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45
‘여전히 무식한 해결 방식이네. 저 아저씨는.’
상담실을 나온 천운은 몸이 피곤에 찌든 느낌이었다.
불과 하루 만에 여러 일이 있었다.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차진혁과 본래 스토리상 중반부에 나오는 포스맨 ‘강화두’.
어떻게 일이 잘 해결된 거 같긴 한데 한 번에 여러 일이 겹쳐 혼이 빠질 기세다.
더구나 포스맨 때는 더욱 그랬다.
포스맨의 성정을 알고 있어 다행이지.
정면에서 맛본 그 패도적인 위압은 불과 몇 분 만에 사람의 정신을 쭈글하게 만들 위협이었다.
‘곧바로 수업을 들으려 했는데,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몇 분 뒤에 수업이 끝나는 시간 때다.
이미 들어가기에도 늦었고 생각보다 모아 둔 포인트가 넉넉하니 하루 정도 편히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미르마는 아마 도서실에 있으려나.’
곧장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던 천운의 눈에 도서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코앞이니 굳이 전음을 보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천운은 조용히 도서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 수업이 안 끝나서 그런지 사람 한 명 없는 조용한 도서실이었다.
‘저기 계시네.’
천운의 발걸음은 도서실 안쪽에서 몰래 책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직까지 눈치 못 채고 심각한 표정으로 독서를 하는 미르마였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샌디의 일부가 떼어진 방울토마토 크기의 미니 샌디였다.
“미르마.”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책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돌린 미르마였다.
[으, 응? 천운아 지금은 수업 시간 아니야?]
“사정이 있어서요.”
어제저녁부터 보이지 않던 미르마.
그녀는 밤을 새워 가며 도서실에 책을 넘기고 있었다.
[천운아.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네. 저번에 얘기하다 말았죠?”
불과 2일 전.
천운의 마력 특성으로 인해 묻힌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뭘 물어볼지 예상이 가는 천운이었다.
[반대였구나. 처음에는 네가 넘어온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어.]
“…….”
[내가 다른 세상에 넘어온 거구나.]
뭐, 금방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사실을 알았으니, 자신에게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많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실에 대답할 의향이 있었던 천운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가 내게 할 질문 중 하나는 예상이 가기도 했다.
[혹시 넌 알고 있었니? 내 세계의 얘기를 했을 때도 덤덤하게 들었잖아.]
“아니요. 미르마는 어떻게 보면 오래 사신 분이니 옛날 얘기하시는 줄 알았죠.”
[하…….]
잠시 허망한 듯 공중에서 비틀거리는 미르마.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정보를 모았다. 육신이 없어 몸은 피로하지 않으나 정신적인 충격은 큰 모양이다.
[맞아! 그놈!]
그때 무언가 번뜩 생각났는지 천운을 보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검성! 그래. 그 녀석을 만나야겠어.]
“의철이를 말하시는 거죠?”
[그래. 그 아이에게 녀석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어. 전혀 연관 없다고 보기는 힘들 거야.]
“마침 저도 볼 일이 있긴 한데. 어차피 수업 중이고 저녁에 만나면 될 거예요. 지금은 좀 피곤하네요.”
[응? 무슨 일?]
당연히 도서실에 있던 미르마는 천운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천운은 미르마와 함께 도서실을 나오며 기숙사를 향했다.
기숙사를 향하는 도중에 미르마에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을 얘기한 천운이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미르마는 그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위로해 주었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 * *
후우웅!
기숙사 지하에 1인 훈련 룸.
온 벽면이 흰색으로 덧칠 된 그 방의 중심에서 거대한 대검을 연신 휘두르는 김의철이 있었다.
그의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를 찢듯이 후웅-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대검의 잔상만을 그려내고 있었다. 누군가 그 광경을 봤다면 압도됐을 속도와 위력이었으나, 의철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게 아니야.]
그의 옆에서 의철에게 조언해 주는 길이었다.
자신의 검술 스승인 길은 매번 이렇게 의철의 자세를 봐주며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그저 힘 있게 빠르게 휘두른다는 생각은 더 이상하면 안 된다. 그것을 토대로 검격에 의지를 불어넣고 원하는 검을 현상화해라. 너 또한 원하는 검이 있을 테니까. 몸은 어느 정도 완성됐으니 이제 네가 원하는 검을 찾기만 하면 될 거다.]
어려우며 난잡한 피드백이다.
그러나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늘 하던 대로 자신의 감각에 맡길 뿐이었다.
[그래. 전부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느끼는 감각이다. 그저 내가 한 말을 토대로 네가 가장 잘하는 감각을 느껴 봐라.]
길 또한 조언의 이해 보다 의철의 감각을 맡기고 있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시간보다 몸의 감각으로 찾는 게 더 빨랐으니 말이다.
긴 설명보다 한 번 휘두르는 검.
의철의 빠른 성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훙! 팡!
‘역시 대단하군. 이미 스스로의 의지로 무아지경에 들어설 줄이야.’
의철의 몸은 그저 불필요한 동작 하나 없이 검을 휘두르고 움직이며 길이 생각했던 최상의 자세를 취하며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검 하나에 집중되었으며 이채 없는 눈빛은 무아에 빠진 듯 그저 자신이 들고 있는 대검을 바라보며 연이어 동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지이잉-
시뮬레이터 룸에 문이 열리고 그곳에 들어선 한 소년이 있었다.
길 또한 소년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응? 저 녀석은 분명?]
김천운.
천운은 의철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저 벽면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 뒤.
“후아아…… 죽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대짜로 드러눕는 의철이였다.
의식의 저편에서 돌아온 김의철은 그제야 이 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의철은 그를 보며 씨익- 웃더니 살갑게 맞이해 주었다.
“언제 왔어? 몸은 괜찮냐?”
“덕분에.”
천운은 들고 있던 생수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네. 안 힘드냐?”
“좀 힘들긴 한데 일상이라서. 근데 무슨 일이야?”
“뭐 고맙다는 말 전할 겸 너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나를?”
그 순간.
천운의 뒤 허공에서 투명한 공간에 물감이 번지듯 그녀의 형체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의철은 미간을 좁히며 경계를 했으며 길은 그녀를 본 뒤 그 또한 형체를 드러냈다.
[설마…… 역시 곁에 있었군.]
[역시 너였구나. 길.]
그들의 대화에 의철은 당황하고 있었으며 조심스레 길에게 물어봤다.
“혹시 아는 분이세요?”
[그녀 또한 나와 같이 하나의 격에 도달한 인간. ‘현자’다.]
“예?”
의철은 천운의 곁에 있는 미르마를 바라봤다.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얼굴과 꿀단지 같은 금발. 많이 봐야 자신과 동갑 정도로밖에 볼 수 없는 그녀의 앳된 외모.
그런 그녀가 현자라니…….
의철의 마음이 이해가 간 길은 그녀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라. 100살은 더 먹은 노인네야.]
“예, 예? 진짜요?”
놀람에 희번덕 떠진 눈은 다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믿기 힘든 얼굴을 하는 의철이었다.
그것을 포함해 천운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던 의철이었다.
“그럼…… 그런 분이 왜 저를?”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길에게 볼 일이 있었단다.]
그녀가 길에게 다가가며 천운과 의철을 한번 흘겨보고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둘이서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단다.]
“네. 알겠어요. 그럼 기숙사에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천운은 별말 없이 자동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의철 또한 천운을 뒤따라 밖으로 나왔으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의철이 천운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현자라니……. 설마 이게 너 고유 스킬인 거야?”
김의철이 각성을 한 뒤.
어느 정도 자신의 능력과 힘의 성장 뒤에야 발현된다는 고유 스킬은 의철이 각성하자마자 발현됐다.
그것은 듣도 보도 못한 고유 스킬이었다.
[검성 강림]
그가 처음 이 스킬을 썼을 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스킬이며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나타난 존재는 이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상상도 못 한 검술을 내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가 진짜인 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미르마는 어쩌다 보니 만난 거고. 너처럼 고유 스킬은 아니야.”
“어?! 그걸 어떻게.”
“네가 방금 고유 스킬이냐고 물어봤으니까.”
“아, 뭐 그것도 그렇겠네.”
터벅터벅-
막상 수련을 마치고 할 일이 없던 의철이었으며, 의철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던 천운이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천운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옥상.
생도들의 휴식처인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천운은 옥상에 향하기 전 잠시 매점에 들르기로 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네가 사 주게?”
“그래.”
“오! 땡큐!”
내 말에 부담 없이 여러 먹거리를 고르는 의철이었다.
의철의 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 그가 집은 빈곤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식당에서도 안 보이는 의철이었다.
‘조만간 던전에 들어가서 돈을 벌긴 할 건데 아직은 아니겠지.’
길영트에 합격한 생도들은 길영트에서 독점한 던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또한 던전에서 얻은 전유물의 80퍼를 소지할 수 있으며 의철은 조만간 6등급 던전에 들어가 솔로 레이드를 시작한다. 물론 6등급 던전은 1학년은커녕 2학년도 공략하기 힘든 난이도의 던전이었다.
그만큼 의철의 피지컬은 비정상적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때 이후로 의철은 생활에 여유가 생길 것이다.
“나중에 식당 밥이라도 사 줄 테니까 같이 가자.”
“오! 진짜! 고마워. 여기 식당이 궁금하긴 해서 한 번은 먹어 보려 했는데 어지간히 비싸야지.”
천운은 누나가 주는 용돈 덕분에 넉넉하였으나 의철에게는 더럽게 비싼 식당표였다.
뭐 나라도 조금 비싸다고 생각하긴 했다.
일단 명문고라 어느 가문의 자제나 유명 인사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이니 가격 또한 일반인들이 보면 비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로선 평범한 기준이겠지.
“후…… 빨리 던전 레이드하고 싶다.”
이렇게 하소연하는 의철이였다.
사실 감사 인사를 할 겸 의철에게 알려 줄 게 있었다.
“그래? 그럼 내가 미발견 던전 하나 알려 줄까?”
“어? 뭐?! 진짜?”
“사실 도와준 겸 알려 주려고 했으니까.”
의철이 길영트에 합격한 뒤 2학기쯤에 우연히 찾게 되는 미발견 던전이 있었다.
던전의 보스가 생각보다 강하니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을 것이다.
“2차 시험이 끝나면 휴일에 가자.”
* * *
[정말 생각지도 못한 꼴이로군. 스킬을 증오한 남자가 스킬로 부활하다니.]
[네년에게만은 이 꼴을 보이기 싫었는데.]
검성 ‘길’과 현자 ‘미르마’.
몇십 년 만의 재회지만 썩 달갑지 않은 대화였다.
미르마는 그런 길을 보며 푸후훗-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훗, 역시 아무리 검성이라도 세월의 풍파는 이겨 내지 못했나 보네? 그러니까 내가 늦기 전에 나를 찾아오라고 했잖아. 그랬다면 네가 증오하는 스킬의 테두리에 갇히지도 않았을 텐데.]
꺄르륵- 검성을 놀리는 미르마.
그런 그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난 자연사한 게 아니다.]
그의 말투에선 조용하며 차분하지만, 근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미르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지? 너를 몰아붙인 자가 있다는 거야?]
[현자 미르마여, 난 거대한 재앙에 목숨을 다했다.]
[재앙이라니…….]
[그리고 그것은 네가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혹감에 눈에 이체가 떨렸다.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세계는……. 그 녀석은?!]
[너를 제외하고 그 녀석과 같이 힘을 써 봤지만, 막을 수 없는 재앙이었다. 난 목숨을 다하여 그 뒤를 모르겠지만, 아마 세계는 끝을 고했겠지.]
[세상에…….]
[그리고.]
길은 굳은 얼굴로 미르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재앙의 징조가 이 세계에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