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70
시간은 새벽 6시.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화원.
잠에서 일어난 이한은 화원의 꽃에 물을 주며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화원의 주인이 누구인가?
힘 하나만으로 S급에 도달한 영웅 포스맨의 집이었다.
그러나 막상 느껴지는 기분은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평온했다.
“특이한 꽃이 많네.”
딱히 물을 주고 싶어서 주는 건 아니었다.
집에 머물게 해 준 포스맨의 부탁이니 말이다.
아직도 부탁하는 포스맨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오늘 저녁에 가주를 만나고 오겠다. 아카데미를 가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해라.’
‘그럼 그 저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부탁이요?’
‘내일 아침 꽃에 물 좀 주면 고맙겠군. 아마 늦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근엄하며 힘 있는 말투치고는 평범한 부탁이었다.
어차피 등교도 못 했고…….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참 오랜만인 거 같다.
“응? 아, 오셨어요?”
꽃에 물을 주던 중.
저 멀리서 강화두의 모습이 보였다.
이한은 정중하게 인사했으나 강화두의 기분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저, 저기…….”
“미안하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잠시 안으로 들어오거라.”
“아, 네…….”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걸까?
안 좋게 해결됐나?
“동생은?”
“아직 자고 있어요.”
“그런가…….”
화원의 지하.
둥근 탁자를 중심으로 마주 보며 앉은 이한과 강화두.
강화두의 표정에는 언뜻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일단 네게 사과해야겠구나.”
“네? 그게 무슨…….”
“숨겨야 하는 상황이 있으니 전부를 말해 줄 수 없다만.”
강화두는 챙겨 놓은 단도를 꺼냈다.
이한 또한 잘 아는 단도였다.
가문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암 가문의 비보 ‘무암’이었다.
“혹시 가주님은……?”
“죽지는 않았다만…… 길게 얘기해 줄 수는 없겠구나.”
“저기 포스맨 님.”
이한은 똑바로 강화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딱히 가주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습니다. 포스맨 님을 상대로 질문할 자신도 없고요. 그저…….”
이한은 포스맨인 건네준 무암을 보며 말했다.
“이걸 저에게 주셨다는 뜻은 가주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거겠죠.”
“그래. 그는 더 이상 가주가 아니다.”
강화두의 말에도 이한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말을 수긍하며 대답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주의 행위는 독단이었으니 아마 가문의 장로들이 너와 네 동생을 찾고 있을 거다.”
이한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화두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을 이었다.
“감사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뭐,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내가 포스맨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라.”
“네. 알겠습니다.”
이연을 깨우기 위해 자리에 일어서는 이한이었다.
그런 이한을 보며 잠시 더운 한숨을 쉰 강화두가 말했다.
“가주가 사라지면 그 후계는 네가 잇는 거냐?”
“가문의 현 가주가 사라진 이상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가……. 너는 암 가문의 피를 적게 이어받았다지?”
형님에게 들은 말이다.
그 증거로 그녀의 고유 스킬은 의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름 불쾌하게 들렸을 수도 있었으나 이한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예.”
“그런가…… 우성 형님이 말씀하셨다. 가주가 널 노리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저 가주 자리 때문에 저를 죽이려 한 게 아니라요?”
“네 고유 스킬과 관련 있다고 형님은 추측했다만……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 무암을 잘 가지고 있으라는군.”
잠시 무암을 바라보는 이한의 눈빛은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이한은 그저 강화두의 말을 수긍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라.”
강화두는 근처에 놓인 수첩을 한 장 찢어 자신의 전화번호를 넘겼다.
강화두의 행동에 이연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저기 이건…….”
“이한량은 아마 무암을 노릴 거다. 그렇다고 가문의 비보를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지. 네게 넘기는 대신 문제가 생기면 내게 연락해라.”
“감사합니다.”
이한은 강화두를 보며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많이…… 친절하시네요.”
“이만 가 봐라.”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이한은 이연을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코를 골며 자는 이연이었다.
그런 이연을 바라보던 시선이 무암을 향했다.
가주는 처음부터 내게 가주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 이유가 이 무암에 있다면…….
“딸보다 못하다는 거겠네…….”
가문의 비보가 딸보다 중요하다니…….
무암을 바라보는 이한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지만, 그 분노는 가주에게 향하고 있었다.
무암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걸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 * *
“연락이 안 오네.”
의철이 인터뷰를 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연락은커녕 문자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음…… 역시 이 방법도 힘든가?’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는 의철이었다.
분명 미리 준비한 동생의 사진과 연락처.
최대한 서글픈 표정으로 은인을 찾고 싶다며 덕분에 제 여동생이 살았습니다아아! 라고 말한 거까지는 기억이 난다.
문제가 있다면 아마 그거겠지?
‘아마 걔는 내 동생 얼굴도 모르겠지…….’
부모님은 한 여아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마수에게 뛰어들었고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 여아의 얼굴을 알 리가 있나…….
‘찜찜하네…….’
자신의 소중한 동생은 살았고 그 소년의 부모님은 돌아가셨으니…….
하지만 지금으로서 어떠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나 가야겠다. 나중에 연락 오겠지.”
띠리리리링-
“어? 어어!”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에 의철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저기……?”
폰 너머로 들리는 어느 중년 여성의 목소리.
옆집 아주머니였다.
괜히 기대하여 한숨이 나왔지만,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의철아?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 어 그래. 근데 이게 뭐니?
“뭐가요?”
-통장 잔고가 이상해서 말이다. 1,000만 원이라니…….
항상 의철이 집에 없을 때 의지를 돌봐 주던 게 옆집 아주머니였다.
길영트에 들어가기 전 늦게까지 알바할 때도 입학시험으로 일주일간 집을 비웠을 때도 항상 그녀가 의지를 돌봐 줬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런 큰돈은…….
“괜찮아요. 여유가 생겼거든요.”
천운과 던전에서 얻은 유물이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팔렸다.
그 심상치 않은 분홍색 액이 들어간 유물이 5억이라니…….
효과가 뭐였더라? 탈모약이었나?
여튼 내게 필요 없는 유물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후훗, 의지는 좋겠네 오빠가 돈을 많이 벌어서.
“뭘요…… 고생만 시켰죠.”
-그래 맞아! 이 돈으로 의지 맛있는 거 사 주면 되겠다. 너도 몸 조심하렴, 괜히 아베타가 위험한 직업이 아니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또 전화 드릴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삑-
아주머니와의 통화를 끊으니 허전함이 공간을 메웠다.
지저귀는 참새 소리에 의철은 창문을 열었다.
동시에 추운 바람이 살며시 돌아와 창문을 다시 닫게 만들었다.
별거 아닌 행동에 시간을 허비하며 아카데미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아침 훈련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늦게 일어났네요.”
[나중에 하거라.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오늘은 봐주시는 거예요?”
[아니. 저녁에 몰아서 시키려고.]
검성의 말에 한순간 의철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지만 별수 없었다.
아침 7시라 해도 길에게는 늦잠이나 마찬가지였다.
“별수 없죠. 제 잘못인데.”
[훌륭한 마음가짐이군.]
“그냥 포기한 거예요.”
톡톡-
그때였다.
창문의 노크 소리에 의철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창문에는 자신도 잘 아는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의철이 황급히 헐레벌떡 뛰어가 창문을 열었다.
“그, 그 분명 한우성 영웅님 맞죠?”
“그저께 봤을 때하고는 반응이 다르네?”
“그때는 실감이 안 나서……. 그리고 멀쩡한 문을 놔두고 여긴 웬일로…….”
잠시 자신의 턱을 긁적이던 한우성이 의철을 보며 말했다.
“너 나랑 거래 하나 하지 않을래?”
“거래요?”
아침부터 불쑥 찾아온 그가 말한 황당한 말에 의철은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암 가문의 본가에 집회실.
넓은 직사각형의 탁자에 둘러싼 가문의 다섯 장로가 허탈한 표정으로 이한과 이연을 보며 회의를 시작했다.
그 상석에 앉은 이한은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들었으며 이연은 그저 언니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문의 가주가 행방불명이라니요?”
“가문의 정보기관인 블랙 앤트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그럼 행방불명이 아니라 습격을 받았다는 거잖습니까! 우리 암 가문을 습격하다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소!”
그중 가장 노련한 1장로가 무심한 표정으로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습격자들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말입니까?”
“누굽니까? 친목회라도 됩니까?”
“예. 친목회의 한우성과 포스맨입니다.”
1장로의 말에 듣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크게 떠지며 당황하고 있었다.
“포스맨은 그렇다 치고 한우성까지 말입니까? 대체 그들이 왜……?”
여태껏 침묵을 유지하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지금부터 제가 하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2장로의 말에 이한은 차근히 모든 상황의 정황을 설명했다.
듣고 있던 장로들의 표정은 처음에는 담담했으나 들을수록 뭔가 말도 안 되다는 식의 황당한 표정으로 점차 변해 갔다.
“그게 무슨……. 그러니까 가문의 가주께서 빌런과 결탁을 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저를 죽이려 했죠.”
“딸을 감싸려고 그런 행동을 할 일은…… 아마 없겠죠.”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말게. 시간 낭비니…….”
“이런…….”
1장로가 근심 어린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일단은 본래의 의제로 돌아가지요…….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먼저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모인 이유는 가주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거기서 이한은 가문의 비보인 무암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직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암. 본래라면 전 가주였던 아버지만이 사용할 수 있던 유물이지요. 행방불명이 되기 전 이것을 남겨 놓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렇군요.”
“무암을 사용하려면 현 가주님께 인정을 받는 것, 아니면.”
이한이 고개를 들어 가주들을 바라봤다.
“장로님을 포함한 암 가문의 모든 혈통에 인정받아야 하죠.”
이한의 말에 1장로가 뒤이어 말했다.
“전 가주의 허락은 필요 없을 겁니다. 무암으로부터 버려진 자의 허락은 받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죠. 무암이 주인을 버렸을 때 자연스레 다음 대의 가주를 선택할 시기라는 거죠. 그것이 무암이 다음 가주를 정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모든 장로가 이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한은 탁자 위에 올려둔 무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현 상황을 봤을 때 가주의 뒤를 이을 자는 이한 님밖에 없군요.”
고개를 숙인 1장로가 이한을 향해 말했다.
그 말투에 정중함이 묻어 나왔다.
“1장로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1장로를 시작으로 장로들은 이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서서히 무암으로 모였으며 마지막 한 명인 이연의 마력까지 무암으로 흡수되었다.
마지막 이연이 언니이자 가주가 된 이한을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
이한은 무암에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
헌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암의 반응이 옅다 못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한 얼굴로 1장로를 바라보니 그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침음을 흘렸다.
“허…… 이게 대체 무슨…… 설마!”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한이 정중하게 물어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한 님과 이연 님에게는 비밀로 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
“무암은 암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혈족에게 인정받아야 사용할 수 있는 유물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딱 한 명. 가문을 버리긴 했으나 암 가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지요.”
“예?! 그게 누굽니까?”
잠시 눈을 감은 생각에 잠긴 1장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신아 님. 이한 님의 고모가 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