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141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미르마는 성녀, 이제는 메리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에게 다정히 말했다.
[한숨 자고 있으렴.]
살포시 미르마의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아…… 미르마…….”
메리헨의 눈꺼풀이 살며시 감겼다.
마지막 미르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스르륵 쏟아지는 잠에 그녀는 저항 없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천운아.]
“알겠어요.”
나는 곧바로 만다라를 발동했다.
천장에 새겨진 그 거대한 술식은 지금의 마력으로도 부족할 테니.
상승한 스탯은 마력 30.
총 70을 넘는 천운의 마력이 술식에 흡수되고 사용된다.
그렇기에 천운은 알 수 있었다.
언뜻 대마법처럼 보이는 저 거대한 술식은 그 한 단계 위의 술식이라는 것을.
“저는 그럼…….”
[그래. 내게 맡기렴.]
모든 마력을 술식에 넘긴 천운 또한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1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마력을 저 술식에 넘겼으니 어쩔 수 없이 기절하게 될 것이다.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네…… 그럼 맡길게요.”
천운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기절하듯 잠에 청했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미르마.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혼자는 아니었다.
{뭘 하려는 거지?}
백색의 모래가 물었다.
정확히는 샌디라는 이름의 모래가.
미르마는 그런 샌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메리헨에게 자유를 줄 거야.]
{자유?}
[그래. 시간은 오래 걸리니 대화 상대 좀 해 줄 수 있을까?]
{……알겠다. 나 또한.}
샌디의 시선이 허공에 뜬 거대한 술식을 향했다.
{네게 배우고 싶은 게 많아졌다.}
* * *
{저 위에 있는 건…… 네가 만든 건가?}
[그래. 뭐 정확히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지만.]
{무슨 말이지?}
[난 이 유리 돔에 쓰인 술식을 복사해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량하고 있다는 말인가?}
백색의 샌디는 처음 보는 방대한 술식에 호기심을 보였다.
아무리 마법이나 술식에 무지한 누구라도 저것이 어느 정도의 영역에 도달해야 발동할 수 있는 마법인지 알 수 있었기에.
{너는…… 네 예상을 뛰어넘는 마법사였군.}
[그래.]
{그녀는 너를 대마법사라 칭했다. 하지만 저 술식은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다.}
지식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자들이 선망하는 영역.
샌디는 그 영역의 끝에 가장 가까운 자가 눈앞의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호기심을 보이고 궁금해하며 대화를 오래 이어 나갔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저 방대한 지식에 손을 뻗으려고.
그러다가도 잠깐.
의문이 들었다.
{왜지?}
[뭐가 말이야?]
{왜 그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제자와 사제 관계야. 도와주는 건 내 마음이지]
{……거짓말이다.}
모래는 단정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에고를 읽을 수 있듯이 나 또한 비슷한 것을 읽을 수 있다.}
[비슷한 것?]
{‘감정’이다. 그저 표정으로만 유추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그가 느끼고 있는 확실한 감정. 한데 너는 연민이 아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미르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래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걸 가르쳐 주면 나도 궁금한 걸 물어봐도 되나?]
{너 정도 되는 인간도 궁금한 것이 있나?}
[뭐…… 난 전능한 신이 아니니까.]
{알겠다.}
모래는 그리 답했다.
어차피 죽고 받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더욱 이득일 테니.
[뭐…… 근데 말해 봤자 너는 이해 못 할 수도 있겠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제 보니 알겠어. 네가 가진 감정은 한정적이야.]
성녀가 기절하며 쓰러진 순간.
녀석은 제일 먼저 술식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너는 성녀를 어떻게 보고 있지?]
{소중한 존재다. 그녀는 내게 모르는 지식을 알려 준다.}
저 녀석의 말에 혹시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네가 지식을 알려 주면 나도 그 소중한 존재에 포함되나?]
{……그렇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미르마는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미래의 멸망.
그 당시에 녀석은 감정이라는 것을 배울 거라고.
‘녀석은…… 분노하고 있었다.’
과거 녀석에 대해 말하던 길이 한 말이었다.
울부짖는 포효가 지천해를 흔들었고 녀석은 무언가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고.
[뭐…… 그 감정이라는 것 또한 네가 얻고 싶은 지식에 포함돼 있겠지.]
{……그렇다.}
[그렇다면.]
미르마는 성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를 잘 보살피렴.}
* * *
“오랜만이네.”
천운의 꿈속.
그 새하얀 공간에서 미국의 수호신이라는 녀석의 목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 있냐?”
“지금은 목소리만 전하게 연결했어요.”
“그래? 무슨 일인데.”
사뭇 그녀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지왕이 움직였어.”
“친목회는?”
“한우성은 지왕의 움직임을 막고 있어. 다른 단원들은 해왕의 해일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고.”
“……알겠어. 너는 지금 어디 있는데?”
“탑에서 나왔어. 어차피 필요한 건 없으니까…… 잠깐?!”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천운은 그녀가 예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건 뭐야…….”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주 짧은 단편적인 무언가 떠오른다.
드넓은 마경.
울부짖는 마수와 그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지왕.
지왕의 거대한 땅울림이 마경 전체를 흔들었고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하늘과 땅을 포함한 바다를 오염시킨다.
마경의 영역이 확장되는 그 순간.
크오오오오────!!
무언가가 고통스럽게 포효하는 듯한 그런 울림이 들렸다.
분노에 찬 포효의 존재.
“헉!”
그리고 미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면에서 천천히 올라와 존재를 드러낸 무언가는 눈앞의 지왕을 바라보며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윽고 녀석의 형태가 사람의 형태를 띤 순간.
녀석의 두 손이 지왕의 아가리를 잡았고.
크오오오오────!!
녀석의 포효와 함께 지왕의 아가리가 찢겨 나갔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던 페트리샤는.
“허억! 허억!”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아까의 광경을 생각했다.
아주 짧은 미래의 단편이지만 일어난 상황은 그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천운!”
페트리샤가 천운을 부른 순간.
천운의 꿈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천운!”
간섭하지 않은 천운의 꿈에 목소리만 전하는 형태.
그렇기에 그녀와 천운과의 연결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후유증이 오래가지 않을 형태로 연결했기 때문에 쉽게 끊어지는 것 또한 이해가 되지만 타이밍은 최악이었다.
‘아, 안 돼 지금은!’
“천운! 빨리 탑 밖으로 나와야 해요!”
“무슨 말이야!”
파차창!
새하얀 공간이 유리처럼 조각나고 깨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탑을 빨리 공략하고 밖으로 나오세요! 현세가 위험해요!”
그녀는 그저 그 말밖에 전할 수 없었다.
* * *
‘이게…… 몇 번째지?’
의철은 도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천운을 구하려고 한 것이 몇 번째인지 말이다.
반복되는 세계는 영원과도 같으며 그것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그러던 그때.
“천운이는…….”
김천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으니.
의철은 또다시 그곳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천운이는?’
김천운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자신보다 제일 먼저 찾아왔어야 할 김천운이 말이다.
의철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천운을 찾기 시작했다.
천운이 달려왔던 방향.
그곳을 반대로 걸어가면 녀석이 있었을 장소가 나타나겠지.
‘천운아…….’
의철의 예상대로 천운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안전지대 철조망 너머의 천운.
천운은 그곳에서 담담한 무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득-
천운은 이를 악물며 그곳을 노려봤다.
“지금은 안 되지만…….”
천운이 말했다.
“나중에는 꼭 구해 드릴게요.”
의철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숫자는 자그마치 325.
저벅- 저벅-
그런 의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야! 김의철.”
한설아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의철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가 들려?”
“어, 어?”
“하…… 몇 번을 불렀는데.”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한 한설아는 계속해서 의철을 불렀고 잡으려 했으나 왜인지 그것이 불가능한 세계였다.
위에 숫자가 거듭날수록 의철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듯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천운의 변화였다.
정확히 325회 차로 거듭난 순간.
천운은 그곳을 찾지 않았다.
325회 차 동안 똑같은 결과가 반복됐음에도 말이다.
아니, 그 사이에서 서서히 변화되는 것이 있긴 있었다.
“천운아…….”
천운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100회 차의 천운의 눈은 그리 절망적이지 않았다.
200회 차의 천운은 서서히 무덤덤하게 변했고 급기야 325회 차의 천운은 이곳을 찾지도 않았다.
검을 계속 휘두르던 의철은 눈치 못 챈 사실이지만 멀리서 그 과정을 계속해서 바라본 한설아는 알 수 있었다.
저 과거의 천운 또한 이 회귀하는 세계를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만약 그렇다면…… 던전이 보여 주는 이 과거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설마…….’
천운은 한 달 따위로 그 상황을 극복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을 반복하여 익숙해졌을 뿐.
쿠쿠쿠쿠쿵!!
또다시 세계가 일변하는 흔들림이 일어났다.
한설아는 급하게 의철에게 말을 전했다.
“정신 차려! 할 수 없는 일을 계속 반복하지 말고!”
“너도…… 계속 있었던 거야?”
“그래. 다음 회차로 넘어온 순간 어디에도 가지 말고 기다려! 알겠지!”
한설아의 마지막 말과 함께 거대한 빛이 의철과 한설아를 집어삼켰다.
의철은 눈을 감았고 다시 천천히 눈을 반개했을 때.
다시 이곳에 처음 왔던 그 장소.
첫 시작의 장소에 왔을 때 의철은 왠지 알 수 없는 머릿속의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 지금까지 뭘…….”
326회 차.
그 과정의 일부만이 보여 준 세계.
그 끝이 어딘지는 의철을 알 리가 없었다.
“후…….”
의철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익숙한 3명의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설아, 김의철, 질 로벤.
그들이 의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 차렸어?”
한설아가 물었다.
의철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윤시혁이 말했다.
“질 로벤과 나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 여기는 어디지?”
“과거야. 천운의 과거.”
“김천운에? 왜 던전이 그 녀석의 과거를 아는 거지?”
“몰라. 하지만…….”
의철은 다시 그 장소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서 그곳에 향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