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31
한편 윤시혁은 여전히 천운을 뒤쫓으며 미궁을 헤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잊고도 남을 일이며 별거 아닌 도발이었지만, 윤시혁의 머릿속에는 천운의 말이 메아리치며 머릿속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강자의 행동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강자의 비웃음은 도전으로 받아들여 정당하게 싸울 준비가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한참 모자란 그놈의 도발은 용납되지 않는다.
실력도 안 돼, 혈통도 안 되는 그놈이 자신을 무시하고 도발했다.
그딴 놈에게 만만하게 보이려고 이때까지 노력한 게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스읍- 후…….”
윤시혁은 일단 상황에 맞게 침착하기로 결심했다.
분노로 앞뒤도 구분 못 하고 미궁을 헤매는 행위는 시간만 지체할뿐더러 왠지 그놈의 뜻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윤시혁은 일단 1차 시험의 통과를 우선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것은 1차 시험에 합격한 뒤 언제든지 보여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해진 윤시혁은 천천히 막힌 통로를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출구로 통하는 문을 발견했다.
또한 그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됐다.
“응? 그런가. 이놈이 가디언이군.”
윤시혁 또한 예전에 언뜻 길영트의 미궁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이놈이 그 출구를 지키는 가디언이겠지.
그러나 이상한 점은 가디언의 모습이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팔.
또한 자신이 알기로는 출구를 지키기 위해 방어에만 치중된 가디언의 팔이 무언가에 의해 깔끔하게 잘려 있던 것이다.
‘단면을 보니 한 합 만에 잘랐어…….’
견고한 석화로 이루어진 가디언의 팔을 한 합으로 반 토막을 내다니 그런 짓을 할 응시생이라고는 한 명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압도적인 스탯과 거대한의 대검을 들고 있던 그 녀석이다.
‘칫. 녀석이 수석인가 보군.’
윤시혁은 내심 혀를 차며 출구로 향했다.
뭐 자신의 수련 부족으로 그런 별거 아닌 도발에 넘어가 결국 김의철인가 뭔가 하는 녀석에게 수석을 넘겼으니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시험만이다.
다음에는 절대 실수를 안 할 테니 말이다.
‘다음 시험 때 녀석을 꺾으면 되지만, 일단 그 곱슬머리 녀석이 문제군. 그 녀석은 합격은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막연히 드니 김이 빠지는 윤시혁이었다.
애초에 복수 또한 놈이 이 시험에서 합격해야 가능하니 말이다.
제아무리 약자 주제에 자신을 도발했다고 하여도 일단, 이 시험에 통과도 못 하는 놈이면 윤시혁 또한 부끄러운 동시에 김이 빠질 정도였다.
그딴 놈의 도발에 홀라당 넘어간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며 지나간 과거에 계속 연연할 수도 없는 윤시혁이었다.
그때는 그때고 만약 그놈이 통과를 못 하면 깔끔한 마음으로 그놈을 잊기로 결심했다.
이내 윤시혁은 출구를 통해 미궁을 빠져나왔다.
근처에 있던 교관 또한 그것을 확인하고 윤시혁에게 입을 열었다.
“128번 응시생 50분 20초 합격입니다.”
합격?
그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을 차석이라는 어미가 없었다.
윤시혁의 미간이 구겨지며 이내 순위를 보여 주는 패널에 눈을 돌렸다.
김의철.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그가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아마 교관의 실수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윤식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그때였다.
삑-
소리가 들리자마자 윤시혁의 시선은 다시 패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패널에는 무언가 갱신되며 김의철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이름을 확인한 윤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김천운?”
누구야?
처음엔 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느 듣보잡이 자신이 인정한 강자를 밀쳐내고 수석을 차지한 것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돔 안에 있던 길드장과 영웅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윤시혁 또한 그들 따라 자연스레 시선은 한 곳을 향했다.
단상 뒷문을 통해 나온 그 소년은 자신도 알고 있는 놈이다.
그는 심지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느긋하게 단상을 내려오고 있었다.
“저놈이었나.”
빠드득!
윤시혁은 이를 갈며 굳은 표정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미궁을 탈출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3명.
저놈이 여기 있다는 것은 김천운이라는 자식이 저놈이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윤시혁은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 * *
“누나 오랜만이에요.”
-천운이? 천운이니!
“네. 시간이 안 돼서 바로 입학시험에 왔거든요.”
-흐아앙! 왜 연락 안 했어!
내 목소리를 듣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누나였다.
나도 가끔 연락하고 싶었지만, 그 성장의 공터가 바깥과 차단되어 전파가 안 통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요즘 기술이 참 좋네.
마력으로 폰 충전이 가능하니 말이다.
충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겨우 4분?
“어쨌든 정말 보고 싶네요.”
-나도 당장 가고 싶긴 한데 바빠서 미안해.
누나 또한 길영트의 교관이다 보니 입학시험 기간은 바쁜 모양인가 보다.
-그래도 저녁에는 꼭 만나자. 오늘은 누나가 일찍 퇴근할게! 알겠지?
“네. 알겠어요. 아! 맞다. 저 1등으로 합격했어요.”
-뭐, 뭐?! 정말! 진짜야?
뭔가 오랜만에 누나와 통화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현실에서도 1등 한번 안 해 본 내가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다.
그리고 그 도움을 준 누나에게도 말이다.
누나는 예상대로 크게 놀라며 스피커 너머로 허둥대며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또한 솔직하게 기뻐하며 축하해 주기도 하고 말이다.
-설아는 아직 안 왔니?
“아마 곧 도착할 거예요. 4등으로.”
-그래? 음…… 4등이면 조금 위로해 주겠니? 의외로 자존심이 강한 아이니까.
“알겠어요.”
알겠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자존심이 강해 위로하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그러니 뭐 ‘고생했어요.’ 한마디만 하면 되겠지.
“응?”
-왜 그래
“누나 이따 집에서 봐요.”
-어, 어? 응. 알겠어. 그럼 집에서 보자!
삑!
천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윤시혁을 보고 일단 통화를 끊었다.
윤시혁의 날카롭게 노려보는 표정으로 인해 그가 분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아직도 화나 있는 건가?
다가오자마자 한 대 치는 건 아니겠지? 사람도 많은데.
내심 그런 생각을 하니 윤시혁이 천운의 앞에 우뚝 서 입을 열었다.
“네가 김천운이냐”
“어, 어? 맞는데요?”
“무슨 술수를 쓴 거냐?”
대뜸 따지려 드는 윤시혁이었다.
윤시혁의 말과 신경질적인 표정에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이놈 납득이 안 가나 보네.’
아무래도 윤시혁은 내가 수석으로 합격한 것도 그렇고 자신보다 낮은 스탯으로 어떻게 가디언을 쓰러트렸는지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다.
천운의 생각대로 윤시혁은 천운이 부정행위로 합격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놈이 가디언을 쓰러트렸다는 헛소리를 지껄이지는 마라.”
“음…… 일단 제가 쓰러트린 건 맞아요. 협력해서…….”
“가디언을 상대로 협력? 웃기는군. 다른 건 몰라도 마물을 상대할 때 협력은 같은 동급이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거다. 근데 네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 거냐?”
“흠…….”
어쩌라는 거지?
아니 당최 사실을 말해도 이러고…….
따지고 싶고 화내는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물어봤자 본인이 안 믿으니 왠지 벽에 대고 혼자 말하는 기분이었다.
‘음……. 에휴 모르겠다.’
“아까는 실례했어요. 지금은 조금 피곤해서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 뭐냐, 스탯 좋게 나온 김의철 아시죠? 그놈도 같이 있었으니까 걔한테 물어보면 더 좋고요.”
유일한 증인인 의철을 꺼내고 천운은 윤시혁을 지나쳤다
뭐, 이런 말만 남기고 지나치면 후에 조금 피곤할 거 같긴 하지만 윤시혁은 자기가 지향하는 영웅으로서 가지면 안 되는 강자 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빌런으로부터 도시의 시민을 지키는 영웅으로서 보이면 안 되는 성향이다.
그게 바로 윤시혁이다.
약자의 나약함을 경멸하고 강자를 우대하는 놈.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스탯이니 더더욱 골치 아픈 놈이었다.
그것도 길영트 아카데미를 다니며 서서히 나아지기는 하는데 벌써부터 저러니 피곤할 따름이다.
‘에휴…… 나중에 생각하자.’
천운은 돔 안에 설치된 자판기 주스라도 마시며 한설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남겨진 윤시혁은.
“허…… 미친”
헛웃음이 나왔다.
‘도망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녀석은 놈이 처음이다.
뒷골이 당기는 상황에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까는 별거 아닌 도발이었다 쳐도 이번에는 대놓고 무시당했으니 말이다.
윤시혁은 들끓는 마음을 조용히 집어삼키며 천운을 노려볼 뿐이었다.
‘오냐. 그렇게까지 나를 적으로 본다면 상대해 주지.’
* * *
천운은 자판기에서 뽑은 주스를 마시며 여유롭게 한설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몇몇의 영웅과 길드장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기도 했다.
무슨 명함을 주면서 말이다.
뭐 그래봤자 다가오는 길드장들은 유명하지 않은 중소 길드의 길드장들뿐이었다.
심중한 대형 길드의 눈으로는 물론 수석을 한 응시생이긴 하나 아직 그들이 원하는 인재의 범위에 들어가지는 않는 모양인 듯하다.
그러나 딱 한 명.
물론 그 정체를 보고 놀랐지만 마산길드의 길드장 ‘마산도’.
한국 최고의 길드 중 하나인 길드의 길드장이 팬이라며 인사를 건넸을 때는 자신 또한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팬이라니 이미 위에 위치한 그가 한 말이니 그저 넉살좋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리고 10분쯤 됐을까?
출구에서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흩날리는 여인, 한설아가 미궁을 탈출했다.
한설아는 탈출하자마자 교관에게 합격 통보를 받으며 시선은 순위를 볼 수 있는 패널로 향했다. 그리고 굳어진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어?”
한설아는 당황하여 누군가를 찾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하긴, 당황할 만하지.’
천운은 별안간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니 귀엽기도 하고 재밌어서 저절로 씨익 하고 미소가 지어졌다.
이내 천운을 발견한 한설아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천운에게 다가왔다.
“고생했어요.”
“수석은 몰라도 4등일 줄이야…….”
“다음에 1등 하면 되죠.”
천운은 그 말만 하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또한 분한 것도 분하지만 한설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천운에게 물어봤다.
“그것보다 어떻게 1등 한 거야? 도대체 몇 달 안 보이는 동안 뭘 한 거고?”
1등을 하고서야 질문의 폭풍 세례를 맞고 있는 천운이었다.
하긴 그냥 평범한 등수면 그녀도 안 물어봤겠지만 수석을 했으니, 그제야 당최 몇 달 동안 무얼 했는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천운은 간단하게 한마디만 했다.
“마법을 배웠어요.”
“마법?”
“네. 아! 이거 드실래요?”
천운은 아까 전 자판기에서 뽑아 놓은 주스를 건넸다.
한설아는 고맙다며 미소를 지으며 주스를 마셨다.
그녀는 미궁에서 열심히 헤매고 달렸으니 마침 목이 말린 참이었다.
“난 초코티가 좋은데.”
“예, 예? 그 상태에서 초코티 마시면 안 답답해요?”
“난 안 그러던데?”
초코 사랑도 여전한 그녀였다.
“그럼 이제 슬슬 가 볼까요? 먼저 시험에 통과한 분들은 귀가해도 좋대요.”
“아, 그럼 잠시만 나 아까 맡겨 놓은 망토 좀 챙겨 올게.”
한설아는 시험을 치르기 전 교관들에게 맡겨 놨던 밀리엄의 망토를 챙기기 위해 교관들에게 향했다. 그 사이에 몇 명의 응시생들 또한 미궁을 탈출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들끼리 경쟁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통과한 응시생들은 패널에 놓인 순위를 보고 당황했는지 흠칫 놀라는 몇 명이 있었다.
‘응?’
한데 그 놀란 응시생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10위권 안에 들어온 놈이니 나름 실력을 갖춘 놈이었다.
‘분명 저 녀석은…… 웃음이 많은 친구네.’
자신의 스탯이 공개되고 가장 먼저 웃음보를 터트린 친구이다.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어 천운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름 웃음을 참는다고 입을 손으로 가리고 끕끕거리는 거까지 말이다.
“저, 저기…….”
“왜?”
“그 일단 1등 축하해.”
근데 얘는 왜 아는 척을 하지?
“저기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내가 길드를 하나 창설하려 하거든.”
“어, 어?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
“그, 그게…… 미안한데 로또 좀 하나 뽑아 주겠니?”
“허…….”
그 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대충 끝까지 들어 보니 자기는 어느 대형 길드의 길드장 아들이며 자신의 돈으로 일단 로또를 사고 만약 당첨되면 그 돈의 반을 주는 동시에 본인의 힘으로 창설할 길드에 지분 몇 퍼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내가 그제야 1등을 하니 하는 행동이었다. 아마 운으로 합격했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얘는 생각이 있는 건가?
솔직히 17살 애 머릿속에서 떠오를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성공할 거라는 꽃밭이 아닌 이상 말이다.
그리고 이 소년이 생각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소년의 미래를 위해 꿈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아버지의 위업을 등에 업지 않고 자신만의 힘으로 무언가 하려는 건 좋은 모습이긴 하다.
근데 이미 내 힘을 빌리려고 하는 순간부터 아웃이다.
어차피 좋은 이놈한테 좋은 인상도 없었고.
“야.”
“어, 어?”
천운은 별말 없이 소년에게 마시던 캔을 넘기고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쳤다.
“어? 나 주는 거야? 고마워!”
그 뜻이 긍정의 표시인 줄 알고 좋아하던 소년은 이내 무언가를 눈치채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야 X발! 빈 캔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