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103
“성녀님을 뵙습니다.”
사방이 하얀 공간.
40대 중년의 인자한 인상의 한 남자가 성녀를 마주 보며 인사를 올렸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 중 하나인 신성교단의 교주 ‘노아 벤딕트’였다.
“오랜만이에요, 노아.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전부 성녀님의 꿈 간섭 덕분이죠. 한데 무슨 일로…….”
“예언입니다.”
성녀의 말에 차분히 몸을 숙이며 예를 취하는 그였다.
교단에서 성녀는 신의 대리자로 알려져 있다.
교단의 교주인 만큼 노아 또한 성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고 믿고 있었다.
“곧 마경 인근에 탑이 하나 생길 겁니다. 던전의 명칭은 절망의 탑. 세계 최대 규모의 크기와 위험도를 가진 탑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위치를 알려 줄 테니 심판자를 배치하세요. 지금이야말로 신성교단의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때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성녀에게 존경을 표했다.
“명심하세요, 노아. 절망의 탑이 발생함과 동시에 마경의 마기가 인계로 넘어올 겁니다.”
“심판자들을 배치하여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지만 아마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겁니다.”
“충분해요.”
성녀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성녀는 노아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번만큼은 예외의 상황. 필요하다면 제 예언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하세요.”
“……성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 *
질 가문의 저택에 질 로벤은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으음, 음냐.”
침대에 파묻혀 사는 영락없는 극락의 생활.
마법 연구를 하다가 자고 연구하고 자고 행복한 히키코모리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하우…….”
로벤은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다시 일어날 시간이었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기 마치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똑똑-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벤님 안에 계십니까? 아니, 계시겠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집사장이었다.
로벤은 그의 말에 대답 없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집사장은 말없이 방문을 열었고 역시나 질 로벤은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들어오라는 말 안 했는데…….”
“들어오지 말라는 말도 안 했죠.”
“에휴…… 무슨 일?”
집사장은 로벤의 반응을 보고 눈치챌 수 있었다.
전혀 모르는구나?
“크롬벨 님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응? 언니?”
언니 또한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히키코모리 기질이 심했다.
다른 점은 나는 결과를 내고 언니는 결과를 못 낸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언니는 일부러 자신의 결과물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을.
뭐 대충 자신의 연구 결과를 보여 주기 싫다거나 그런 이유겠지만 귀찮은 게 싫은 나는 언니와 다르게 결과물을 곧이곧대로 보여 주며 가문에서 공로를 인정받고 있었다.
“언니가 왜?”
질 로벤이 집사장에게 물었고 집사장은 말 대신 폰을 꺼내 U튜브의 영상 하나를 보여 줬다.
“친…… 목회……?”
로벤의 눈이 둥글게 떠지다가.
“언니!!”
곧장 언니의 방으로 달려가는 로벤이었다.
솔직히 황당함을 넘어서 당혹스러웠다.
벌컥!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오니 언니는 1분 전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응? 왔어?”
크롬벨은 그런 로벤을 보며 헤헷하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잘 잤어?”
“언니 그런 것보다 이거!”
“응? 아……. 응.”
“응이라니…….”
반응이 너무 무감하다.
마치 자신이 일이 아닌 것처럼.
“피곤하당…… 오랜만에 같이 잘까?”
언니의 모습에 황당해하는 로벤이었다.
그 뒤로 집사장이 다가와 그런 로벤에게 말했다.
“이런 상태입니다.”
“…….”
“가주님도 긴급히 크롬벨 님과 대화를 나눠 보려 했지만 뭐…… 사이가 안 좋다 보니.”
아무래도 천하태평의 성격은 유전인 모양이다.
언니는 그 성격을 엄마에게 강하게 물려받았고.
다행히 난 가주의 성격을 조금 물려받아 언니 정도는 아니었다.
“후아아아암……. 잠 와…….”
“언니…… 진짜 말 안 할 거야?”
“나중에 일어나고…… 나 요즘 할 일이 많았단 말이…… Zzz.”
그대로 기절하는 언니였다.
언니가 잠이 많은 건 이해가 된다.
언니의 방대한 마력을 충전하라면 하루 정도의 숙면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말이다.
“하…… 지금 아빠는 뭐래요?”
“로벤 님에게 맡겼습니다.”
“그렇겠지…….”
언니와 아버지가 대화를 안 한 지 2년이 지났다.
근데 지금까지 냉대해 온 딸이 알고 보니 친목회였다?
더구나 세상에 2명밖에 존재하지 않은 게이트 소유자였다?
할 이야기 많지만, 대화가 잘 될 리가 있나.
일단 문제아라고 생각하고 내버려 둔 딸인데.
‘그럼 혹시…….’
친목회에 단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괴물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초월자를 의미한다.
언니 또한 초월자라는 말이었다.
“설마 마력이…….”
“정말 경이롭군요……. 저 나이에 초월자가 된 것도 쉽지만은 않은데…….”
크롬벨의 나이는 24살.
강화두보다 한 살 많은 나이였다.
실제로 힘이나 체력 지능은 몰라도 마력만큼 올리기 힘든 스탯은 없었다.
‘언니는 대체 어떻게…….’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기자 회견에서 언니는 한마디도 안 했죠?”
“예.”
“그럼…… 요즘 밖에 시끄러웠던 이유가…….”
“크롬벨 님 덕분입니다.”
“때문이겠죠.”
어쩐지 간간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언니의 고유 스킬이 게이트인 건…….”
“던전 브레이크 사건 때 교관진들 눈앞에 떡하니 보여 줬으니 안 들키는 게 이상한 겁니다.”
“하…….”
로벤은 언니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자신도 언니처럼 생각 없이 마법 연구만 하고 자고 다시 연구하고 자고 백수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한 악영향이 자신에게 미친다면 다른 얘기였다.
“언니!!”
“흡! 어, 뭐야…….”
“일어나!”
곧바로 침대에서 정좌하는 크롬벨.
로벤이 화낼 때는 말을 잘 듣는 그녀였다.
사실 말을 안 들어서 시간을 질질 끌 바에는 그냥 한 번 혼나고 끝나는 게 시간 효율이 좋다고 생각한 크롬벨이었다.
“말해!”
“응? 뭘…….”
“언제 가입했고 초월한 스탯이 뭔지 정확하게 말해.”
대충 기자들이 물어볼 게 예상된 로벤은 그냥 지금 답을 듣고 대신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크롬벨은 정좌하고 눈을 비비며 또박또박 그녀에게 말했다.
“가입은 재작년에 했고 초월은 작년에 초월한 스탯은 마력하고 지능…… 됐지?”
“좋아. 그럼 잘 자.”
“잘 자.”
흐뭇하게 웃는 크롬벨이 다시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로벤은 곧바로 방을 나왔고 집사장이 그런 로벤의 뒤를 따랐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일단 다음을 부탁드릴게요.”
“예. 편히 쉬십시오.”
집사장은 돌아갔고 로벤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시 가벼운 세수를 한 뒤 어제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었다.
“음…….”
로벤은 플라스크 안에 검은 모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다른 플라스크 안에 검은 모래 또한 바라봤다.
둘 다 던전에서 구한 모래이긴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하나는 마력이 담겨 있고 하나는 마력이 없는 그냥 모래였다.
둘의 차이점에 이유를 연구하고 있던 로벤이었다.
“뭘까?”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중 가장 난해한 연구였다.
마력이 담겨 있다는 건 이 모래도 유물로 기능을 한다는 건데 막상 자신의 마력을 불어 넣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유물이지만 기능을 안 하는 애매모호한 존재.
로벤의 연구는 계속됐다.
한편 로벤이 나간 크롬벨의 방에서는.
삐리리리릭-
짜증스럽게 울리는 전화벨에 크롬벨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크롬벨은 빌었다.
제발 저 벨 소리가 10초 안에 꺼지기를…….
1초, 2초…… 10초가 지났다.
“으으으…….”
크롬벨은 감긴 눈으로 머리맡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손을 휘저으며 잡았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누구…… 데 전…… 화야.”
크롬벨식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곧장 끊고 다시 누워 잠을 자려고 하니.
삐리리리리릭-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또 울렸다.
그냥 소리를 꺼 놓을까 하다가 최아진한테 혼날 거 같아 그냥 전화를 받은 크롬벨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전화 너머에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이기에 금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 *
“싫어.”
삑-
천운은 크롬벨에게 부탁할 게 있었고 1초 만에 퇴짜를 맞은 시점이었다.
“역시 안 되나?”
위험한 부탁을 들어주는 그녀가 아니다.
민폐라고 생각하는 부탁이라면 더더욱.
천운이 마경을 가고 싶다고 부탁하자 곧바로 거절하며 전화를 끊은 크롬벨이었다.
“음…….”
딱히 던전에 들어가는 방법을 물색하려고 이런 부탁을 한 건 아니었다.
절망의 탑을 들어가는 방법은 평범하지 않으니 굳이 들어가려 애쓰지 않아도 들어가게 되는 게 절망의 탑이었다.
천운은 그것보다 다른 걱정을 하고 싶어 마경에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던전이 탄생하는 시기가 빠른 만큼 위치 또한 정확히 특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걔를 못 믿는 건 아닌데…….’
한 번 예지의 허점을 발견한 천운이었다.
미래는 언제든 변한다.
그녀 또한 그 미래가 언제 변하는지 모르고 그 변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음…… 역시 부탁하려면 걔밖에 없나?”
페트리샤가 한국에 올 수 있던 이유는 국경을 넘나드는 게이트 소유자 주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안의 존재를 완벽히 숨기고 있는 그녀이니 아무리 내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일단 시도라도 해 보자.
천운은 곧바로 페트리샤에게 전화했다.
-좋아.
너무 싱거운 대답이었다.
뭔가 당황하며 네가 그걸 어떻게! 라고 말하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일단 곧바로 확인해 볼래?
“그래.”
-그럼 사람 안 보이는 조용한 데에서 기다리고 있어.
천운은 곧바로 인적이 드문 화장실로 들어갔고 곧바로 눈앞에 게이트가 열렸다.
-들어와.
그녀의 말대로 천운은 게이트에 들어갔으며 눈앞에는 땅에 나무와 잔디들이 불길한 흑색과 자줏빛을 띠는 마기의 숲 ‘마경’에 도착했다.
천운은 페트리샤에게 물었다.
“여기가 네가 예언한 위치야?”
-맞아. 이 금방에 탑이 나타날 거야. 근데 탑이라기보다는 나무 같은 형태네?
“하…….”
천운은 그녀의 뒷말을 무시하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위치가 좋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
적어도 탑은 마경에서 조금 벗어난 숲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지금 페트리샤가 예언한 탑에 위치가 마경의 근거리인 걸 넘어 마경이었다.
‘이 정도면…….’
절망의 탑은 기존의 탑과 다른 점이 있었다.
다른 기존의 탑은 마기를 흡수하여 던전이 되는 것이지만 절망의 탑은 그 반대로 탑이 발생하는 동시에 마기를 터트려 버린다.
천운이 걱정하는 부분이 이것이었다.
터져 나오는 마기가 지왕을 깨우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그것도 이 정도로 마경과 근거리에 탑이 발생하면 예정보다 빠르게 지왕이 움직인다는 말이었다.
‘역시…….’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
지왕이 인계로 넘어오기 전 탑을 공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