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140
흐느적거리는 발걸음.
손에 쥔 팔테인 또한 지면에 질질 끌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과 동시에 한설아는 의철의 머리 위에 떠 오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숫자?’
의철의 머리 위에 떠 오른 숫자.
53이라는 숫자는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은 그저 일정한 숫자.
결국 의철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한설아는 의철을 부를 수가 없었다.
한설아는 별수 없이 그저 조용히 의철의 뒤를 따랐다.
쿠쿠쿠쿵!
지면을 흔드는 지진이 일어났다.
땅이 갈라지고 무수한 마수들이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러나 곧…… 한설아는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왜인지…… 자신은 검을 거머쥐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환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것을 만지고 벨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질 수도 베일 수도 없는 마치 신기루 같은 것들이었다.
“헉!”
한설아는 정신을 차렸다.
마치 정신을 간섭한 듯한 느낌.
마치 저것들이 실존하고 자신이 저것을 벨 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드는 기묘한 기운.
짝-
한설아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렸다.
이것은 쉽게 말해 최면과도 같은 묘한 기운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이곳은 탑이었다.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최악의 던전.
한설아는 다시 의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의철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천운…… 이……?”
한설아는 말을 하다가도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한설아는 항상 궁금했다.
언니인 한민아가 비밀로 해 온 천운의 과거를.
“아…….”
저것이 일어난 사건은 고작 1년 전.
그리고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몇 달도 안 됐을 때 일이었다.
한설아는 천운과의 첫 만남을 생각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 눈앞의 천운을 바라봤다.
“…….”
천운은…… 그 짧은 시간에 저 절망을 극복한 것이다.
몇 달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으아아아아!!”
그때였다.
의철은 다시 팔테인을 꽉 쥔 채 허상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베이지도 닿지도 않을 의미 없는 짓을 의철은 힘이 빠질 때까지 계속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정신 차려라! 김의철! 의철아!]
길의 아우성에도 의철의 반응은 묘했다.
그저 들리지 않은 것처럼 못 들은 것처럼 의철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검이 향하는 사내는 이 광경의 모든 원흉.
한때라도 그를 안타깝다고 여긴 자신에게 토가 나왔다.
“하아! 하아!”
그러나 결국 그 검은 영원하지 않았다.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녀석에게 닿지 않을 검.
“제…… 제 검은 모든 걸 벨 수 있다고 했잖아요…….”
의철은 길에게 말했다.
그러나 길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절망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길은 일어난 절망에 부외자였다.
“근데…… 왜 벨 수가 없죠…….”
모든 걸 벨 수 있는 검.
길과의 첫 만남에서 길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그 검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너는.]
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분명 자신은 의철의 가능성에 그리 답했다.
그러니…….
[나처럼 되면 안 된다.]
쿠쿠쿠쿵!!
공간 자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모든 허상이 사라지고 공허한 어둠만이 남았다.
그곳에서 세계는 다시 구현되고.
똑같은 세계가 다시 반복되기 시작했다.
“이건…….”
한설아는 그 과정을 눈으로 끝까지 지켜봤다.
모든 세계가 불과 몇 분 전으로 돌아가는.
마치 ‘회귀’라고 불리는 현상.
그리고 한설아는 세계가 일변하기 전 확인한 것이 있었다.
김의철의 머리 위의 숫자.
그것이 54가 된 것을.
“대체 뭐지…….”
이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떠오르는 창 또한 없었으며 설명도 목표도 없는 시련.
그러나 유일한 단서가 명확한 시련.
한설아의 발걸음은 다시 그곳을 향했다.
* * *
3층의 시련 ‘기아의 저주’.
그것을 클리어했다는 사실을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건…… 뭐지?”
윤시혁과 질 로벤의 눈앞에 나타난 게이트.
이 두 명은 기아의 저주에 이미 벗어난 것이다.
동시에 천운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성녀의 기운이 감도는 무구한 성 내부의 영향으로 윤시혁과 질 로벤이 저주에서 해주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그래야 정상일 터.
“4층으로 통하는 문이군?”
“4층?”
“그래. 하지만…….”
윤시혁과 질 로벤의 시선이 천운을 향했다.
천운 또한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먼저가.”
“왜지?”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아 맞다.”
천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비보 보관실이 어디야?”
“거긴 왜?”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쓸 만한 거 좀 챙겨서 가. 그게 3층의 보상이니까.”
“굳이 지금 4층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만…….”
“아니, 지금 가야 돼.”
천운은 단호했다.
원래라면 이들이 이곳에 있었으면 안 됐으니.
“가서 의철을 도와줘.”
“김의철을?”
“그래.”
윤시혁은 잠시 말없이 천운을 바라봤다.
항상 궁금했다.
대체 이 녀석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뭘 더 알고 있는지.
“김천운.”
윤시혁은 천운을 불렀다.
“4층의 공략 방법이 뭐지?”
왠지…… 녀석이라면 그 방법을 알 거 같았기에.
그러나 천운은 옅은 미소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의철을 도와줘. 그럼 알게 될 거야.”
만약 예상대로의 4층이라면 천운이 도와줄 수 있었을 테지만 천운은 확신하지 않았다.
지금의 의철은 소설 속 의철과 달라진 과거가 많으니.
“알겠다…….”
“그…… 저기 조심해요!”
윤시혁과 질 로벤이 떠난 자리.
혼자 남은 천운은 다시 성녀가 있는 숲을 향했다.
* * *
미르마와 천운이 다시 그 숲에 도착했을 때.
“여긴…….”
이미 그곳은 숲이라고 부르기 힘든 공간이었다.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유리 돔.
그 유리 돔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곤히 자는 성녀와 예의의 그 모래뿐이었다.
[그런 거였구나.]
미르마의 서글픈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이런 공간에 지냈던 거였구나…….]
미르마는 곤히 자는 성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모래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
모래에게 어떠한 반응도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정히 미소 짓는 미르마는 모래에게 깊은 감사를 전할 뿐이었다.
미르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과거에 보았던 성녀의 모습은 항상 발랄하고 활기가 넘쳤으니.
그러나 그것이 눈앞의 모래 덕분이라는 것을 미르마는 모르고 있었다.
[네 덕분에 그녀가 외롭지 않았겠구나.]
그때였다.
모래의 몸에서 사아악- 지면을 타고 백색의 모래가 번지기 시작했다.
번진 모래 사이에서 활자처럼 글자가 스르륵- 올라왔다.
{너는……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마법사구나.}
[대화가 가능한가?]
{그렇다.}
모래는 답했다.
그의 지능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고맙다.}
그리고 모래는 말을 이었다.
{네 덕분에 그녀가 밖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모래는 그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미르마는 쓸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알려 줘야 해. 내 마법으로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면 안 된다고.]
{왜지?}
[그건 나보다 그녀가 더 잘 알 거야.]
{……그렇군. 그러나 네 덕분인 건 변하지 않는다.}
스르르르륵-
모래의 몸이 스르륵- 모여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 솟아오른 모래는 어느새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모래는 미르마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녀의 경험이 내 지식의 양분이 되니. 난 그녀에게 더욱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만들 생각이다.}
사람의 형태를 띤 모래는 점차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천운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럼 그녀는 또 내게 다시 많은 걸 가르쳐 주겠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지식을 탐하는 거 같지만.
녀석에게 느껴지는 말투는 그저 순수했다.
순전히 궁금했고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너무 뻔한 감정.
“꼭 성녀에게 듣고 싶다는 말이네요.”
{그래.}
성녀는 모르겠으나 이 모래는 아닐 것이다.
그가 마음만 먹고 혼자 나가려 한다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보고 싶은 것을 보려 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래는 이곳에 남는 선택을 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일까…….
녀석을 소중히 아끼게 된 것이.
{지식은 원한다. 그러나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할 생각은 없다.}
모래는 그리 답했다.
‘역시…….’
천운은 그것으로 알 수 있는 점이 있었다.
녀석이 후에 재앙이 된다는 예언.
그리고 사라진 성녀.
‘성녀가 트리거였어…….’
후에 일어날 사건이 녀석을 재앙으로 일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교황.’
교황은 틀렸다.
이세계의 구원 방법이.
그는 예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교황은 오히려 일어날 재앙을 앞당기고 있었다.
[그런 거였나…….]
그리고 미르마 또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모래와 대화 몇 마디만 나누면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
교황은 그것조차 못해 세계를 멸망으로 초래한 것이다.
[바르부스를 탓할 게 아니었군. 나 또한 아무것도 몰랐으니.]
미르마가 고개를 돌려 천운을 바라봤다.
[천운아.]
“네.”
[도와주겠니?]
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미르마가 무엇을 하려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
“으음~.”
성녀는 몸을 뒤적이다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손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며 멍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다 미르마를 발견했다.
“어? 미르마 안녕하세요.”
일어난 그녀는 왜인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얘야.]
미르마가 말했다.
과거에 전하지 못한 그 말.
전하지 못한 선물,
그녀는 지금이 돼서야 그것을 그녀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네게 줄 선물이 두 가지나 있단다.]
“와! 선물이요? 근데 선물이 뭐예요?”
[가장 아끼고 소중한 사람에게 건네는 거란다.]
“와……!”
그녀의 동공이 반짝반짝 빛나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미르마를 바라봤다.
미르마는 그런 그녀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으나 닿을 리가 없는 손이었다.
그런데도 성녀는 만족한 듯 웃고 있었다.
“선물 고마워요 미르마!”
[후훗, 내가 줄 선물은 이런 게 아니란다.]
“네? 그럼…….”
[첫 번째로.]
휙-
미르마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하나의 글씨.
“이건…….”
[네 이름이란다.]
미르마는 말했다.
하지만 성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름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나아요…….”
[……메리헨.]
미르마는 후회했다.
조금 더 빨리 이 아이의 마음을 알았다면…… 과거 호기심을 탐해 접근한 내가 아닌 지금의 나였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과의 대화를.
“메…… 리헨?”
[그게 네 이름이란다.]
“하지만 미르마…….”
[솔직해지렴.]
미르마는 그리 말했다.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 천운이랑 대화했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모르는 사람과의 첫 대화니까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이제 됐어요. 욕심이 과하면 금물이라고 미르마가 알려 줬잖아요.”
그 말에 미르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아니란다.]
그녀가 손을 뻗었고.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마.]
유리 돔 천장에 떠오른 거대한 술식.
그 술식의 전체는 난잡하고 어려우며 틈이 없었으나 그녀의 경지를 실감하게 만들 정도였다.
미르마는 저 술식을 1초도 안 걸리는 순간에 전개한 것이다.
과거에 그녀는 할 수 없었던.
오직 지금의 현자만이 가능한 술식.
[네 덕분이야 천운아.]
미르마가 천운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