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80
“하하하!”
몽환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어느 유원지였다.
눈을 뜬 한우성은 현재 회전목마를 타며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이 이끌리는 대로 그저 목마에 몸을 맡긴 한우성은.
짝!
자신의 뺨을 때렸다.
‘역시…….’
그러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확! 정신이 든 한우성이 주위를 살폈다.
“후…… 꿈이군. 분명 병실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잠들었지?”
정신을 차린 한우성은 몸을 둘러본 뒤 이상을 눈치챘다.
자신의 몸이 10살 남짓 어려져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 순간 타고 있던 회전목마도 유원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오직 흰 배경만이 남게 되었다.
과거, 정확히 회귀 전에도 한 번 이런 상황을 겪어 본 한우성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성녀.”
사아악-
허공에 하얀 빛 덩어리들이 응집되며 사람의 형태로 변해 갔다.
환한 빛이 그녀의 입을 제외한 얼굴을 가렸으며 몸 전체는 순결함을 나타내듯 흰색의 나팔거리는 로브를 걸쳤으며 그 순결함과 대조되는 듯 묘한 어른스러운 몸매가 나타났다.
한우성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지?”
-저는 초면인데…… 역시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회귀자 한우성.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공간에서 울리고 있었다.
한우성은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여전히 독특한 취향이네.”
-어머, 귀여우셔라.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회귀 전 과거에도 그녀는 허락 없이 꿈을 간섭해 찾아오고는 했다.
뭐, 이유야 여러 개 있지만 대충 예상가는 한우성이었다.
-후훗, 그렇게 까칠하게 말해도 되나요? 제 예언이 필요할 텐데요?
“…….”
묘하게 짜증스러운 말투도 여전하다.
그러나 나오려는 감정은 비웃음이었다.
한우성이 기어코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볼 일이나 말해.”
한우성이 성녀에게 묻자 그녀는 그제야 본론에 들어갔다.
-후훗 그럼…… 친목회에 새 단원 있죠?
“흥! 예언했나 보군.”
-우연히요. 예언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죄송하지만 그를 잠시 만나 봐도 될까요?
“뭔 헛소리를 하려고?”
한우성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후훗, 솔직히 말하면 이건 거래예요. 한우성.
“거래?”
-그냥 허락은 안 해 줄 거 같고…… 아! 이건 어때요? 예언 하나를 알려 주죠. 대신 그를 만나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크흐흣.”
결국 웃음이 터진 한우성이었다.
그녀가 한우성의 행동에 움찔 몸을 떨며 당황했다.
“거래라…… 헛소리군. 내가 응하지 않아도 너는 멋대로 천운을 만나겠지.”
한우성의 말에 그녀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어머, 역시 과거 회기 전 저를 만났군요? 이렇게 저를 잘 아는 걸 보니.
“어차피 선택권은 없겠지. 만나 봐.”
-음? 그렇게 쉽게요.
“그래. 예언 하나 알려 주고.”
-후훗, 알겠습니다.
어차피 거래를 승낙하든 결렬하든 그녀는 무조건 천운을 만날 것이다.
그녀의 멋대로 말이다.
꿈의 간섭은 자신도 막을 수 없을 테니 승낙하여 이득을 보는 쪽을 선택했다.
예언자라 하여도 그녀와 천운이 예지하는 미래는 다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한 달 안에 당신들과 대립하는 집단이 무슨 짓을 저지를 거예요. 그것도 길영트의 던전에서요.
“……그게 끝인가?”
-네. 그러니 조심하세요 한우성.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성녀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리고 미안해요. 일주일이나 시간을 잡아먹어서.
“나는 5일이다.”
-…… 어머 역시 대단하시네요.
샤라락-
그녀의 몸이 빛으로 흩어지며 빛의 덩어리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동시에 한우성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렇게 천운의 꿈으로 이동한 성녀는.
사아악-
빛 덩어리들이 뭉쳐 모습을 드러낸 성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내가 준 선물을 잘 받았나 모르겠네?
성녀가 천운의 꿈에 들어온 시점부터 그녀는 천운의 꿈을 간섭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의 꿈을 간섭하여 원하는 꿈을 이루어지게 만들 수도 또는 악몽을 꾸게 만들 수도 있었다. 꿈의 간섭이란 그런 것이다.
이 꿈 세계에서는 자신은 신과 같은 우월감을 느낀다.
참고로 한우성에게 꾸게 만든 꿈은 악몽이었다.
-어디…… 응?
그리고 천운을 본 그녀는 눈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 * *
천운의 눈에 보인 것은 누군가가 항상 꿈꿔 왔던 아주 평범한 일상들이었다.
“일어났니?”
자상하신 어머니가 아침을 만들고.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났구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풍경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학교 갈 준비하렴. 천운아.”
나는 김천운이 아니다.
-어떻게…….
누군가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죠? 당신의 가족이잖아요.
“어차피 꿈이잖아…….”
-꿈이라 해도…… 당신의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족을 보고 싶지 않았나요?
천운은 잠시 그녀의 말에 침묵했다.
가족이야 보고 싶지만…… 그게 천운의 가족은 아니었다.
-당신의 말대로 꿈이지만…… 감정이 있는 이상 뭔가 느껴지지 않았나요.
그의 말대로 고작 꿈이고 허상일 뿐이지만…….
그런 허상을 원하는 자가 수두룩하다.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희망일수록 더욱 처절하게 원하니 말이다.
그러나 소년의 표정은 너무도 무감했다…….
성녀는 소년에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보통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을 텐데…….’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거나, 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허탈하거나 또는 분노하거나 여러 반응을 예상한 그녀였지만 소년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왜…….
“기억에 없으니까.”
-기억을 잃었다는 말인가요……. 그건 거짓말이군요. 기억에 없다면 이런 꿈을 꿀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거짓말이긴 하나 기억에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꿈은 대체…….
-잃어버린 가족을 보는 눈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마치 남을 보는 듯한 시선이네요.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닌가? 미국의 성녀?”
-?!
천운의 말에 그녀가 흠칫 떨었다.
잠시 당황한 그녀가 달싹거리는 입을 추스르고 되물었다.
-어떻게 저를…….
“꿈속에서 예언을 알려 주는 여신 같은 존재. 미국의 성녀라고밖에 볼 수 없을 거 같아서…….”
천운의 말에 성녀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따지며 말했다.
-저희…… 초면이죠?
“그래.”
-근데 말이 짧으시군요…… 아무리 많이 봐도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
“푸훗.”
그녀의 말에 천운이 피식 조소하며 말했다.
“성녀가 생각보다 속이 좁네.”
-당신이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
“한국말도 잘하네.”
-제 지인 중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정말 당신은 못됐군요?
천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같은 나이끼리 뭔 존대나 하대야?”
-뭐, 뭐?!
천운의 말에 그녀의 입이 당황으로 떡하니 벌어졌다.
성녀의 입술이 옴짝달짝 어버버 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것보다 뭐 때문에 나를 찾아?”
-…….
천운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어차피 그걸 쉽게 알려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 성녀는 천운의 말대로 본론을 말했다.
-한우성이 아끼는 소년이 흥미로워 그저 만나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예…… 당신의 말대로 같은 나이니까요…… 저와 같은 나이에 한우성의 관심을 끌 인재가 누군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음…….”
성녀가? 그저 흥미를 느껴 만나 보고 싶었다라…….
천운은 그 말이 거짓말인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성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천운이었다.
‘그녀를 상대로는 괜찮겠지.’
생각을 정리한 천운이 입을 열었다.
“재앙 때문이겠지…….”
-…….
천운이 흘리듯 말한 말에 그녀가 침묵을 유지했다.
정답이란 말이었다.
지금까지 미래를 예언해 어떻게든 위기를 막은 그녀였지만 이번에 나타날 재앙은 미국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맞지?”
-그, 그래.
그녀는 결국 존대를 포기하고 편하게 말을 놓았다.
같은 나이였다는 게 들킨 시점에서 성녀인 척 고상하게 구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네 말대로야. 후에 예언한 미래는 미국의 힘으로 절대 막을 수 없어.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멀쩡한 한우성 아저씨나 다른 친목회 단원들을 놔두고.”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를 이용하려 했어……. 해 봤자 17살이니까…….
“나를 이용해서 친목회의 도움을 받으려고?”
-그래…….
‘이거는 분명…….’
분명 그게 확실하다.
원작에서 한우성의 눈에 들어온 김의철을 이용하려는 성녀.
의철의 꿈을 간섭해 의철은 성녀와 하나의 거래를 한다.
미국을 도와주는 대신 미래를 알려 주겠다는 거래였다.
‘그것 때문에 한때는 한우성이 김의철을 예언자라고 오해한 적이 있지.’
흠…… 그것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천운은 생각했고 그리고 결론은 당연히.
“싫어.”
-뭐?
“예언이 필요 없거든.”
-예언이 필요 없다니…… 설마!
성녀는 그제야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당황스럽게 말했다.
-뭔가 이상하다 했어. 처음 만난 나를 아는 건 둘째 치고 내 나이까지 알다니…… 너도 예언자야?
“…….”
천운은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정답을 알려 줬다.
말을 안 하니 자기 알아서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다.
‘역시…… 그렇다면 미국은……. 안 돼! 이런 미래를 만들 수는 없어!’
그녀의 기세가 점점 변해 갔다.
또 다른 예언자가 나타났으며 그가 한우성의 친목회 단원이라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패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 상황을 바꿀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
‘죽일 수밖에…….’
한우성의 패를 없애는 것이다.
수아아아아왁!
그녀의 몸이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거대해진 몸은 끝이 없었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이 커진 몸은 그저 천운의 눈으로도 일부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천운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거대해진 이후 장엄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택해!
사아아아악!
그녀의 거대한 검지가 천운을 향했다.
거대한 기세와 풍압을 천운을 억누르며 그녀의 검지가 다가올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내가 여기 있는 한, 너는 영원한 꿈을 꾸겠지. 평생을 악몽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이 거래를 받아들일지!
그녀로서의 죽음은 영원한 꿈이었다.
그녀가 간섭하고 있는 한 천운은 영원한 꿈으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자! 거래를 받아들이고 계약해! 그럼 네 목숨만은 살려 줄게!
그녀의 몸 주위에서 찬란한 빛의 아우라가 고고하게 발했다.
웅장한 위협이 천운을 향했지만 천운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뭐? 무슨…….’
천운은 몸에 흐르는 마력을 감지하고 느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의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몽롱한 정신이 아닌 이상, 자신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꿈이라 자각하니 멀쩡한 정신으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천운은 곧바로 마력을 발산해 머리를 둘러싸 반마의 특성을 발동했다.
파직!
파차창!
동시의 그녀가 만들어 낸 모든 허상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네 고유 스킬인 꿈 간섭은 특이하게 마력이 필요하잖아.”
-아…… 안 돼! 제발!
그녀의 몸이 천천히 사그라져갔다.
그녀와 이어진 링크가 끊어지는 동시에 꿈 간섭이 풀린 것이다.
-너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당황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토해 내는 듯한 어투였다.
천운은 그런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조건을 추가하자. 그러면 거래해 줄게.”
-…….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성녀였다.
얼핏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르륵-
성녀의 심상 속에 얼핏 보인 천운의 미래.
성녀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떨리는 목소리로 천운을 부르는 성녀였다.
그러나 이미 천운의 마력으로 인해 꿈과의 링크가 끊어진 상태였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성녀는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천운에게 뭔가를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조심해!”
“조심하라니?”
“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그녀는 결국 모든 말을 전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뒤 천운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고민에 빠졌다.
“뭘 조심하라는 건지…… 에휴…… 민폐네.”
천운이 그녀의 만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능력에는 부작용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꿈 간섭을 당한 사람이 말이다.
아마 일주일간 잠에서 일어나지 못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