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120
“쳇.”
왕의 서신을 받은 마탑의 미르마는 혀를 찼다.
“무슨 일이세요?”
“하……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미르마는 왕의 서신을 손으로 꾸긴 뒤 휙- 쓰레기통 안으로 던졌다.
“내 오랜 친구가 개소리를 하길래.”
“네?”
“그것보다 내가 시킨 건 다 했니?”
크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르마가 시킨 그대로 몸속에 마력을 둥근 구 모양으로 밀집시킨 뒤 한 번에 퍼트리는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몸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고통이 일었지만 크롬벨은 입을 꾹 담고 참아 내고 있었다.
“쿨럭…… 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란다. 조금만 더 노력하렴.”
“아, 저기 미르마 님.”
“응?”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음…….”
미르마는 생각했다.
솔직히 이유가 너무 직설적이라 뭐라 돌려 말할 생각이었다.
귀여운 아이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조그만 깨달음을 주려 했다는 말을 그대로 하면 좀…… 그렇겠지?
“재능이 보여서.”
“재능이요?”
“그래. 너처럼 어린 나이에 벌써 마법 술식에 일가견이 있으니 가르치고 싶은 흥미가 생기더구나.”
“아, 그렇구나.”
크롬벨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마력을 밀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저기…… 미르마 님?”
“응?”
“그 아까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던 건가요?”
크롬벨도 눈이 있었다.
황금빛의 리본이 감싸여진 서신은 딱 봐도 높은 사람이 보낸 서신처럼 보였다.
“뭐…… 그 뭐냐.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테니 도와 달라는데?”
“네? 전쟁이요?”
“그래. 그러니 너도 조심하렴. 자이럼 마탑 소속 마법사들 또한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될 테니.”
크롬벨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녀의 놀란 얼굴이 미르마를 향했다.
“그럼…… 미르마 님도요?”
“아니, 난 애초에 여기 마탑 소속이 아니야.”
“아, 정말요? 그럼 어째서 가장 높은 층에…….”
“친구의 배려야. 잠시 왕국을 들렀다 가려니 마탑의 최상층을 주더라고.”
크롬벨은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시스템에서도 대마법사라 하였고 애초에 느껴지는 기운 또한 범상치 않았으니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미르마 님 저기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뭐가?”
크롬벨은 곧바로 주머니를 뒤적이고 작은 통 안에 들어간 검은 모래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모래 아니니?”
“모래이긴 한데.”
크롬벨은 다시 주머니에서 또 다른 검은 모래가 들어간 병을 꺼냈다.
둘의 생김새에 차이점은 없었으나 미르마는 곧바로 방금 꺼낸 모래와 차이점을 알아차렸다.
“이건…… 마력이 담겨져 있네? 그럼…… 대장장이나 연금술사가 만든 아티팩트라는 건데.”
“혹시 뭔지 아시겠어요?”
“음…… 글쎄다…… 잠깐?”
미르마는 모래가 들어간 병을 쥐고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흔들어도 보고 눈앞까지 가까이 가져다 대며 모래를 확인하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아! 이거. 맞아, 맞아. 너무 오래돼서 까먹을 뻔했네.”
“뭔지 아시겠어요?”
“아니,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랑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녀석을 알고 있지.”
“정말요!”
“그래. 물론 색깔은 다르지만, 그 녀석의 모래는 흰색이었거든. 근데 얘는 검은색인 게 좀 탁해 보이네.”
미르마가 검은색 모래를 살폈다.
근데 마침 마력이 담긴 모래가 살짝 움직이는 것이 마치 그녀의 말에 발끈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아무렴 어때.”
“저기…… 혹시 어디서 보셨나요?”
“동쪽의 왕국 힐리아. 이름 자체가 종교인 성왕국이지.”
“동쪽의 왕국이요?”
“그래…… 분명 거기서…… 성녀! 그 여자가 가지고 있었을 거야.”
기억이 떠오른 미르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녀는 그 모래를 창조의 땅에서 퍼 온 모래라더구나.”
“아…… 근데 거기 모래는 흰색이라고 했죠?”
“그래. 새하얀 백색이지. 그리고 지금의 이 모래와 다르게 거기 모래는 뭐라 해야 될까? 날뛴다고 해야 할까? 일단 살아 있는 생명체 같던데?”
“와…… 살아 움직인다고요?”
“그래, 뭐 술식이 새겨진 것도 아닌데 지 알아서 움직이더구나.”
크롬벨은 신기한 듯 그 모래에 대해 떠올리며 말했다.
“혹시 그 왕국은 어디 있나요?”
“동쪽의 나라니까 동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아……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크롬벨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꽉 막힌 모래에 대한 힌트가 어느 정도 조금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크롬벨이 동쪽의 나라로 가기 전에 서쪽의 군사 국가 다루인의 왕이 거병하여 자이럼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니 크롬벨이 동쪽의 나라에 방문하는 것은 조금 후에 일이었다.
* * *
뚝- 뚝-
천운은 흐르는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으며 일어섰다.
“끄으응~! 차!”
몸에 잠이 없다 해도 피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팔 또한 뻐근하여 한 손을 쉽게 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집이나 가 볼까?”
며칠 전부터 대장간에 백수처럼 짱 박혀 있었으니 간만에 집을 가 볼 생각으로 천운은 대장간을 나왔다.
막상 빈민촌을 향해 걸으니 익숙한 얼굴의 두 남녀가 천운을 향했다.
로벨리아와 구란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일전에 부탁하신 정보대로 놈들의 경로를 찾았습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구란은 씨익 웃으며 천운에게 말했다.
“역시 마법사님이십니다. 어떻게 곧 자이럼과 다루인이 전쟁을 할 것이란 걸 예상하셨는지…… 거의 뭐, 예지의 영역이시군요.”
“아, 네…….”
구란의 칭찬에 어색해하는 천운이었다.
막상 로벨리아는 구란을 보며 인상을 꾸겼고 다시 천운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무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지도와 경로 또한 준비했습니다. 그럼 뭐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아니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저기 그럼 혹시…… 뭐 때문에 이 정보를 조사해 달라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로벨리아는 조심스럽게 물어봤고 천운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말하셔도 이해를 못 할 거예요.”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나중에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마법사님!”
구란은 천운을 보며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로벨리아그 구란의 옆을 따랐다.
그녀는 천운과 헤어지자마자 구란에게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란…… 출세했구나? 네가 나랑 나란히 걷는 날이 오다니.”
“뭐, 그렇지…… 결국 마법사님 덕분이지만.”
솔직히 말해 로벨리아는 이해가 안 됐다.
다루인의 진군 경로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말라는 말이 특히 더 이해가 안 됐다.
물론 자신의 정보 조직이 알아낼 정도이니 국왕 자이럼 또한 이 정보를 알고 있겠지만.
“하…… 이런 돈도 안 되는 자원봉사는 좀 그런데…….”
“뭐, 마법사님과 좋게 지내면 우리야 좋은 거 아니겠나? 그런 의미로 내가 좋은 정보 하나 알려 주지.”
“뭔데?”
“마법사님의 어머니. 그분이 지독한 병에 걸리신 모양이지. 만약 우리가 그분의 약을 찾아 주면 어떨까?”
“흐음…….”
로벨리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마법사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아직 그 상태인 것을 보아 그는 아직 어머니를 치유할 힘이 없다는 말이니.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네?”
“그렇지.”
“좋아, 조사해 볼게.”
로벨리아의 일 처리는 빨랐다.
애초에 마법사의 어머니는 이 근방에서 몇 년을 살았으니 그녀의 병에 관해서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구란…….”
“무슨 일이지?”
“그의 어머니에 관해서는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설마 마법사에게 치료약을 구해 오겠다는 개소리는 지껄이지 않았겠지?”
“나 또한 과거 정보 길드의 보스였다. 심중하기에 그런 일은 없으니 무슨 일인지 말하기나 해.”
“하…… 생각보다 큰일로 번질 수도 있어.”
“무슨 일이지?”
로벨리아는 그 마법사.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마법을 알고 쓸 줄 아는 천재에 대해.
그러나 소년이 한 행동을 보아 아직 감정을 제대로 조절할지 모를 것이다.
어리기에 그렇다는 말이었다.
그 예가 블랙 맘바의 괴멸이었고.
‘만약…….’
꿀꺽-
마법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빈민가 전체가 어떻게 될는지 오싹하기만 한 그녀였다.
* * *
정확히 일주일 뒤.
서쪽의 다루인이 군사를 이끌고 자이럼을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오천의 대군이 일정한 행렬을 맞추어 자이럼을 향했고 그들은 일전의 북쪽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듣고 사기가 크게 올라 있었다.
부우우우우우!
긴 행렬 앞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에 그 수많은 대군이 일제히 멈춰 섰다.
곧바로 다루인의 왕의 막사가 세워졌으며 군대 지휘관들이 회의에 소집되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르안.”
다루인의 왕이 지휘관 중 한 명이 사르안에게 물었다.
“예상대로의 행동이었습니다. 현 자이럼의 왕은 아직 자신이 건재하다고 생각하겠지요.”
“뭐, 어느 정도 도발의 의미로 보낸 사신이긴 한데 이렇게 먹혀들 줄이야.”
“폐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자이럼의 왕이 대군의 앞에 설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그놈의 성격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크흐흐.”
“폐하의 지혜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자, 그럼 이제 여기 모인 저희의 지혜를 모아 전략을 의논해 봅시다.”
왕과 지휘관들의 회의가 시작됐다.
왕의 현명한 전략으로 인해 그들은 자이럼의 왕이 대군을 이끌고 앞장설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커다란 메리트가 주어진 그들은 대마법사 자이럼의 방심을 이끌 방법은 회의하였고 순식간에 막사 안은 시끄럽게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쿠쿵!!
삭!! 쇄액!!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끄아아악!!”
“적습이다!”
“적은! 적은 어디냐!!”
“살려 줘!!”
막사 밖에서 들리는 단말마와 소스라치게 날카로운 굉음.
막사에 왕을 포함한 지휘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적습이라고?”
“보호 마법은?”
그들 또한 자이럼이 자신들의 경로를 알고 있을 것이란 걸 예상했다.
그렇기에 몇 미터 반경의 인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 것인데…….
어떻게…….
펄럭-
곧바로 막사로 들어와 몸을 엎드린 병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왕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적은!”
“그, 그게…… 사람이 아닙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그게…….”
“비키거라!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다루인은 지휘관과 함께 막사를 나왔고 동시에 눈앞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100 정도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쓰러져 있던 것이다.
동시에 다루인의 눈앞에 보인 검은 무언가.
그것은 곧 바닥으로 스르륵- 사라지며 모습을 감췄다.
“저게 대체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