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33
“냐옹~.”
“으, 응?”
느긋한 고양이의 울음소리.
천운은 천천히 감긴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방 구조. 그중 자신의 배 위에서 앞발로 배를 꾹꾹 누르는 흰색의 고양이.
“얘는 뭐지?”
천운은 자신의 배를 열심히 꾹꾹 누르는 고양이를 바라봤다.
푸른색의 청아한 눈동자와 하얀 눈 같은 털빛.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고양이다.
“나 없는 사이 고양이도 키우셨나 보네.”
천운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해맑게 미소 지은 뒤 입을 열었다.
“귀엽네. 어디서 왔니? 오빠가 놀아 줄까? 근데 얘는 암컷인가?”
[미친 거냐? 천운아?]
그 말에 희번덕 눈이 떠진 천운이 고양이를 바라봤다.
“뭐, 뭐야! 고양이가 말을…….”
[천운아.]
“……미르마?”
천운은 고양이를 들어 올려 청아한 푸른 눈을 바라봤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생김새이더니.
“근데 왜……?”
[네 마력을 조금 빌려 실체화 마법을 한 거야. 근데 마력량이 적어 미물의 형태로 바꿔서 했어.]
“아하, 근데 왜 고양이로 변했어요?”
[밥 먹으려고.]
“밥이요?”
대답한 미르마는 요염하게 꼬리를 세우며 방을 나갔다.
천운은 덮어진 이불을 치우며 침대를 벗어났다.
“으응? 밥?”
밥 냄새가 났다.
군침을 돋게 하는 음식의 냄새가 천운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으니 좀 사람다운 밥을 먹고 싶은 참이었다.
방을 나간 천운은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운 얼굴.
민아 누나가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식탁에는 누나가 힘을 썼는지 진수성찬으로 가득했다.
“일어났니?”
“오랜만이에요. 누나.”
“정말…… 처음에는 갑자기 집을 나간다고 하니까 기겁했단다.”
“죄송해요.”
천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저 걱정하게 만든 게 미안한 셈이다.
“으, 응? 왔어?”
누나와 대화 중 한설아가 기지개를 켜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한설아도 시험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나를 업고 왔으니 피로가 쌓였던 거 같다.
한설아는 나를 보자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천운아.”
“미안…….”
“좀 힘들긴 했는데. 뭐, 알면 됐어.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 줘.”
한설아는 덜 뜬 눈을 비비며 조용히 식탁에 앉았다.
부엌으로 먼저 와 있던 미르마는 슬그머니 한설아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응? 그러고 보니 얘 네가 데려온 거야?”
“고양이? 어…… 맞아.”
“얘 입맛 되게 까다롭더라고. 언니가 고양이 사료를 사 왔는데 안 먹고 무시하던데?”
뒤에서 요리를 만들던 누나가 힐끔 고양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최대한 비싼 고급 사료를 사 왔는데 안 먹으니까.”
“이상하네? 아마 잘 먹을 건데요?”
“샤아악!”
천운의 장난질에 하악질을 하는 미르마였다.
천운은 미르마에게 전음으로 사과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 사료 빼고는 사람 먹는 건 다 먹을 거예요.”
“그러니?”
“그럼 여기 있는 반찬이라도 줘 볼까?”
“아마 잘 먹을걸.”
한설아는 식탁 위에 올려진 새우튀김을 하나 집어 미르마에게 줘 보았다.
미르마는 곧장 눈앞에 있는 새우튀김 냄새를 맡고 그대로 한입 베어 물었다.
[이럴 수가…….]
우물우물우물.
미르마가 새우튀김을 입에 넣자 곧바로 들린 전음이 저것이다.
“귀여운 고양이네.”
한설아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르마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기 보니 전화벨도 고양이 울음소리더니 고양이를 좋아하는 모양이네.
하지만 일단 현자신데 저런 대우는 괜찮은가? 나는 조심스레 미르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기 미르마.’
[응? 왜 그래?]
‘그래도 명색의 현자신데 그런 취급 괜찮으세요?’
[뭐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어. 밥이나 많이 줘. 아까 그 미물이나 먹는 사료나 주지 말고.]
‘그럼 뭐…….’
그녀가 괜찮다고 하니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많이 사 드려야겠다.
요리를 끝낸 누나가 식탁에 앉자 나도 덩달아 식탁에 앉았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으렴 천운아. 설아도.”
식탁 위에 올려진 진수성찬들.
천운은 침을 꼴깍 삼키며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의 끝은 새우튀김을 향했다.
와삭!
맛있다.
눈물이 다 나올 정도로.
“끄흑흑…….”
“헐! 너 울어?”
“어머, 지금까지 도대체 뭐 하다 온 거니 천운아.”
“제대로 된 식사는 오랜만이라.”
천운은 그다음부터는 배에 걸신들린 듯 게걸스럽게 식탁의 음식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한설아와 한민아는 그저 천운이 음식을 비우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늦은 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여러 얘기를 나눴다.
지금까지 뭘 했으며 어떻게 생활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천운은 당연하게 거짓말을 섞어 가며 대화를 나눴다.
누나는 오늘같이 좋은 날에는 술을 마셔야 한다며 맥주 캔을 꺼내 기분 좋게 마시고 있었다.
원체 술을 마시지 않는 누나가 기분 좋게 마시는 모습이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천운이도 마실래?”
“그래도 돼요?”
“후훗, 그럼. 설아도 마시자.”
“으음, 저는 됐어요.”
누나답지 않게 취해서 술을 권하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많이 좋은가 보다.
천운은 누나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마시기로 했다.
사실 아까부터 맥주를 마시는 누나를 보니 침이 고이긴 했다.
“크으…….”
“천운이 잘 마시네.”
“너 어째 익숙해 보인다?”
“설마, 너도 마실래?”
“어, 어? 맛있어?”
“한번 마셔 봐.”
천운은 슬그머니 자신이 마시던 맥주 캔을 넘겼다.
한설아는 한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켁! 맛있어? 이게?”
“그럼.”
“으음.”
한설아는 한번 속는 셈 치고 맥주를 홀짝였다.
“켁! 켁! 야!”
“하핫, 미안.”
“넌 어떻게 이런 걸 잘 마시냐? 너 예전에 한 번 마셔 본 적 있지?”
“설마.”
“후훗.”
나와 한설아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는 누나였다.
“그래도 정말 돌아와서 다행이네. 다음부턴 어디 떠나면 안부라도 전해 줘. 알겠지?”
“알겠어요. 저기 누나……. 누나?”
천운이 말하려고 하자 누나의 눈이 갑자기 풀리며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음?”
“언니?”
천운과 한설아는 한민아를 흔들며 깨워 봤지만, 그녀 일어나지도 않고 새근새근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와…… 언니 술에 엄청 약한가 보다.”
“그러게. 내가 침실로 데리고 갈게.”
천운은 기절한 누나를 업은 뒤 침실로 향했다.
길영트의 업무로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내가 왔다는 이유로 조금 애를 쓴 모양이다.
누나를 업고 침실로 향하던 중 한설아가 말했다.
“천운아. 그거 알아? 언니는 옛날에 이렇게까지 잘 안 웃었어.”
“그래?”
“응. 나한테도 상냥하게 대해 주실 때도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눈매는 무표정이었거든.”
무표정인 민아 누나라.
그러고 보니 그런 표정을 한번은 본 적 있는 거 같다.
아마 내가 아카데미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인가?
“근데 있잖아.”
“응?”
“아마 네 덕분인 거 같아. 웃음이 많아졌을 때 항상 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
“나 말이야?”
“응.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그렇게 웃음이 많아졌는지 몰라. 그래서 어떻게 한 거야?”
“음…….”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상냥하게 대해 주시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일단 개그 캐릭터다 보니 김천운의 행동 하나하나가 재밌었나 보네.
근데 곤란하네.
막상 내가 김천운이 아니니 당연하게도 그걸 알 리는 없었다.
그냥 예전부터 해 오던 설정대로 말하기로 했다.
“기억이 안 나네.”
“응? 에이…… 거짓말하지 마.”
“아니 진짜.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든.”
“에이…… 그렇게 말하기 싫…….”
그 순간 내 씁쓸한 표정을 본 한설아가 입을 다물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진짜인가 보네……. 미안…….”
“괜찮아.”
조금 한설아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 설정이 나름 편하긴 하다.
침실에 누나를 눕힌 천운은 이내 방을 조용히 나온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일찍 자자. 내일 아카데미 가야지.”
“그러게.”
그렇게 한설아와 헤어지며 천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잠들려 했으나 여러 생각이 들어 잠시 바람도 쐴 겸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옆에 있는 미르마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아, 이제 시작인 거 같아서요.”
[응? 뭐가?]
“있어요. 그런 거.”
본격적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내 소설의 스토리로 진입했다.
앞으로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남은 카운터는 3년.
그 3년 안에 죽지 않을 정도로 성장해서 자신은 꼭 살아남을 것이다.
천운은 그런 다짐을 하며 조용히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어느 한 커피숍 카페.
“제정신입니까? 형님?”
“얘는 형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직 17살 코찔찔이 애 한 명을 저희 친목회 단원으로 받아들인다니 말이 됩니까?”
“목소리 줄여. 아주 그냥 네가 포스맨이라고 광고해라.”
한우성의 말을 들은 강화두가 주위에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말했다.
자신의 힘을 세간에 공개했을 당시 그는 마스크를 쓰고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이 터지는 감정은 줄이지 못했다.
불과 10초 전 한우성의 말에 어이가 털린 지경이니 말이다.
고작 17살.
그것도 막 생도도 되지 못한 응시생 한 명을 한우성은 단원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는 강화두였다.
“아니, 이유가 뭡니까?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흠…….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지?”
“예. 당연하죠. 저는 둘째 치고 다른 형님 누님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한우성은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 녀석 나비야.”
“예? 나비요?”
“너는 내 정체를 알지?”
한우성의 정체.
이 친목회에 들어온 단원 중 유일하게 자신만이 아는 사실이다.
회귀자.
아직도 왜 자신에게만 그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하게도 강화두는 자신을 놀리려고 장난으로 말한 줄만 알았다.
“그거 저 놀리려고 한 말 아니었습니까?”
“너는 사람 말을 조금 귓구멍에 박을 필요가 있어.”
“아니, 그때 표정만 보면 누가 봐도 장난인 줄 알 겁니다. 막 씩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구먼.”
“내가 그랬나? 하여튼 녀석은 나비야. 너를 포함한 친목회의 단원들도 전부 나비거든.”
“하…… 뭐 그 녀석이 형님이 아는 미래라도 바꿨답니까?”
“그래.”
“하…….”
강화두의 한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예전부터 미친 짓을 일일이 시키긴 했지만 모든 것은 이유가 있었으며 자신 또한 그를 믿고 있었다.
근데 하도 미친 짓을 많이 해서 정말 미친 거 같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저한테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네가 증인이 되어 줘.”
“증인 말입니까?”
“네가 방금 말했잖아 다른 친목회 단원들은 납득 못 할 거라고.”
“당연하죠. 그래서 뭐 제가 옆에서 형님 편을 들어 달라는 겁니까?”
“아니. 네가 확인해 봐. 괜찮은 녀석인지 말이야. 넌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잖아.”
미간을 찌푸리고 가늘어진 강화두의 눈매가 한우성을 보고 있다.
저 자신감 넘치며 당당한 표정.
그렇기에 더더욱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강화두였다.
“뭐,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방금 말했잖아. 그 녀석을 만나 보라고.”
이야기를 끝낸 한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그 모습에 눈이 똥그래진 강화두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계산하시는 겁니까?”
“그래. 왜?”
“하…… 그 애가 정말 마음에 드는가 봅니다.”
“뭐, 그건 네 눈으로 확인해 봐.”
짠돌이 같은 한우성이 커피값까지 내는 모습을 보니 강화두는 살짝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저 형님의 지갑을 열리게 했는지 말이다.
별거 아닌 광경이라도 강화두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다.
자신의 형님인 한우성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이내 강화두는 별수 없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하…… 알겠습니다. 제가 확인해 보고 납득이 안가면 바로 다른 형님 누님 편 들 겁니다. 그것만 기억해 주십쇼.”
“그걸로 충분해. 난 먼저 간다.”
한우성은 그대로 손을 흔들며 커피숍을 먼저 나갔다.
강화두는 그런 한우성을 계속 지켜볼 뿐이었다.
몇 년 동안 함께해 온 형님이며 은인이라지만, 아직도 한우성이라는 인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강화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