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25
“이야…… 많이 성장했네. 일단 기다려 봐.”
공터 입구에서 기다리던 한우성은 내가 절벽을 타고 올라가기도 전에 나를 이 안에서 끄집어내 주었다.
또한 한우성의 손에서 푸른 기류가 나오며 내 몸을 감쌌다. 한우성의 마법인 케어 마법이었다.
내 몸에 더러운 이물질들이 기류와 함께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것보다 덕분에 편하게 여기 나오고 서비스까지 해서 좋긴 한데 무슨 일이지?
“너희 누나가 부탁하더라고. 너를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지켜 달란다.”
“그래요?”
그럼 누나가 나를 위해 한우성에게 부탁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소중한 부탁권을…….
천운은 누나를 생각하며 씩 웃었지만 하나 의문점이 들었다.
‘정말 감사하긴 한데. 그럼 한 번씩 한우성이 구덩이로 찾아왔다는 건가?’
난 링크가 된 미르마에게 전음으로 물어봤다.
‘혹시 들리세요?’
‘그래. 너와 연결돼 있으니 전음도 가능해.’
‘혹시 저 아저씨가 몇 번이나 구덩이에 찾아왔나요?’
‘아니, 오늘이 처음인데?’
흠…… 역시나.
어쩐지 너무 잘해 주더라.
안 물어봤으면 착한 누나만 호구 될 뻔했네.
나는 이내 한우성한테 어떻게 따질지 생각했다.
되도록 다른 이득도 챙기고 부탁권도 다시 돌려받고 싶긴 하다만…….
한우성을 상대로 그게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쩝. 별수 없네.’
천운은 그냥 대놓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형.”
“어? 형이라니 이제는 아저씨라 안 부르네?”
“오늘 처음 오셨죠? 부탁받아 놓고.”
“어? 아니 몇 번 찾아왔어. 인마.”
“알고 있어요.”
천운의 시선과 눈이 마주친 한우성은 계속 지그시 바라봤지만 이내 졌다는 듯 한숨을 쉬며 솔직하게 말했다.
“하…… 크큭, 어떻게 알았냐?”
“형 성격상 왠지 그럴 거 같아서 물어봤는데요?”
“이런……. 어째 피는 다른데 한민아랑 똑같냐?”
한우성은 귀찮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하…… 조건이 있어. 들을래?”
“네. 뭐 일단.”
“딱 한 번 네가 부탁하면 내가 도와주마. 대신 너희 누나에게는 말하지 마. 그게 더 귀찮으니까.”
예전에 한번 한민아의 부탁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무력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한민아지만 그녀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려 한 달 동안 귀찮게 굴었으니 말이다.
“그런 거라면 뭐…… 알겠어요.”
그 후 한우성은 하나의 작은 딸깍이를 주며 입을 열었다.
“에휴…… 그걸 누르면 내가 알아서 올 테니까. 힘든 일 있으면 불러라.”
“감사합니다.”
“너무 힘든 일은 부르지 말고 귀찮으니까. 볼일도 끝났고 난 가 본다. 아 맞다. 그 길영트 입학 지원서는 네 누나가 이미 넣어 놨어. 이것도 전해 주라는군.”
그 말고 함께 한우성은 뒤돌며 부유된 몸으로 자신의 집을 향해 날아갔다.
한우성 때문에 몸을 숨기고 있단 미르마가 날아가는 한우성을 부며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놈은 도대체 왜 온 거야?]
“그래도 부탁받은 게 있으니까 나올 때 확인하려고 온 거겠죠.”
[허…… 고놈 참 희한한 놈일세.]
목소리에 맞지 않는 연륜이 담긴 말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미르마는 황당한 일이 생기면 저런 말투가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저희도 빨리 가 보죠. 시간이 1시간 남았네요.”
[그래.]
* * *
천운이 학교를 향하여 가는 도중.
미르마는 근처에 세워진 여러 건축물을 보며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기억하는 세계보다는 너무나 문명이 진보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내가 너무 구덩이에 오래 있었나?]
눈을 끔벅거리며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는 미르마.
아직 미르마는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이런 미친. 저건 또 뭐야?]
‘버스요.’
[그니까 그게 뭔데.]
미르마는 차선에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하염없이 당황하며 떨고 있었다.
저 유리로 된 건물부터 말없이 움직이는 마차까지.
[이렇게 당황스러운 광경은 처음이군.]
“문명의 이기예요.”
[돌아 버리겠군. 그럼 아마 그 녀석도 죽었겠네?]
“그 녀석이요?”
[있어. 너랑 좀 비슷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
시대가 이렇게 지났으니 아무리 검성 그 녀석이라도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가 자신이 알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조금 후에야 알 수 있었다.
* * *
길영트 아카데미.
한국 최고의 아베타 육성 기관이며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만 다닐 수 있다는 학교다.
아베타들의 대표 직업.
치안을 지키는 영웅, 탑과 던전을 공략하는 길드, 마지막으로 미궁을 공략하는 트레져 헌터까지 이 3가지의 직업을 대표로 육성하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육성 기관이다.
그 최고의 기관이라는 위명만큼 그 부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었다.
내가 길을 잃을 만큼.
‘미치겠네…….’
막상 당찬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온건 좋은데 부지가 너무 넓어 천운은 길을 헤매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가 끝인지 소설로 표현한 거로는 인천 공항 정도의 부지라고 했나?
일단 걸으면 지도 표지판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웬일로 내 행운이 작동을 안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뒷문으로 들어왔나 보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어? 저긴가?’
천운은 사람 따라 길 따라 자기 또래 나이의 소년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에이, X발. 도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이 넓은 거야!”
아무래도 이 녀석도 길을 잃은 모양이다. 어쩐지 따라가기 전에도 동질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천운은 곧바로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미르마에게 부탁했다.
더욱 위로 떠오른 미르마는 고개를 돌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이내 내려와 입을 열었다.
[음…… 저기야. 굳이 마법을 쓸 필요도 없어.]
‘네? 확실해요?’
[응. 저기로 가 봐. 인파가 북적이는 걸 보면 저기가 확실한 거 같은데?]
천운은 미르마가 가르킨 방향으로 길을 쭉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점점 여러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온갖 대형 길드의 길드장부터 협회의 유명 인사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취재하려는 기자들.
기자들을 보니 한설아가 살짝 고생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있는 길영트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은 정재계의 인사들과 여러 대형 길드와 매스컴에서 주목받는 시험이기도 하다.
매년 달라지는 그 독특한 형식의 고난도의 시험과 대형길드, 영웅, 트레져 헌터, 정재계의 자녀들이 길영트 입학시험을 보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또한, 이번년도의 입학시험은 다른 년도보다 더욱 기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무려 4대 가문의 혈육들이 빠짐없이 이번 연도의 입학시험을 보게 되니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황금의 세대라고 부를 정도였다.
‘부산스럽게 너무 많네.’
[좀 조용한 데로 가자.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만 있다가 가죠. 뭐 좀 구경할 게 있어서요.’
벌써부터 몇몇의 대형 길드부터 중소 길드는 인재 발굴을 위해 중학생 때부터 새싹이 보이는 응시자들에게 침을 바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슬슬 기자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을 놈들이 나타날 것이다.
생각하기도 무섭게 기자들의 움직임이 분란해지고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것이 보였다.
“윤시혁 씨!! 혹시 인터뷰 가능합니까?”
“암 가문의 쌍둥이 자매도 있어!”
“마법명가의 질 로벤이다!”
“한설아 씨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혹시 사진 한 장만 가능합니까!”
“꺄아악!! 누나!!”
‘와…… 꺄아악 누나라니 한설아 인기 많네.’
뭐 소설을 쓴 그대로 그 5명은 어찌나 동시에 타이밍을 딱 맞춰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 아카데미의 경호원들 또한 나름 지킨다고 기자들을 밀어내고 있긴 한데.
일반인들을 상대로 힘을 쓰면 과잉 진압으로 문제가 되니 더욱 골치가 아픈 모양이다.
적안 가문, 암 가문, 검성 가문, 마지막으로 마법 명가의 질 가문.
4개의 명가의 자녀들이 동시에 입학시험을 치른다고 하니 이번 연도의 입학시험은 더욱 세간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왜? 저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
‘네. 있긴 하죠?’
[근데 만나러 안 가?]
‘저기 우글거리는 곳에 뛰어들기에는 너무 나약해서요.’
[그러긴 하네.]
가문의 자녀들을 한 번이라도 인터뷰하겠다고 경호원들을 뚫을 듯 미친 듯이 우글거리는 기자들을 보니 한설아가 고생 좀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가 봤자 해 줄 게 없지만 좀 있다 돔에서 보면 되겠지?
막상 주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쭈굴해진 미르마가 입을 열었다.
[휴…… 방금 알았는데 내가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
‘그런 거 같더라고요.’
[그럴 때는 위로해 주는 거야 천운아.]
천운은 구경할 것도 다 봤으니, 이제 알파벳 A가 적힌 원형 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총 A부터 E까지 늘어선 원형 돔 형태의 건물들은 전국 1500명 정도의 지원한 응시생들의 수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물론 비전투 아베타 또한 있으니 저렇게 나눈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A 돔에서의 주요 인물들은 김의철, 한설아, 윤시혁일 것이다.
뭐, 나머지 두 가문은 다른 돔에서 시험을 치를 테니 아직은 만나 볼 겨를이 없을 거다.
그리고 천운이 사라진 기자들의 무리에서.
쏘옥-
기자들의 무리 사이에서 얼굴을 쏙하고 내민 여성이 있었다.
“어, 어! 천운이다!”
한설아는 천운을 발견하고는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곧장 쫄래쫄래 뒤따라갔다.
오래전 던전에서 천운에게 받은 ‘밀리엄의 망토’를 가져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한설아였다.
사람의 인식을 저해하는 동시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망토는 기자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오기 쉬웠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것까지 예상하고 자신에게 이 망토를 준 게 아닌지 말이다.
‘에이……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까지는 너무 비약적인 망상이라고 생각한 한설아였다.
한설아는 천운을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 몰래 천운을 뒤따랐다.
* * *
넓은 돔 형태의 건물 안.
어째 이 공간이 밖보다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다.
돔 안에서부터는 기자들이 출입 금지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길영트를 후원한 대형 길드의 길드장부터 정보 소속의 영웅들은 몇 명 보이긴 하지만. 아마 돔 밖에서처럼 대놓고 스카우트 제의는 안 하는 모양이다.
‘응?’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이 자신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저기 있었네. 김의철.’
이 세계의 주인공 힘숨찐이 나와 똑같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응? 설마……. 검성? 아, 아니군. 사람을 잘못 봤어.]
미르마 또한 의철을 보며 검성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솔직히 못 느끼는 게 이상하지만, 아마 주위에 있는 건 인식하나 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게 지금의 검성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기운은 진짜야! 음…… 천운아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저 녀석이랑 대화 좀 해야겠다.]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쟤랑 구면이거든요.’
[그래?]
툭툭-
순간 마이크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단상의 마이크를 쥔 남자가 나타났다.
인상은 이마에 가로로 흉터가 난 험상궂게 생긴 남자.
아마 이번 시험의 담당 교관인 A급 아베타 허필두일 것이다.
“자. 응시자분들은 모두 잠시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자 모든 응시생의 시선은 허필두를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제 소개를 하자면 길영트의 교관이자 A급 아베타 트레져 헌터 허필두라고 합니다.”
응시생들의 시선은 그를 향하며 부산스럽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A급 아베타 허필두야!”
“와 역시 길영트는 다르긴 다른가 보다. 저분을 초빙하다니.”
“괜히 한국 최고 육성 기관이겠냐?”
A급 아베타 허필두.
내가 설정한 아베타계에서 유명한 트레져 헌터이자 전 S급 아베타이다.
여기서 전 S급이란 은퇴해서 전이라고 한 게 아니라 한우성에 의해 S급의 기준이 싹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의 A급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게 이 세계의 S급들이니 말이다.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기 전, 간단한 스탯 측정이 있겠습니다. 응시생분들은 각자 순번에 따라 앞으로 나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허필두의 손은 앞에 있는 투박하게 거대한 기계를 가리켰다.
기계의 앞에는 한 개의 수정구가 기계의 전선으로 연결돼 있으며 기계의 위쪽 끝부분에는 측정된 스탯을 알리는 패널이 있었다.
“자. 그럼 응시자 번호 1번부터 차례대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과 함께 드디어 내 소설의 스토리에 진입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리고 그때.
“천운, 천운.”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천운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확인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운은 환청을 들었나 싶어 다시 단상을 보고 있자 이번에는 기이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푸훗!”
“뭐, 뭐야? X발.”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기이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나만이 아닌 듯하다.
곧장 내 바로 옆에 있던 응시생도 희번뜩 눈을 굴리며 놀랐으니 말이다.
‘아니, 진짜 뭐지?’
그때 소리가 들린 반대편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일렁이더니 이내 한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설아는 무안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천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등장에 천운은 극하게 기뻐했다.
이게 몇 달만의 만남인지 막상 천운과 대조되게 한설아의 반응은 무안했지만.
“으, 응”
“응? 왜 그러세요?”
“아니, 너만 놀래 주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반응하네?”
뭔가 괜히 피해를 끼쳐 부끄러움과 동시에 무안함을 느낀 한설아였다.
“뭐, 모르면 그만이죠.”
그러거나 말거나 천운은 해맑게 웃으며 한설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참 그리운 얼굴이 세삼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가웠다.
내심 언제 말거나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흠…… 저 망토는 분명 밀리엄의 망토네.]
‘아는 사람이에요?’
미르마의 말대로 유물은 본래 주인이 있으며 웬만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남긴다.
분명 이 유물의 이름이 미리엄의 망토였나? 사용자의 존재감을 옅게 해 주고 은신도 시켜 주는?
그런 생각을 하니 미르마의 표정이 영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의외로 머리는 좋아. 근데 무언가를 만드는 의도가 불순해.]
‘음…… 어떻게요?’
[저 유물만 봐도 팍- 감이 오지 않아?]
‘아.’
아무래도 이 유물의 제작자는 생각보다 엄청 외설적인 모양이다.
“천운.”
한설아는 아까와 다르게 해맑게 웃으며 천운에게 입을 열었다.
말투가 왠지 누나를 닮아 있었다.
“이번 시험 꼭 합격하자!”
“네. 열심히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