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93
천운의 몸이 어딘가로 이끌리듯 서서히 건져지는 느낌이었다.
심상에서 빠져나온 천운은 천천히 눈을 떴고.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흰 천장이었다.
동시에 커다란 고통이 찾아왔다.
“기억났어…….”
육체의 고통이 아닌 마음의 고통이 찾아왔다.
천운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김천운이 몸에 남아 있던 무언가였다.
‘왜 하필…….’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김천운의 목소리였다.
소년은 말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을 겪게 했냐고.
왜 하필 자신의 부모님이어야 했는지…….
“후…….”
천운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기억 속 감정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천운은 또다시 눈을 감았다.
‘내 기억이 아니야…….’
모든 감정은 녀석의 것이다.
감정의 슬픔은 이해는 하나, 지배당할 필요는 없었다.
[천운아.]
미르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천운의 눈이 다시 떠지기 눈앞의 그녀를 바라봤다.
[몸은 괜찮아?]
“네…….”
미르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어 천운의 이마에 손을 댔다.
[마력을 빌리마.]
사라락-
미르마의 손에서 평온한 기운이 천운의 머리를 맴돌았다.
감정이 진정됐으며 맑아졌고 가쁜 호흡과 고조된 감정이 내려앉았다.
“후…….”
미르마의 마법이 천운의 감정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천운의 얼굴에 평정이 자리 잡았다.
천운은 서서히 눈을 떴고 미르마를 바라봤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그대로였다.
“기억났어요…….”
천운은 떠오른 기억을 그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어요.”
[…….]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천운과 동화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이 공유됐다.
그 분노와 비통함이 고스란히 몸에 남겨져 느껴졌으니 말이다.
천운은 곧바로 침대에 일어나 병실의 문을 열었다.
[어디 가려고.]
‘누나는요?’
[일 때문에 학교를 찾아갔다. 네가 쓰러진 지 5일이 지났어. 학교 쪽에서도 테러가 일어났더군.]
‘5일…… 그것보다 길영트에도 테러가 일어났다고요?’
[그래.]
천운은 힘겨운 몸을 이끌고 병원을 나서려 했다.
곧바로 미르마가 만류했다.
[천천히 움직여,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
‘크게 다친 곳이 팔밖에 없으니까 괜찮아요.’
미르마의 만류에도 천운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천운은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흑색에게 말이다.
‘……!’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은 언제부터 천운의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님이라 생각한 거지?
그러나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천운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병원의 1층 로비에 도착했다.
-긴급 속보입니다.
그때였다.
병원의 티브이에서 익숙한 풍경이 나오는 것은.
적색의 하늘과 무수한 마물들이 들끓는 길영트.
그리고 그곳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손에 따라 마물들은 복종을 했으며 동시에 남자의 명령에 따르는 듯 마물들은 스스로 자결하기 시작했다.
-한 생도가 찍은 영상입니다.
뉴스의 내용은 이러했다.
의문의 아베타로 보이는 남성이 길영트에 나타나 고작 혼자서 탑의 마물들을 없애고 상황을 종결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동안 친목회의 여론은 안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우성과 강화두는 무수한 마물을 본 순간 도주, 한민아 또한 의문의 게이트를 타고 도주.
곧바로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나 상황은 이미 종결된 후였다.
사람들의 여론은 당연히 그 의문의 남자에게로 기울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전부 제각각이었으나 공통적으로는 좋은 여론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S급의 탄생.
길영트를 구한 히어로.
미지의 영웅.
거의 그의 찬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천운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미르마 또한 남자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게 일그러졌다.
[길이 말했지. 녀석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병원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티브이를 향했고
‘이건…….’
주위를 돌아본 천운의 눈가가 흔들렸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저 의문의 남성을 향했다.
언더에 속하는 남자를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에 언뜻 봐도 우호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길영트의 한 교관의 제보에 따르면 남자의 기이한 빛에서는 마물이나 마수만이 가지고 있다는 마기가 느껴졌다고 합니다.
“마기? 그 뭐냐 괴물한티서 나오는 거 아니여?”
“마기라고? 거참 희한하네.”
“그럼 뭐? 마기를 이용해서 저 마물들을 조종시키고 뭐 그랬다는 건가?”
병원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점차 마기라는 그 기운의 평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말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학자들의 말로는 저 의문의 남자는 분명 사람들이 악하다고만 생각한 마기라는 기운을 독자적으로 연구했다는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연구한 방향이 사람을 구했다는 겁니다.
천운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무언가를 암시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재앙…….’
소설의 첫 번째 재앙 ‘혼돈’.
마기로 인한 혼돈의 징조였다.
파지직-
동시에 천운의 머릿속에 또 다른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어둠이 자옥한 넓은 공터.
그곳에 의철과 자신이 있었고.
-너는…….
그 남자.
장발의 남자가 자신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야 해.”
천운은 본능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천운아?]
“죄송해요.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야 해요.”
* * *
“하…… 당했군.”
최아진의 집무실.
그곳에 모인 4명의 인물.
한우성과 최아진, 강화두와 질 크롬벨이 보도되는 뉴스를 보며 인상을 구기기 시작했다.
“역으로 이용당했어요 대장.”
“그래…….”
물론 언젠가는 그들의 정체를 밝힐 생각인 한우성이었다.
그들 자신이 언더의 정체를 숨길 동안 친목회가 언더의 정체를 숨길 동안.
친목회는 언더를 쇠약 시키고 어느 정도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었을 때 그들의 정체를 협회에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이르게 사회에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도 이로운 방향으로 말이다.
“그들이 우리 모두를 잡아 뒀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대장.”
“네 잘못이 아니다.”
한우성은 흑색의 뒤 장발의 남자를 생각했다.
이 모든 흑막은 분명 그 남자라는 것은 확신이었다.
그들의 세력이 모이기도 전에 세간에 자신들을 밝혀낸 것은 분명 그 남자의 계획인 게 분명했다.
‘녀석은 알고 있었어…….’
길영트의 탑 던전이 몇 달 뒤에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직 한우성만이 아는 사실이었지만 녀석들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어느 회차에서도 녀석들은 던전 브레이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그들은 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몰랐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회귀자가 있다.’
그 남자에게 익숙한 기운을 느낀 한우성이었다.
남자의 몸에 흐르는 그 기운은 분명 회귀의 기운이 분명했다.
그것도 지금의 자신과 비교도 안 되는 기운.
“상황이 바뀌었어.”
한우성은 결심이 섰다.
그들의 시선이 한우성을 향했다.
한우성은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야.”
“방법이라니요?”
“단순 무식하게 녀석들을 찾고 미리 없애는 수밖에.”
“…….”
단원들은 한우성의 말에 침묵했다.
“저기…… 대장. 별로 그렇게 현명한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요.”
“미안하다…… 길게 작전을 짜도 소용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나중에 때가 되면 설명해 줄게.”
회귀자가 상대편에 있는 이상 무슨 작전을 짜도 소용이 없을 거다.
최아진이 복잡한 표정으로 한우성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 가지 이거는 묻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질문했다.
“다른 건 좋아요. 대장도 무슨 생각이 있겠죠. 하지만 한민아 씨가 빠지는 이유가 뭐예요?”
“그것도 말 못 해…….”
“……하, 승산이 없을 거예요.”
“미안하다.”
한우성은 그 말에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무수한 회차의 친목회와 언더의 마지막 결전.
그 수많은 회차에서 가장 많이 죽는 동료가 한민아였으니 말이다.
‘죽을 수도 있어. 이렇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면 더더욱…….’
그리고 한우성이 회귀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강화두는 복잡한 시선으로 한우성을 바라봤다.
오직 강화두만이 한우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 * *
한편.
병원의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의철은 누운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뭐지……?’
기억 속의 그 반곱슬머리는 분명 천운이었다.
검은색 편한 저지의 손목에 샌디를 들고 다니는 천운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의 천운과 다르게 입은 거칠고 장난이 많았으며…… 확실히 좀 짜증 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였다.
‘그 기운…….’
의철은 눈을 감았다.
기운과 감각의 감지.
의철은 자신의 몸속 이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을 접근했다.
그 기운은 아직 갈무리되지 않고 몸속에서 온전히 흐르고 있었다.
의철이 그 기운에 다가간 순간.
혼란스러운 기억은 또다시 이어졌다.
-파지직
의철의 몸에서 작은 푸른색의 전류가 흘렀다.
[이건 대체…….]
길은 기이한 눈으로 의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 또한 처음 느껴 보는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기운이었다.
[의철아. 괜찮냐?]
길의 말에도 의철은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 속에 천운뿐만 아니라 그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 바짝 차려! 야 김의철! 김천운 너는 그만 도망가고!
과거에 차가웠으나 서서히 표정이 밝아진 한설아.
-멍청하게 이런 거에 방심하지 마라 김의철!
지금과 다르게 내게 독설이 좀 심한 윤시혁.
-조심해!
친해지다 보니 생각보다 말이 많은 것을 알게 된 질 로벤.
그들은 하나같이 갈라진 땅 사이로 기어 오는 들끓는 마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쿠오오오!!
그 순간 귓가를 찢는 듯한 괴성과 함께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그저 포효 하나만으로 땅이 갈라졌으며 거대한 폭풍이 들이닥쳤다.
눈으로도 그 전부를 담기 힘든 거대한 몸짓.
4개의 다리가 지면에 닿을 때마다 땅이 울렸으며 그의 등 뒤에 붙은 거대한 등딱지에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섬뜩하고 거대한 붉은 눈이 떠졌을 때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을 때였다.
치지직-
상황이 전환됐다.
중간의 무언가가 끊긴 듯 다음 상황으로 넘어간 것이다.
자신은 누군가를 향해 외치며 울고 있었다.
갈라진 땅 넘어.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
그 너머에 천운은 피를 토하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 운 좋은 거 알지? …… 그러니까 꺼져.
의철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천운이 저렇게 피를 흘리는 것도 저 너머에서 쓰러지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5명 중에서 가장 힘없고 용기 없는 녀석이 자신을 지켜 준 것이다.
천운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샌디가 천운을 흔들며 흐느끼고 있었다.
-미안해 샌디야…….
천운은 마지막을 직감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의철의 시선이 허망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철의 눈에 보인 것은…….
“아직 살아 있군요…….”
긴 장발의 남자였다.
그가 천운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