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144
적막이 가득한 어두운 공간.
게이트를 통해 들어온 공간은 천운의 기억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일어난 현상보다 더욱 천운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왜…….’
어째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살리고 희생을 했는지 말이다.
성녀라면 이해가 됐다.
하지만 백색의 샌디가 자신에게 그럴 이유는 없었다.
천운은 사라져가는 게이트를 향해 급하게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저 작아진 틈새에 녀석이 들어올 수 있도록.
그러나 내뻗은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어째서야…….”
결국 생각으로만 했던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왜 날 구한 거야…….”
가능성이 없는 싸움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가능성을 믿고 싸운 천운이었다.
자신의 자랑 중 하나인 이 행운을 믿고.
그렇기에 녀석의 선택이…….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은 선택이 혼란스러웠다.
“천운아…….”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가장 혼란스러울 인물은 그녀였을 것이다.
뚝- 뚝-
볼을 타고 지면에 떨어지는 눈물.
슬픔에 젖은 표정.
그러나 그녀는 꿋꿋이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 * *
백색의 샌디는 벌어지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경이롭다.’
탐욕스러운 지식의 욕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년의 기술과 판단, 모래의 활용법.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녀석의 모든 것을 관찰하면 자신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런가…….’
나는 분명…… 방금 희열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미르마가 말한 감정.
그래. 이것이 기쁨이라는 감정이었다.
‘성녀!’
모래는 이 흥분의 감정을 알리기 위해 뒤돌아 성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
두려움에 떠는 듯한 불안한 표정.
그녀는 소년을 바라보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
그때였다.
또다시 자신의 몸속 무언가가 끌어 올라오는 것은.
그녀가 슬퍼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메리헨.]
그녀의 새로운 이름.
이제 그녀는 성녀 따위가 아니었다.
‘어? 이건…….’
[네 귀에만 들릴 말이다 메리헨.]
모래는 천천히 그러나 다정하게 그녀에게 전언을 보냈다.
왜인지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녀와 강하게 연결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메리헨.]
모래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소년을 따라가라.]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년을 따라가서 많은 것을 배워라.]
‘샌디야. 무슨 말이야 응?’
메리헨은 왜인지 샌디의 그 한마디 한마디가 불안했다.
메리헨의 떨리는 시선이 샌디를 향했다.
샌디를 바라본 메리헨은 무언가…… 샌디가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짓는 느낌이었다.
[메리헨.]
모래는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결심이 섰다.
자신의 감정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겠노라고.
[내게 지식을 가르쳐 줘서 고맙다.]
후우웅!!
샌디는 몸을 늘려 천운을 낚아챘다.
그대로 그녀들이 있는 방향으로 집어 던지는 동시에 마지막 말을 전했다.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다.]
* * *
“모르겠어요…….”
그녀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가 가르쳐 준 건 없었는데…… 오히려 도움만 받았는데…… 왜 제게 고맙다고 말한 거죠.”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도움만 받은 건 나였는데…….
샌디는 지금까지 보인 적 없던 다정한 말투로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할 거처럼.
“하지만 분명 샌디는 그게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했어요.”
그녀는 샌디의 마지막 말을 떠올랐다.
샌디는 왜인지 알 수 없으나…… 확신을 담은 말을 전했다.
메리헨은 그 말을 믿기로 결심했다.
“천운.”
메리헨은 천운을 불렀다.
“제게 많은 걸 가르쳐 줘요. 그게 샌디의 마지막 부탁이니까요.”
“……알겠어.”
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아닌 천운도 모래에게 빚이 있으니.
[천운아. 3층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미르마가 물었다.
그러나 천운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로 앞에 있었으니.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천운은 확신할 수 없었다.
소설 스토리에서도 4층으로 올라온 의철과 아이들이 다시 3층으로 내려가는 내용은 없었으니.
솔직히 말해 확답은 할 수 없었으나 가능성 또한 없었다.
“일단 여기부터 빠져나가죠.”
천운은 주위를 둘러봤다.
암전된 듯한 어두운 공간.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야는 밝았다.
‘여긴…… 어디지?’
또한 천운이 알기로는 4층 죽음은 이런 공간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정해져 있어야 할 공간이었다.
4층을 제일 먼저 진입한 의철과 관련된 현상이 일어났어야 할 4층은 기이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올라왔나.}
그때였다.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
이 던전의 주인, 이지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너무 늦게 찾아왔군. 김천운.}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다. 너무 늦게 이곳을 찾아왔다 김천운.}
천운은 당황스러웠다.
녀석의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며 동시에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으니.
{약속을 잊은 것이냐?}
던전의 이지가 물었다.
그 말에 더욱 천운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김천운. 네놈은 과거에 나와 계약을 맺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나다 김천운. 너는 과거의 나와 계약을 맺었다.}
“그게 대체…….”
{회귀자 김천운.}
녀석의 울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지의 말.
그 말 한마디가 천운의 심장을 크게 뛰게 만들었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과 이해가 불가능한 대화.
녀석의 마지막 한마디가 천운을 더욱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약속을 이행해라.}
* * *
“약속?”
천운은 물었다.
그 약속이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없나 보군…… 그렇다면 보아라.}
이지는 천운의 눈앞에 계약서와 비슷한 창 하나를 보여 줬다.
그것은 목숨을 건 계약.
천운은 그 계약의 내용을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간단한 계약이었다.
애초에 계약서를 읽어도 그 ‘약속’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하나, 이 ‘약속’은 목숨을 담보로 지킬 것.
하나, 이곳에 다시 찾아왔을 때가 ‘약속’을 이행할 순간일 것.
계약서에 적힌 내용은 이 두 가지뿐이었다.
그렇기에 천운은 다시 물었다.
“약속이 뭐지?”
{……너는 감히 나, 던전의 이지에게 저주를 내렸다.}
“저주라고?”
{그래. 그 끔찍한 회귀의 저주를 말이다.}
천운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녀석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전 회차. 나는 너와 하나의 약속을 맺었다.}
“그게 뭐지?”
{……대답하기 전에}
잠시 말을 멈춘 던전의 이지.
그 순간 메리헨과 미르마의 옆에 게이트가 생겨났으며 그녀들은 블랙홀처럼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라. 4층의 장소로 먼저 보내는 것이니.}
녀석의 말을 들은 천운은 사라지기 전 그녀들에게 말을 전했다.
“먼저 가 있으세요. 금방 올게요.”
[……알겠다.]
“꼭! 꼭! 금방 와야 돼요!”
그녀들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간 뒤.
천운밖에 남지 않은 이곳에서는 잠시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렇기에 천운이 물었다.
“나 혼자 듣는 것도 계약에 포함돼 있나 보네?”
{그렇다.}
“그래? 그럼 이제 말해.”
{너는…… 회귀를 봉인한다고 말했다.}
“봉인?”
{네놈이 회귀하면 나 또한 정신을 이은 채 회귀하게 되지. 네놈이 내린 그 기이한 기운 때문에 말이다.}
이지의 마지막 말은 살짝 분노에 찬 듯한 목소리였다.
또한 녀석의 말에 천운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역시…….’
예전부터 의문이었던 사실.
있을 수 없고 소설 속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상황과 기억들.
그것에 관련된 천운.
그렇기에 알 수 있는 사실.
내가 쓴 소설에서는 김천운은 죽는다.
그러나 천운이 죽은 뒤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이쪽 세계로 넘어와 버렸다.
내가 쓰지 않았다고 이야기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으며, 결국 이어진 이야기의 내용을 이곳에서 알 수 있었던 나였다.
‘김천운은…….’
그 후에 이야기 속 천운은 누군가에게 회귀의 힘을 물려받았다.
그 주인은 내게 절망의 탑으로 가라고 했었고.
{이제 약속을 이행해라 김천운.}
이지가 말했다.
약속.
그 약속이란 천운의 몸에 깃든 회귀의 힘을 봉인하거나 없애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천운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한우성 또한 그 방법을 몰라 회귀를 이어 나갔으니.
“어떻게 이행하라는 거지?”
그렇기에 천운은 물었다.
막상 그 물음에 던전의 이지는 알 수 없는 말투로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것까지 기억을 잃은 것이냐?}
“애초에 방법이 있어?”
{그래. 네놈이 내게 가르쳐졌다.}
이지가 말했다.
그 방법을 내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그러나 당연히 그 나는 이정원이 아닌 소설의 김천운일 것이다.
‘너는…….’
이정원은 생각했다.
과연이 몸의 주인 김천운은 대체 얼마나 회귀를 한 것인지.
어느 정도나 많은 회귀를 겪었길래 회귀의 기운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 던전의 왕이라 불리는 절망의 탑과 동등한 계약을 맺었을지.
그 과정에서 녀석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지.
“이지.”
그렇기에 천운은 물었다.
“나는 몇 번의 회귀를 했지?”
{……세지 않았다. 애초에 세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었으니. 그러나.}
녀석은 말을 이었다.
{적어도 500은 넘었다. 우리 이지에게 시간이란 무의미하나 네놈의 마음대로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치욕적이었다. 그러니 계약을 이행해라.}
“알겠어.”
더는 길게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천운은 일단 그 방법이라는 것을 들어 보기로 했다.
{너와 나의 계약은 영혼의 계약이었다. 그리고 전 회차에서 한 계약이 다음 회차에서도 이어지는 것을 알아낸 너는 회귀란 몸의 역행이 아닌 영혼의 역행이라는 것을 알아냈지. 너는 그 가능성을 찾아낸 순간 너는 방법을 찾아냈지. 방법은 간단하다.}
눈앞에 또다시 떠오른 새로운 창.
그 창은 아까 녀석이 보여 준 것과 비슷한 계약서였다.
{이것 또한 영혼의 계약이다. 계약의 내용은 네가 만약 회귀를 사용한 순간, 네 영혼은 찢어지고 으스러지며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은 곧 회귀의 능력을 사용한 순간 나는 죽는다는 말이었다.
{어서 계약을 맺어라…….}
“…….”
나는 잠시 멍하니 계약서를 바라봤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불안이었다.
나는 무언가 하나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하나가 뭔지 나는 계속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물었다.
“500이라는 회차는 별거 아니라 했지?”
{그렇다.}
그러나 녀석은 그 회귀 자체를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계약을 독촉하는 듯한 말투.
그것이 너무나 의심스러워 천운은 생각했고.
그리고 그 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녀석이…… 절망의 탑이 나타난 목적과 목표를.
“회귀 때문에 그 목적을 못 이루고 있었나 보네?”
{…….}
녀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500이라는 긴 회차가 별거 아닌 게 당연했다.
몇천 년을 사는 이지 또한 존재하는데 500 정도야.
그러나 계속해서 회귀하는 세상 때문에 녀석은 영원히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었다.
동시에 또 다른 의문.
녀석이 처음으로 보여 준 계약서.
그것의 전부가 과연 사실일까?
두 가지밖에 적히지 않은 비실한 계약서였다.
그 계약서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다.
‘과거의 김천운이 호구가 아닌 이상.’
“이지.”
천운은 이지를 불렀다.
“뭘 숨기고 있지?”
녀석은 계약 조항 중 몇 가지를 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