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128
드넓은 광장에 세워진 상징적인 존재 ‘힐리아 호르멜’.
그러나 그 존재는 가상적이기에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성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뭔 소리야? 존재하는데.]
‘응?’
[성녀는 존재해.]
미르마가 그 성녀의 동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눈앞의 그녀는 아니지만…….]
천운은 오묘한 눈으로 미르마를 바라봤다.
물론 이 멸망한 세계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만들어 낸 설정 중 공백이 가장 많이 차지하는 스토리가 절망의 탑 1, 2, 3층의 스토리니.
공략 방법만이 알고 있을 뿐 그 내면을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소설에 적어 낸 설정 중 명확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녀의 존재 여부다.
“그…… 러니까 일단 존재하…….”
그때였다.
천운이 질문하던 도중 천운의 눈앞에 새로운 안내창이 떠올랐다.
{1 층의 시련 ‘전쟁’에서 1위부터 10위까지의 시련자들은 당장 대성당으로 모여라.}
말투를 보아하니 던전의 이지가 보낸 창이었다.
‘그것보다 이런 게 있었구나…….’
애초에 의철과 아이들은 1층부터 3층까지는 순위권 안에 들지 못했으니.
‘그것보다 1위부터 10위까지라면 분명…….’
각국의 내로라 불리는 아베타들.
한국과 미국 각 나라를 대표하는 길드장.
그들이 대성당 한 자리에 모인다는 건데…….
‘일단 얼굴을 숨겨야겠네.’
그들 앞에서 한 소년이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을 보이면 눈에 띌 테니.
활동에 지장을 주는 점은 차단해야 한다.
‘그것보다 여기 대성당이 어디지?’
[나도 가 본 적이 있긴 하다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띵-
‘응?’
천운의 눈앞에 떠오른 또 다른 창.
대성당까지의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비스름한 것이 떠올랐다.
천운은 그 안내에 따라 대성당을 향했다.
* * *
대성당 안.
거대한 직사각형의 책상 앞에 각국의 길드장을 포함한 내로라 불리는 아베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니까. 그 김천운이라는 놈이 뭐 하는 놈인지 모른다고?”
15살 쯤 돼 보이는 소녀가 눈썹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바로 미국의 1위 팔스 길드의 부길드장 제니퍼였다.
현재 역할로 인해 15살의 소녀로 변한 상태였다.
그의 옆에 있던 마산도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제니퍼. 생각보다 귀여운 모습이 됐군.”
“너는 어째 바뀐 게 없어 보이지?”
“바뀐 상태다. 조금 젊어졌지.”
“쯧, 것보다 그놈 이름만 봐도 한국인이잖아. 뭐 아는 거 없어?”
“김천운이라는 이름이 애초에 흔한 이름이 아니지만…… 그런 유능한 실력과 특이한 이름이면 애초에 알려질 대로 알려졌겠지.”
“아니, 그럼 진짜 뭐 하는 놈이야?”
부길드장인 제니퍼가 통역기에 대고 어이없듯이 물어봤다.
마산도 또한 그놈의 정체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애초에 내 기억상 김천운이라는 이름은 길영트의 생도 한 명밖에 안 떠오르는군.”
“거참…… 생도는 제외하고. 그럼 뭐 빌런 아니야?”
“그럴 가능성이 좀 크지?”
마산도는 애초에 그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자신도 모르는 이름이다.
그 정도 실력을 갖춘 아베타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면 그것밖에 없으니.
“뭐, 그럼 어쩔 건가? 이곳에서 전투를 벌일 수 도 없고.”
대성당에 들어온 시점에서 전투를 금지한다는 창이 떠올랐다.
일시적이기는 하나 그 효능은 확실했다.
이 공간 안에서는 그놈이 범죄자가 맞다 해도 어떻게 할 방법도 그놈도 무슨 짓거리를 할 방법도 없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수상쩍은 놈이 한두 명이 아닌데.
특히 저 녀석…….
망토에 달린 후드를 푹 뒤집어쓴 놈에게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은 마기였으니.
“댁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알 필요 없다.”
“흠…….”
나 범죄자예요. 하는 놈이 눈앞에 떡하니 있어도 방법이 없으니 마산도는 불쾌할 지경이었다.
끼이익-
그때였다.
대성당의 문이 또다시 열린 것은.
“음…… 7명인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실제로 이 대성당에 모인 인원은 자신을 포함해 7명.
나머지 3명은 아무래도 다른 왕국을 선택한 모양이다.
‘그놈이군.’
마산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놈이 1층의 시련.
그곳에서 자신보다 압도적인 포인트를 얻은 1위 김천운이라는 것을.
또한 놈의 행색에 마산도를 포함한 5명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뭐야 저놈은?”
“하…… 내 예상이 맞았어. 저놈도 범죄자라니까.”
“거참, 한국은 인재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저 정도 인재가 범죄를 저지르나?”
나타난 그 또한 검은색 망토에 달린 후드를 푹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으니.
남자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곧바로 상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털썩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봐.”
팔시 길드의 부길드장 제니퍼.
그녀의 물음에 천운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알고는 있었지만 앙증맞은 작은 키의 어린 소녀가 돼 있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신경질적인 말투와 짜증스러운 얼굴.
초면부터 적대하는 그녀의 태도.
그러나 그런 분위기에 맞지 않은 생김새에 김이 빠질 거 같았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듯이 천운은 녀석의 대답을 무시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또한 2층의 ‘역병’을 공략할 가장 유력 후보자이니.
어떻게 보면 협력할 수 없는 멀어져야 할 상대이다.
“이봐! 지금 무시하는 거야?”
“여러분은 이곳에 모인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천운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언뜻 그들의 눈에는 적대감이 올라와 있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일단 범죄자는 아닙니다. 사정으로 인해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일본의 검객 길드의 길드장 하라노 하루나가 물었다.
천운은 짐짓 그녀를 모르는 척 대답했다.
“혹시 그쪽 이름이?”
“네놈도 안 가르쳐 주는데 내가 알려 줘야 하나?”
“뭐, 그렇긴 하다만……. 그럼 이건 물어볼 수 있겠죠. 혹시 여기에 모인 이유를 아시나요?”
“아니, 그저 이지가 이곳에 부르더군.”
천운은 다시 그들을 둘러봤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다.
“흐음…… 내 생각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곳이 회의장 같군.”
마산도가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걸 보게.”
후웅!!
아무 예고 없이 천운의 미간으로 날아오는 마산도의 주먹.
그러나 천운의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천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으나 마산도는 태연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서로 간의 터치도 타격도 불가능한 장소. 그리고 지정된 자리. 마치 무언가를 회의하여 대비하라는 회의장 같지 않나?”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일단 던전의 이지가 말을 안 하니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나름 엄근진처럼 말하는 제니퍼.
그러나 역할 때문인지 앙증맞은 목소리가 그 분위기를 깨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일단 해산하나?”
미국의 영웅 랭킹 3위 크로아이가 물었다.
확실히 아직 뭐 2층의 시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게 없으니 회의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뭐…… 장소를 알았고 딱히 지금으로서는 알려진 게 없으니까.”
“아니, 그 전에 한 가지.”
그때 제니퍼가 천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이, 랭킹 1위. 너는 뭐 알고 있는 거 없냐?”
그녀의 저의를 알 거 같았다.
아마 1위를 하여 받은 혜택 중 정보가 없나 물어보는 것이다.
근데 천운에게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우리가 구면인가요?”
“뭐?”
“왜 초면에 반말하지? 나이도 어린 것이.”
천운은 솔직히 그들의 적대적인 시선과 마치 빌런을 대하는 듯한 태도와 말투가 거슬렸다.
자신은 이렇게 정중하게 존대를 하는데.
막상 내 말을 들은 제니퍼가 어버버 거리며 황당해하기 시작했다.
“뭐, 뭐…… 뭐…… 뭐?! 이건 역할 때문이고! 원래 나이는 28이거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궁금한 게 있다면 예의부터 차리고 와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밖에서 만났으면 말도 못 걸고 뒈졌어 너는!”
“자, 자 그만.”
보다 못한 마산도가 중재에 나섰다.
그는 보기 좋은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천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좀 실례를 한 모양이군. 미안하네. 내가 대표해서 사과하지.”
“사과하긴 뭘 사과해! 지가 의심스러운 행색으로 찾아와 놓고!”
“자, 자 그쪽도 그만하자고. 우리끼리 싸우면 뭐 하나, 지금 가장 중요한 대목이 탑의 공략인데.”
“끄으응!”
마산도의 말에도 제니퍼는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천운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뭐…… 나도 묻겠다만 혹시 알고 있는 정보라도 있나?”
마산도가 천운에게 물었다.
그 또한 사실 1위의 혜택이 궁금했으니.
천운은 생각에 잠겼다.
아니, 솔직히 조금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으니.
굳이 혜택이 아니더라도 천운이 알고 있는 정보는 당연하지만 많았다.
물론 그 정보를 그들과 공유할 생각도 없었으니.
나 홀로 공략과 함께 2층의 유물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아니요. 딱히 없네요.”
천운은 대답했고.
“뭐, 그렇겠지…….”
마산도는 초연한 태도로 그리 말했다.
아니, 애초에 내 말을 안 믿는 모양이다.
대답이 너무 늦었나?
이 자리에 모인 그들 모두가 의심 서린 눈빛으로 천운을 보고 있었으니.
“뭐 만약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협력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후드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나?”
“개인적인 사정이니 더는 묻지 말았으면 합니다.”
“흠…… 이건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만 목소리를 들어 보니 자네도 어린애 아닌가?”
“뭐야!”
막상 성을 낸 것은 제니퍼였다.
제니퍼는 아직도 눈을 부라리며 천운을 보고 있었다.
“너도 어린애면서 나보고 애 취급한 거였어?! 뒈지고 싶냐?”
“당신보다는 나이 많아. 대충 보니까 15살로 보이는데.”
“아, 아니거든! 설정상 17이거든!”
“뇌도 어려졌나?”
“이! 이! 개자식이!”
“하…….”
마산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리기 귀찮아 보였다.
“그럼 뭐…….”
천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계속 있어 봤자 의미가 없으니.
“다음 정보를 모은 후에 모이는 거로.”
“그러지.”
천운은 일단 형식적인 말을 그들에게 남기며 출구를 향했다.
동시에 책상을 지나 출구를 향하는 도중.
천운의 시선이 가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껏 회의에서 입을 꾹 닫고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
놈은 몸에서 마기를 뿜어내며 초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저놈은…… 누구지?’
자신과 같이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사내.
천운은 그의 눈초리가 거슬렸다,.
마치 원수를 보는 듯한 원망이 담긴 눈.
동시에 느껴지는 마기.
놈의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초월자는 탑의 초대를 받지 못한다.
그것을 제외하고 마인이며 천운을 원망하는 인간은 한정적이니.
‘윤현…….’
녀석은 아직도 마기를 거칠게 흩뿌리며 천운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