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소설 속 운만렙 캐릭터가 되었다-54화 (54/176)

제54화

#53

“지옥염이에요…… 저 마법은…….”

미르마에게 들은 마법 명을 그녀에게 알려 줬다.

땅바닥 밑에서 솟구치는 붉은 화염.

‘지옥염’.

문자 그대로의 광경을 보여 주는 마법이었다.

“지옥염…….”

그녀의 발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점점 그녀의 발걸음은 솟구치는 화염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천운은 설마 하는 느낌으로 지켜보다 이내 그녀의 망토에 달린 모자를 잡아당겼다.

“그만. 더 가면 진짜 위험해요.”

설마설마했는데, 저 솟구치는 화염에 손을 대려는 그녀였다.

샌디의 20이나 되는 마력을 쥐어짜 내 발동한 마법이다.

그녀가 손을 댄다면 그냥으론 안 끝날 게 분명하다.

그녀의 눈썹이 팔자가 되며 나를 노려봤다.

천운은 무시하고 미르마에게 마법의 등급을 물어봤다.

‘미르마 저 마법은?’

[상급에 가까운 중급 마법이다.]

역시나.

효과가 그냥 중급이라기에는 유지되는 지속 시간과 필요한 마력량이 남달랐으니 말이다.

“로벤 씨 일단 유물이나 챙기죠.”

질 로벤은 지그시 나를 보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히끅- 뭔가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천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지그시 그녀의 시선이 모자를 붙잡고 있는 손목으로 향했다.

그녀는 손목을 보자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네? 손목이요?”

천운은 그녀의 모자를 잡고 있는 손목을 바라봤다.

얕게 그어진 선이 여러 개인 흉터.

그 순간 천운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 갔다.

‘뭐야?! 샌디 어디 갔어?!’

항상 내게 떨어질 때 일부만이 분열하여 손목에 남아 있던 샌디였다.

그 샌디는 현재 술식이 발현되는 마법 주변에 널브러져 부르르- 떨고 있었다.

‘설마!’

가지고 있는 마력의 전부를 사용하기 위해 샌디는 내 몸에서 분열도 하지 않고 떨어져 나간 모양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처음이니 예상도 못했다.

[저런……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미르마 또한 내 손목에 흉터를 인상을 구겼다.

그녀들의 반응에 머리가 당기는 천운이었다.

“어…… 그게?”

일단 질 로벤부터였다.

“저 죄송한데. 이거 비밀로 해 줄 수 있어요?”

별말 없이 그저 천운을 바라보는 질 로벤.

그녀는 뭔가 부담스럽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고마워요. 그럼 유물이나 확인해 보죠.”

나는 크게 설명 없이 어영부영 넘어가려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손목의 흉터를 그녀에게 보여 줬으니 말이다.

천운은 곧바로 샌디를 주워 손목 밴드로 만든 뒤 손목을 가렸다.

* * *

‘이 기분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애처롭게 쳐다보는 미르마와 질 로벤.

그러나 이미 익숙해진 천운은 그런 시선을 무시하고 유물을 확인할 뿐이었다.

‘어디 보자. 이 던전은 후에 두고두고 등장시키려 하다 결국에는 소설 한 줄에도 못 써낸 던전이었지?’

과거 소설을 정리한 설정집에 던전의 존재는 만들어 놨으나 결국 심도 있게 짜 놓지 못한 잊힌 던전이었다.

그러니 천운 또한 이 던전의 유물을 몰라 기대되는 상태였다.

‘어디 보자 유물이……. 응?’

유물을 확인하는 천운.

그리고 알 수 있던 사실은 꽝이었다.

{자주색 수정 반지}

등급 : D급

설명 : 자주색 수정이 장식된 반지이다.

<위치 추적 : 적색 반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일회용)>

{적색 수정 반지}

등급 : D급

설명 : 적색 수정이 장식된 반지이다.

<위치 추적 : 자주색 반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일회용)>

멀리서 봐도 어렴풋이 반지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꽝이었다.

별 필요도 없는 유물.

하긴, 던전 자체가 수준 낮은 어린놈이다 보니까 유물도 이 모양 이 꼴인 모양이다.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두 반지를 주머니에 넣는 천운이었다.

‘괜히 시간하고 힘만 뺏네.’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은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에휴, 그 고생하셨어요. 혹시 이 유물 가지실래요?”

혹시 몰라 그녀에게 반지를 내밀어 봤지만 필요 없다고 한다.

천운은 다시 반지를 주머니에 도로 넣고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출구를 빠져나온 질 로벤과 김천운.

하늘은 이미 노을이 지고 서서히 밤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뭐, 무슨 일정 있어요? 물론 없어도 헤어지긴 할 건데.”

“없어.”

“음…… 그래요?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는 거로……. 일단 고마웠어요. 그럼 나중에 또 봐요.”

천운은 곧바로 그녀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천천히 풀숲으로 향하는 김천운.

그런 천운을 향해 질 로벤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조심해…….”

“응?”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천운.

천운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쪽도요. 아카데미에서 봐요.”

* * *

밤을 새워가며 마물을 학살해 온 윤시혁.

그런 그를 노리는 4명의 응시생이 있었다.

그들은 윤시혁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풀숲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쉬지도 않고 숲을 행보하는 그의 발걸음.

그들은 윤시혁이 지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이 아무리 4대 가문이며 검성의 손자라도 사람인 이상 피로가 몸에 축적될 게 분명할 터.

금색 패를 노리는 그들로서 지금의 윤시혁만큼 좋은 사냥감은 없었다.

“정말로 할 거야?”

“그럼 안 하게? 저 바봐. 딱 보면 뭔가 감이 안 오냐? 몰골만 보면 피곤에 찌들어 당장 쓰러질 거 같잖아.”

“그래도…….”

“에휴 이 녀석은 소심해서 어떻게 살아남냐? 저 윤시혁을 탈락시킬 기회인데.”

그중 소심한 말을 했던 이원석은 윤시혁을 바라봤다.

확실히 몰골이 장난 아니긴 했다.

늘어선 다크서클과 부스스한 머릿결.

그의 하룻밤은 힘든 고난이었다는 듯이 뼈저리게 느껴져 왔다.

그런데도 망설여지는 이원석이었다.

그의 독기에 찬 눈빛과 기세는 여전했으니 말이다.

“여, 역시 난 빠질래.”

“칫, 뭐 알아서 해라. 얘들아 해치우자!”

“그래!”

무리의 리더 격인 차중후가 윤시혁을 향해 삿대질하며 달려들 준비를 했다.

나머지 두 명 또한 그의 말에 따라 조심스레 무기를 꺼내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순간.

휭!

바람이 일렁였다.

그들을 가리던 풀들은 횡으로 반듯하게 잘려 나갔고 윤시혁을 향해 삿대질을 하던 차중후나 나머지 달려들 준비를 하던 두 명이 한순간에 조끼가 발동되어 귀환되었다.

그들은 시험에서 탈락한 것이다.

“힉, 히이익!”

경악서린 눈동자로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지는 이원석.

그의 앞에 서슬 퍼런 안광을 흘리는 윤시혁이 있었다.

그러나 윤시혁은 그의 반응을 보고 그저 지나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살 수 있었던 이원석이었다.

‘왜……?’

머릿속에 연신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이유를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살았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원석이었다.

윤시혁의 의도를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자신이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대충 뭐, 자신 같은 놈은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의중이겠지.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윤시혁은 놈을 상대할 가치도 못 느꼈다고 생각했다.

‘분노가 풀리지 않는다.’

분풀이로 하룻밤을 새워 가며 마수를 잡았다.

종종 자신에게 덤벼드는 얼간이들을 잡아 탈락시켰다.

하지만 마음속에 북받쳐 오는 분노는 풀리기는커녕 고뇌라는 감정이 마음속을 비집어 왔다.

‘그놈을…… 그놈을 찾아야 한다.’

모든 분노의 원인은 그 녀석이 분명했다.

첫 만남부터 거슬리게 만든 남자.

그의 발걸음은 녀석을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털썩-

결국 몸은 한계를 맞이하고 말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손과 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윤시혁의 눈은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이는 희미한 사람의 인영.

그는 자신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했던 이원석이었다.

‘이놈을 쓰러트렸어야 했어…….’

그런 후회가 막연하게 들었지만, 그전에도 의식의 흐름이 끊기는 윤시혁이었다.

* * *

“크윽……!”

윤시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 보인 것은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과 그 옆에 주저앉아 있는 이원석이었다.

이원석은 윤시혁이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왜 탈락시키지 않은 거지? 금색 패를 쉽게 얻어 갈 기회였다.”

반대로 윤시혁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이원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윤시혁 씨도 저를 살려 줬잖아요.”

“그건 살려 준 게 아니다. 무시한 거지.”

“예? 그게 그거 아니에요?”

“거참 어이가 없군.”

윤시혁은 곧장 자리를 뜨려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 이원석은 손사래 치며 말리고 있었다.

“어, 어 기다리세요. 보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 좀 주무시고 움직이세요. 이제 밤인데. 제가 망볼게요.”

그의 행동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윤시혁이었다.

“나를 도와준다고 나오는 것은 없을 거다.”

“예? 뭐가요?”

“뭔가를 바라고 행동했을 게 분명해 보이니 말이다.”

윤시혁의 말에 오히려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는 이원석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안 바라고 그저. 그, 그게 이건 저희 할아버지 유언인데요.”

유언까지 나오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생각보다 호기심이 일렀다.

‘얼마나 거창한 이유이기에…….’

결국 모닥불 근처에 털썩 다시 앉은 윤시혁이었다.

“그, 별건 아니고 받은 은혜는 두 배로 갚으라고 했거든요. 헤헷.”

아니, 괜한 호기심이었다.

윤시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런…… 개 같은 경우가…….’

한계를 맞이한 윤시혁의 몸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더 일어나려는 동작 자체가 무거웠으며 뼈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이니 말이다.

윤시혁은 별수 없이 놈의 투 머치 토크를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

그저 자신의 부족한 기량으로 인해 이놈에 시시한 잡담을 들어야 된다니…….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원석은 윤시혁을 앞에 두고 신명 나게 떠들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검성은 어떤 분이세요?”

‘이자식이.’

생각보다 당돌한 새끼였다. 자신을 알면 자신의 앞에서 검성의 얘기를 꺼내면 안 될 것도 분명 알고 있을 터.

몸만 제대로 움직이면 놈을 조질 생각으로 가득 찬 윤시혁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솟구치는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혔다.

몸에 찌든 피로가 사라져서 그런가?

그의 얘기를 어느 정도 계속 들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옛날부터 궁금했거든요. 검성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아니…… 너 같은 놈은 마음에 들어 하겠군. 곧장 검성의 앞에 찾아가서 검술을 가르쳐 달라 빌면 가르쳐 줄 게 분명하다.”

검성을 향한 조롱이 담긴 비아냥이었다.

실제로 검성은 자신보다 한참 약한 그놈을 후계자로 선택했으니 말이다.

윤시혁의 말에 의뭉스럽게 입을 말하는 이원석이었다.

“진짜요?”

“그래.”

“그래요? 음…… 근데 별로 배우고 싶지는 않네요.”

“뭐?”

돌려서 말할 수도 있을 법한데 적나라하게 말하는 이원석였다.

그의 의중이 이해가 안 되는 윤시혁이었다.

보통 검을 쓰는 아베타라면 한 번쯤은 검성의 앞에 가르침을 받고 싶어 안달인데 뭐도 아닌 이 녀석은 그저 대놓고 거부를 하고 있었다.

“왜?”

“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이게 윤시혁 씨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기도 하고.”

“말해라.”

윤시혁은 단호했다.

언뜻 들으면 협박과도 비슷한 말투.

이원석은 별수 없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나쁘게 말하면 필요 없다고 할까. 좋게 말하면 검성님의 검술을 굳이 배울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할까.”

둘 다 나쁘게 말한 듯한 이유였다.

이원석는 말을 덧붙여 설명에 들어갔다.

“그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자신에게 안 맞는 거. 일단 배워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저랑 안 어울릴 거 같거든요.”

“어처구니없이 오만한 이유군. 너도 검을 쓰는 놈이면서 검성의 검술은 필요 없다?”

“역시 그렇죠? 예전에 이 소리를 친구한테도 했는데 그 뭐냐? 지랄하지 말라던데요. 푸훗…….”

그 친구의 말에 자신도 동감이다.

자신과 안 맞아서 배우기 싫다니, 그저 배우지 못한다는 핑계를 돌려서 말한 듯이 들렸으니까.

“뭐, 어쨌든 결론은 검성의 검술이라도 사람마다 맞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리고 아마 무례가 들겠지만 윤시혁 씨도.”

“더 이상 말하면 탈락으로는 안 끝날 거다.”

“넵”

곧장 입을 꾹 닫는 이원석.

윤시혁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윤시혁은 서서히 일어나 풀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적당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 거느리기 힘든 몸이었다.

오늘은 피로를 풀기 위해 쉴 생각이지만 적어도 이원석의 옆에서는 아니었다.

“아, 저 그게 안녕히 가세요.”

이원석은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어두운 숲을 헤쳐 나가는 윤시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