불가하다.}
“……왜지?”
{네놈이 미래를 바꿔 놨기 때문이다.}
이자는 분명 말했다.
그 세계의 미래를 바꿔 놨다고.
그렇기에 천운과 미르마의 예상이 점점 현실로 드러났다.
“미래를 바꿔?”
{네놈은 3층의 보상으로 성녀를 데려왔다.}
“그래. 그게 왜?”
{그것으로 인해 미래는 크게 변했다.}
화아아악-
짙은 어둠만이 존재하던 공간이 화악- 개이기 시작했다.
넓은 하늘과 그 성 아래의 거대한 나라.
천운의 발아래에 그것이 영상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가장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3개의 나라.
카릴, 힐리아, 자이럼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아라.}
녀석은 그 3개의 나라 중 힐리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이 좁혀지는 힐리아 신성국.
그곳에 성이 보였고 그곳에서 더욱 좁혀져 어느새 성녀가 존재해 있던 그 돔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본래의 미래다.}
천운의 눈이 그 유리 돔을 향했고 그 유리 돔의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성녀 메리헨.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하얀 소복이 피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백색의 모래였다.
-고맙다.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
천운은 그곳을 향해 바라봤다.
바르부스.
힐리아 신성국의 교황이 세검 한 자루를 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세검의 칼날에서는 피가 뚝뚝 지면에 떨어지고 있었다.
-네 능력 그 녀석을 봉인할 방법을 찾아냈다.
교황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진득한 미소를 바라보던 백색의 모래가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냐.]
-?! 말을 할 수 있었나?
[어째서 그녀를 죽였나?]
모래는 물었다.
교황은 그 모습이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당연히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제는 신성력이 없는 그녀는 재앙 그 자체다.
[그게 이유인가?]
-그래. 그것 말고는 뭐가 더 있겠나?
[…….]
샌디는 잠시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지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름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감정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그녀를.
그녀의 처음을 떠올렸고 지금의 마지막을 직시했다.
[메리헨.]
모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왜인지.
가슴속에 무언가가 터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을 분출하고 싶었다.
스으윽-
그녀의 피가 백색이었던 자신의 몸에 번져 나가기 시작한다.
순수했던 흰색은 어느새 진한 핏빛으로 그리고 짙은 검은색으로 변질된다.
그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바르부스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교황 바르부스.]
샌디는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잠시 억누른 채 교황에게 물었다.
[후회는 없나?]
-후, 후회라고? 미물 따위가 누구에게
[그렇다. 난 미물이기에 행하는 행동에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묻겠다.]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감정이었으니.
[네놈의 행동에 후회는 없나?]
마지막 물음이었다.
교황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큰소리로 모래에게 소리쳤다.
-없다!! 내 행동에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알겠다.]
쿠쿠쿠쿠쿵!!
유리 돔 전체가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
지면이 흔들리며 유리 돔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 원흉의 중심.
샌디는 그저 자신이 억눌러 왔던 ‘감정’ 중 하나를 마음껏 분출했다.
사아아악-
샌디의 몸이 어느샌가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모래의 쓰나미가 유리 돔 전체에 번져 나간다.
-으, 으아! 으아아악!!
그것에 휩쓸린 바르부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에 멈추지 않고 샌디는 계속해서 몸을 부풀렸다.
이 ‘분노’라는 감정을 마음껏 분출하기 위해.
“이건…….”
녀석이 보여 준 본래의 미래는 거기서 끝이었다.
{이게 본래의 미래다.}
던전의 이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놈은 그 미래를 바꿨다.}
“…….”
{미래를 바꿨기에 내가 억지로 안 보내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못 보내는 것이다.}
녀석은 그리 단언했다.
그 말은 곧 백색의 샌디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
결국 천운은 녀석의 말을 수긍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하나 질문하겠어. 너는 이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해.”
{그게 부탁인가?}
“그래.”
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의 이지가 말했다.
{그 말은 곧 계약을 맺겠다는 말이겠지?}
“그래.”
{……알겠다. 질문해라. 네가 궁금한 것이 뭐냐?}
천운은 잠시 눈을 감았다.
과거의 녀석을 구원해 줄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차선책으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 모래는 지금 어디에 있지?”
* * *
“어디지?”
“저기로 갔다.”
현재는 250회 차를 넘어 255회 차.
방법을 강구하던 아이들은 일단 둘로 나누어 한 팀은 그 절망이 일어난 예의의 장소를 조사, 다른 한 팀은 이제 그곳을 찾지 않은 천운을 뒤쫓아 조사하는 방법은 선택했다.
김의철과 질 로벤은 장소의 조사.
윤시혁과 한설아는 어딘가로 향하는 천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놈은 대체 어딜 가는 거지?”
“……어 그러니까.”
“뭔가 알겠나?”
“응.”
한설아는 짐작 천운이 어딜 가는지 알 거 같았다.
천운이 향하는 방향은 익숙했으니.
‘개천산?’
천운이 향하는 장소는 바로 과거 천운과 처음 만났던 장소 개천산이었다.
한설아와 윤시혁은 급하게 천운의 뒤를 쫓았다.
개천산을 오르던 천운.
한설아와 윤시혁 또한 천운을 뒤따라 개천산에 올랐다.
그러나 천운이 향한 곳은 산의 정상이 아니었다.
‘여긴…….’
던전.
개천산에 위치한 던전 ‘무형의 동굴’이었다.
천운은 망설임 없이 그 던전을 향해 들어갔다.
“녀석이 왜 이곳을 찾았지?”
“모르겠어. 그치만…….”
한설아는 알고 있었다.
이 장소가 천운의 유물 샌디를 발견한 장소라는 것을.
천운은 어디선가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달려드는 고블린을 익숙하게 베어 내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몸놀림은 수준 높은 기술이었으며 천운은 스탯의 힘없이 그저 고블린을 베어 내고 마지막 보스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천운은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예의의 보스 마물.
레트아몽의 서식지였다.
역시나 보스 방에 들어오자마자 레트아몽은 모습을 숨기고 과거의 환각을 펼치기 시작했다.
-끼익- 끼이익?
한데 녀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소년의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토대로 상상을 보여 주려 했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끼익! 끼이이익! 끼아악!!
녀석은 고통스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레트아몽의 머릿속에 수많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자신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절망의 과거가 해일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끝이 없는 기억들은 무엇도 재현하지 못하고.
그거 레트아몽은 짙은 어둠만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천운은 그런 레트아몽의 모습이 보였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빨리 뒈져라. 시간 없으니까.”
천운은 그리 녀석을 뇌까렸고 동시에 어두운 공간에 서서히 개이기 시작했다.
“빨리도 뒈지네.”
천운은 그리 말하며 눈앞의 제단으로 향했다.
“일어나 샌디.”
천운은 곧 마력을 주입했고 곧이어 샌디가 일어나 천운을 반겼다.
[ㅊㅇ!]
“그래. 급하니까 빨리 내려가자.”
천운의 말에 어느 순간 한 가지가 기억나는 한설아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 던전은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존재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 난이도는 높아지는 지하 형태의 던전.
한설아는 그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따라가 보자.”
“알겠다.”
한설아는 천운을 계속해서 뒤따랐다.
첫 지하 1층은 골렘의 서식지였으며 지하 2층은 요정의 숲이었고 3층의 서식지는 악어형 마물이 존재하는 늪의 공간이었다.
어느 정도 높은 위험도를 자랑하는 마물이었으나 천운은 그 몸놀림과 반사 신경 기술로만 그 모든 층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경이롭고 기이할 지경이었으며 윤시혁은 어느새 믿기지 않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천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어떻게…….”
그리고 마지막.
결국 마지막 층에 도착한 천운은 문을 열었고.
그 순간, 공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리셋 현상의 시작이었다.
“아, 안 돼!”
마지막 천운이 그 마지막 층에 무엇을 찾으려고 그곳을 찾아간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설아는 애써 달려가 천운보다 먼저 그 보스 방의 무언가를 보려 했지만 결국 공간 자체가 암전되며 리셋이 시작됐다.
쿠쿠쿠쿠쿵!!
흔들리는 지면과 무너지는 건물.
갈라지는 아스팔트 사이로 무수히 올라오는 마수들.
이 지옥 같은 광경에서 4명의 아이들은 또다시 서로를 마주했다.
“……알아낸 건?”
김의철이 먼저 한설아에게 물었다.
“얘들아.”
한설아는 무언가 알아낸 것이 있었다.
“갈 곳이 있어.”
어느 정도 의심이 가는 장소를 찾았다.
천운 향했던 그 던전.
하지만 이번에는 천운이 그 던전에 가기 전 자신들이 먼저 그곳을 찾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