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137
흰색 나무 곁을 바둥거리며 신나게 뛰어노는 그녀.
천운은 조금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르마.”
[그래.]
“성녀는 이름이 없나요?”
[없다는구나. 그래서 내가 지어 주려고 했다만 저 아이가…… 거부하더군.]
“그래요?”
그녀는 나무 곁에 바둥거리다가도 나무에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천운은 잠시 그녀 곁에 다가가 몸을 들어 올려 나무 위로 올려 주었다.
“읏차! 아! 고마워요!”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손을 방방 흔드는 그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몸에 중심을 못 잡고 떨어지려 하는 것은.
“고마워…… 요…… 아!”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나무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천운은 동시에 그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만히 서 있던 백색의 나무가 요동치며 가지가 스르륵 뻗어 떨어지는 성녀를 받아 냈다.
“뭐?!”
“히히! 고마워 샌디.”
샌디라고 불리는 나무.
그 나무의 형태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동그란 슬라임 형태의 무언가로 변했다.
그러나 그 슬라임의 형태는 물이 아닌 천운에게는 아주 익숙한 모래였다.
“샌디…….”
스르륵- 툭-
천운의 손목에 있던 샌디가 그것을 보고 반응했다.
샌디는 천운의 손목에서 나와 눈 스르륵- 녀석에게 다가갔다.
[ㅇ?]
녀석을 보자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샌디.
“어! 샌디랑 똑같은 아이네요! 와 신기하다. 응? 뭐가 똑같냐고?”
백색의 샌디가 왠지 성녀에게 화를 내는 느낌이었다.
그것보다 천운은 궁금했다.
녀석의 정체를 포함해 조금 전 나무에 떨어지기 전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간 기운이 뭔지.
그것은 감지한 것이 아닌 눈으로 선명히 보이는 기이한 기운이었다.
‘미르마도 보셨죠?’
[그래…… 저거다. 내가 전에 말했던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기운. 성녀는 마력을 대신해 저 기운을 사용하지. 한데…….]
또한 그 기운이 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하늘을 뚫고 어딘가로 이동되는 것을 천운은 느꼈다.
“하아…… 죄송해요. 요새 자꾸 졸려서.”
“졸리다고요?”
“네. 몸에 기운이 히리릭- 빠지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다리를 쭉 펴고 풀 바닥에 앉으면 투덜거리듯 그렇게 말했다.
천운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나와 교황이 유일했지.]
‘저 기운은 대체 뭐죠?’
그렇기에 천운은 확신했다.
저 옮겨 가는 기운의 정착지에 교황이 있을 거란걸.
[흠…… 교황은 저 기운을 신성력이라고 부르더구나…….]
* * *
“많이 늘었구나. 루벨론.”
“과찬이십니다.”
길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말했다.
“너는 다른 놈들과 다르군.”
“과찬이십니다.”
“……앵무새처럼 계속 그리 말할 거냐?”
“…….”
“하긴 뭐…… 너와 대화를 나눌 유일한 수단은 검뿐이지.”
길은 다시 자신의 대검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는 그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대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으로 들고 가볍게 훙훙 휘두르기 시작했다.
윤시혁은 그 검격을 막는 거조차 버거웠다.
길이 말했다.
“스킬에 의지하지 마라. 그것은 고유 스킬도 포함이다.”
“예.”
“나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나, 너는 그 힘에 도달할 수 없겠지. 그러니 경험과 기술을 가르쳐 주마. 나머지 방법은 네가 알아서 찾거라.”
“예.”
윤시혁은 그저 담담히 말하며 검을 막아 낼 뿐이었다.
그때였다.
윤시혁의 검이 잠시 멈춘 것은.
그에 따라 길 또한 휘두르려던 검을 멈추고 윤시혁에게 물었다.
“뭐냐?”
“죄송합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더냐?”
“예.”
“흠…… 의외구나. 나 또한 익숙한 이 기운을 느꼈으니.”
길의 대검이 자신의 뒤를 향했다.
파아앙!!
휘둘러진 검격.
그것이 두 개의 기둥을 부순 뒤 저 너머로 뻗쳐 나갔다.
콰쾅! 콰르륵!
무너지는 기둥의 뒤편.
한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길은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쥐새끼처럼 또 성에 쳐들어온 것이냐. 미르마.”
길은 답했고 미르마는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길…….]
그녀 또한 똑같이 길을 노려봤다.
동시에 싸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분위기도 잠시.
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참지 못한 웃음을 뱉으며 미르마에게 다가갔다.
“크하하! 미르마. 얼마 만인 것이냐 이게?”
[너 또한 여전하구나.]
“네가 자취를 감춘 것이 1년이다. 자이럼에서 모습을 한 번 드러냈다지?”
[그 녀석에게 이별에 대한 선물을 주고 왔지.]
“그런가……. 결국 너 또한 선택한 거구나. 한데…… 이 소년은?”
길은 천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르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제자다.]
“그렇군, 그래.”
천운은 멍하니 그런 길을 바라봤다.
뭔가…… 옛날에는 이렇게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쓴 길의 성격은 항상 지친 듯 피폐했으니.
또한 눈앞에 다리가 없는 채 둥둥 떠올라 있는 미르마의 모습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이, 루벨론.”
길은 루벨론을 불렀다.
천운은 잠시 루벨론을 바라봤다.
녀석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금발 미청년의 모습을 한 루벨론.
그러나 그런 남자의 인상은 더럽게 담담했다.
‘표정 좀 풀고 살지.’
얼굴 굳을라.
윤시혁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긴 지금까지 본 윤시혁의 표정은 화났거나 저렇게 날카롭게 담담한 표정밖에 없었으니.
“너는…….”
그런 윤시혁이 나에게 물었다.
“김천운이냐?”
그 말에 천운은 놀란 반응을 숨길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맞군.”
당연히 놀란 표정을 봐 버린 윤시혁은 내가 김천운이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아는 사이라는 게 이놈이었나?”
“예.”
“허…… 그래. 그건 그렇고 여기는 무슨 일이냐? 미르마.”
[어째서 네놈들은 멀쩡한 거지?]
“저주에 관해서 말이냐?”
[그래.]
윤시혁과 길은 그런 미르마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말했다.
“무슨 소리냐? 허기의 고통은 우리도 받고 있다만.”
[근데 어떻게?]
“수련으로 상념을 떨쳐 내고 있다.”
[허…… 너는 그렇다 쳐도 저 자도 말이냐?]
“그래. 정신력 하나는 기가 막히는 녀석이지.”
나는 그런 윤시혁을 바라봤다.
그저 담담하고 표정에 일말의 변화도 없는 윤시혁.
그러나 지금도 계속 그 고통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윤시혁에게 내심 감탄하다가도 의심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들이 그 금술의 고통을 떨쳐 낸 것이 맞는지.
“그럼…… 이곳에 있는 성직자들도 전부?”
“아니, 그건 아니란다.”
길이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그는 자신 둘만이 그 고통을 인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교황이 내리는 권능을 받지 않았다.”
[권능?]
“고통으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는 신의 권능이라더군. 실제로 그것 때문에 이곳은 평화로운 거지만.”
천운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권능이라는 것이 아마 성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라는 것을.
그것이 아니라면 이미 성녀 또한 저주에 받아 고통에 허덕일 테니.
[도와줄 수 있겠나? 길?]
“뭐를?”
[교황을 만나러 갈 거다.]
“그만둬라. 네 녀석은 이곳에서 수배자이지 않으냐.”
“수배자요?”
“그래. 몇 년 전 교황의 신물을 훔쳐 도주한 녀석이 네 스승이란다.”
후훗.
미르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물을 훔친 게 아니다.]
“그럼 뭘 훔친 거냐?”
[녀석이 꼭꼭 숨겨 놓은 소중한 것을 봐 버렸지.]
나는 그것이 성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녀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교황.
그런 교황이 성녀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가 봐야 되겠네요.”
[그래. 나는 이만 가 보지.]
“잠깐.”
그때 길의 옆에 서 있던 윤시혁이 말했다.
“도와주마.”
“……성기사단이지 않나?”
천운은 그렇게 말하며 솔직히 윤시혁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녀석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있었으니.
4층 죽음의 층에 고통에 허덕이는 김의철을 구해 줘야 한다.
그것이 윤시혁, 한설아, 질 크롬벨의 역할이었다.
“성기사단이 침입자를 도우면 입장이 위태롭지 않을까?”
“괜찮다.”
“그래. 그냥 따라가거라. 나도 보내 줄 테니.”
“음…….”
“네가 거절해도 따라갈 거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녀석이 한 번 정한 판단을 쉽게 꺾을 리가 없었으니.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천운.
“그럼 가 보겠습니다.”
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천운은 윤시혁과 합류해 다시 교황의 은신처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천운은 궁금했다.
이 녀석이 왜 자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건지.
“왜 도와주는 거야?”
“…….”
천운이 물었고 잠시 조용히 입을 다물던 윤시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아니 알고 있는데…….
자기가 윤시혁이라는 분위기를 팍팍 흘리는 녀석이.
“과거에 빚이 있어서 도와주는 거니 신경 쓰지 말아라.”
그리 말하며 윤시혁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천운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녀석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 *
“어찌 된 거지?”
지왕이 반응하고 있다.
분명 탑의 마기를 차단해 일시적으로 현세와 마경의 경로를 봉쇄했는데도…….
녀석은 울부짖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릉!!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지면이 갈라지고 무수한 나무들이 고꾸라지며 마경의 새들이 저 멀리 하늘을 향해 퍼덕였다.
마경의 마수들은 똑같이 울부짖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겁에 질린 듯한 포효였다.
쿵!
녀석에 거대한 왼쪽 앞발이 움직였다.
4족 보행의 거대한 등딱지를 달고 있는 마경의 지왕.
거대한 거북이 현상을 띈 녀석의 등에서는 분화구 형태의 등딱지에서 마기가 흐르고 있었다.
녀석은 말 그대로 마수왕의 시발점이다.
하늘을 덮고 땅을 물들이는 거대한 재앙 덩어리.
녀석의 발끝에서 마기가 번져 나가 바다를 향하고, 녀석의 등딱지에 거대한 분화구에서 마기가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는다.
그것은 녀석이 의도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자연스러움 본능이었다.
“상황이 변했다.”
“그래 보이는군.”
한우성이 그리 말했고 카스퍼가 답했다.
그들이 마력을 거의 부어 버리듯 써서 차단시킨 마법이 소용없어진 것이다.
“일단 한국의 4대 가문에게 연락하겠다.”
“그래. 우리 또한 준비하지.”
녀석이 움직이는 활동을 시작으로 두 번째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해왕이었다.
일본과 한국 사이 해안에 존재하는 해왕은 그저 한 번의 움직임 자체가 재앙이니.
“하…… 준비하라고 해야겠군…… 응?”
그리고 한우성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지왕이 머무는 마경.
그 근처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의 인영.
“그런가…….”
한우성은 확신했다.
저 멀리 마기를 분출하는 녀석을.
지왕의 끝없이 분화하는 마기를 녀석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카스퍼.”
“왜 그러지?”
“뒷일을 부탁하지.”
후웅!
한우성은 그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