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11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 석 달이 지났다.
계절은 9월 가을.
화창한 햇살이 낮게 가라앉은 아침.
알록달록한 잎이 떨어지는 단풍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며 그 사이를 한설아는 달리고 있었다.
한설아는 오늘도 산을 오르며 육신을 단련하고 있다.
그녀의 하루 시작은 항상 산을 오르고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정신을 맑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나태함을 없애기 위해서, 그녀는 항상 쉬는 날에도 산을 오르며 몸가짐을 단련한다. 모든 것은 전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가문에서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항상 언니와 비교되며 살아왔다.
나이가 자신보다 한참 많은 언니는 신경 쓰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 줬지만, 자신과 언니와 커다란 벽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 어디 특출한 구석이 없던 나는, 늘 언니와 비교당하며 가문에서 멸시받아 왔다.
“후…….”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이 범인(凡人)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누구보다 노력하여 재능이라는 벽을 넘으려 하고 있다. 언니와 동등 또는 그녀를 넘으려면 자신은 남들보다 몇 배나 되는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그녀는 산을 오른다.
“왔어요?”
“오늘도 일찍 왔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순간부터 이 남자를 존중하게 됐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약한 힘을 가진 그는 어느 순간 자신보다 먼저 올라와 산의 정상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김천운’. 그의 부지런함은 한 치의 망설임이 없으며 본받을 만한 수준이다. 그를 보면 언제부터인가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노력은 절대 배신을 하지 않는다고 그 증거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어?”
“새벽 4시요.”
“잠은 안자?”
“뭐 어쩔 수 없어서요. 누나하고 약속한 게 있어서.”
3개월 전 누나와의 대련에서 이기고 누나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일단은 약속은 약속이니, 아카데미에 가는 건 허락할게.”
“정말요?”
“……그치만, 지금 네 보호자를 맡은 누나는 너어무 걱정이란다. 그러니 너를 위해 잠시 악마라도 될 생각이란다.”
“네?”
그녀는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과장된 슬픈 표정으로 나에게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 한가득 빼곡히 적힌 검은 글씨들.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 막힌다. 그것은 나를 위해 그녀가 만든 일정표였다. 이 지옥 같은 일정표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일정은 저녁에는 누나와의 대련이었다.
“어떠니?”
“누나……. 바쁘시잖아요. 혹시 저 훈련시키면서 일까지 병행하시면 힘들지 않을까요?”
“어머 걱정해 주는 거니?”
물론 자신에 대한 걱정이다.
누나와의 대련으로 몸소 겪은 힘으로 인해 두 번은 체험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일단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
처음 대련을 할 때 나의 몸을 걱정하여 힘을 조절하면서 했다고 한 게 그 모양이니, 말 다 했다.
“일단 예상은 했겠지만 네가 얻은 고유 스킬이 어디 가문의 스킬인지 알겠니?”
“암 가문의 고유 스킬이네요.”
“별로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단다. 암 가문에 대한 소문은 한번 들어 봤지?”
표면은 정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가문이지만 그 실상은 살인과 암살을 주업으로 삼는 가문이 암 가문이다.
그 가문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천운의 어머니가 연을 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암 가문의 수련 방법은 정상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훈련이 득실거리니 말이다.
“그래도 이왕 얻은 스킬이니 난 철저히 너를 가르칠 생각이란다.”
누나의 싱긋 밝은 미소 뒤에서 신성한 빛이 누나를 두르는 착각까지 보였다. 왠지 괜찮을 거 같다. 물론 훈련이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누나를 따라간다면 무엇이든 해낼 거 같다는 고양감까지 느끼게 했다.
“네. 할게요!”
의안(寲眼) 스킬. 현재 김천운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스킬이 누나와의 대련으로 활성화됐다.
모든 고유스킬의 장점은 마력이 소모되지 않다는 점이다.
4대 가문 중 암 가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인 만큼 마력이 아닌 가문의 피를 매개체로 사용하여 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잘 따라올 수 있겠니?”
“노력해 볼게요. 저도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하는 걸 자각해서요.”
“후훗…….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렴.”
그 이후로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누나의 인상은 처음에는 악을 모르는 선한 천사였으나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지난 후, 누나의 말 그대로 그 웃고 있던 인상이 악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냥 고문을 즐기는 여왕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분명 항상 미소 짓는 표정은 변화가 없는데, 수련이 터무니없는 고난도라서 그런가? 달라진 점이 없는 인상은 천천히 변해 가는 기분이었다.
진작에 불굴의 산삼으로 정신력을 높이지 않았으면 언제든지 과로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련이었다.
“그래도 잘 따라와 주어서 다행이구나. 역시 천운이는 내가 보기에는 재능이 있어. 처음 나와 대련 중에서도 고유 스킬을 얻었잖니? 후흣.”
“……그러게요. 컥!”
“어머, 괜찮니?”
항상 대련 중에 몇 번을 구른 건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그녀가 걱정해 주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체술까지 완벽한 그녀는 일단 내 맷집을 키운다는 이유로 몇 번이고 엎어치기를 하며 맨땅을 구르게 했다. 항상 생기는 자잘한 상처는 그녀의 재산으로 사들인 포션으로 인해 흉터 없는 깨끗한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생각할 때쯤 석 달이 지났다.
이름 : 김천운
나이 : 16세
<상태창>
힘 : (17.2/50)
체력 : (16.1/40)
지능 : (1/100)
마력 : (18.7/35)
행운 : (100/?)
<스킬>
의안(S)
내 스탯을 본 누나는 방긋 웃으며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천운아. 그래도 기본은 따라잡았구나.”
“드디어.”
내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 낸 성과.
솔직히 이루어 낸 성과 또한 만족스럽지만, 누나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천운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비록 아직 각성자라고 부르기에 미숙하지만, 시간은 많이 남았다.
이대로 정진하면 주요 인물들과 나란히 서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누나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혹시 모를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해야 한단다. 게을러지면 안 돼. 알겠지?”
“명심할게요. 그럼 오늘은?”
“오늘 하루는 쉬렴. 오늘은 누나도 급하게 할 일이 생겨서.”
그렇게 지옥 같은 훈련에서 하루를 만끽할 수 있는 휴일이 찾아왔다. 일단 쉬는 날이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올라가는 산을 향했다. 여전히 산꼭대기에서 조용히 명상하고 있으면 그녀가 뒤늦게 찾아왔다.
요즘 바쁜 훈련 탓인지 이곳은 언제부턴가 나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 훈련으로 쌓이던 스트레스는 산에서 부는 상쾌한 바람을 타고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왔어요?”
“오늘도 일찍 왔네.”
항상 인사는 간단하게 그 이후로 하는 일은 항상 똑같다. 그녀가 내 옆에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자신의 몸 안에 마력의 통로를 넓힌다. 나 또한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그녀와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으로 산에서 하는 수련을 시작한다. 3달 동안의 명상으로 마력의 한계치를 넘어 더욱 넓혔지만, 아직 산삼의 마력을 전부 흡수하기에는 내 마력 한계치가 낮아 이 훈련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내게는 꼭 필요한 훈련이라 그녀에게는 감사할 따름이다.
“혹시 오늘 시간 있어요?”
“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응.”
그녀는 천운의 말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콧소리로 대답했다. 요 몇 달간 그와 함께 지내며 갔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던전은 이제 그녀의 상식을 넘어 물어보는 걸 포기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그냥 체념했다. 더 물어봐 봤자 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며 변명할 터이니, 이번에도 그는 또 미지의 던전을 찾아와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을 말하는 줄 알았다.
“정말 시간 있으시죠?”
“으, 응!”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게 귀찮아 신경질적으로 콧소리로 대답했다. 가 보는 곳이야 뻔할 텐데 뭘 자꾸 물어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천운은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흥흥 흥얼거리며 다시 명상을 시작했다.
* * *
“어디야, 여긴?”
천운과 함께 도착한 곳은 그녀에게는 아주 생소한 곳이었다. 아득할 정도의 높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그 거리를 더욱 활기차게 만드는 북적이며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그녀는 천운과 함께 번화가로 나왔다.
“식사라도 한 끼 사 드리려고요.”
“어?”
“저번에 도와주신 답례를 아직 안 해서요.”
식사? 밥? 뭔 소릴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에 기억이 하나 생각났다.
누나와의 내기. 거기서 자신을 도와준 답례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물론 그 일이 일어난 지 석 달이 지났지만 잊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살면서 처음 보는 생소한 유희 거리와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음식들, 그녀는 고조된 호기심으로 천운에게 여러 가지 물어봤다
“와…… 저건 뭐야?”
그녀가 흥미에 찬 목소리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건 또 뭐고 저건 또 뭐야 라면서, 마치 처음 장난감을 보는 듯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천운에게 여러 가지 물어봐 왔다.
물론 그녀가 일부러 이런 유희 거리를 멀리하고 어릴 때부터 줄곧 수련을 해 와서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천천히 구경해요.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까요. 배는 안 고프세요?”
“고프긴 한데. 밖에 음식은 좀…….”
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가문의 적대하는 세력으로 인해 자신이 먹을 요리는 자신이 만들었던 게 대부분이었을 터, 그것을 알기에 내가 함께 그녀와 온 것이다.
“믿으셔도 돼요. 잘 아는 음식점이 있거든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뭐…….”
아닌 게 아니라, 요 몇 달간 그녀와 함께 수련하니 나에 대한 신뢰도가 급상승하여 이렇게 믿는 구석이 생긴 듯하다. 던전 공략 때도 그렇고 일단 전적으로 초콜릿이 한몫했지만 나를 거짓말 할 사람으로는 보지는 않는 듯하다.
그리고 난 그녀와 함께 내가 잘 아는 이 소설 음식점 끝판왕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헤븐티 헤븐?”
“외관은 그렇지만 여기 셰프가 음식에 신념을 담으신 분이에요. 음식에 장난칠 분은 더더욱 아니죠.”
“으…… 응 그래”
이번에도 그녀는 천운을 믿기로 했다. 그녀는 가게의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와…….”
“상상한 것보다 괜찮죠?”
천운의 말대로 바깥의 외관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안은 깔끔함을 자아내는 분위기였다.
난 테이블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메뉴판을 주었다.
“음……!”
그녀는 메뉴판을 미간을 좁히면서 바라봤다.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뭘 먹어야 할지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난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둘 다 시켜요.”
“어!?”
순간 동공이 흔들리며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방법이 있었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천운을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굳이 하나만 시킬 필요 없이 둘 다 시켜 버리면 될 것을 왜 고민했단 말인가. 천운도 그녀가 먹고 싶은 메뉴를 시키게 한 다음 반반으로 나눠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그녀를 위해 데려온 식당이니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게 하자.
“그럼 이거하고 이거.”
“응?”
그녀가 고른 것은 신기하게도 소설의 주인공인 김의철이 자주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메인 히로인 아니랄까 봐 주인공과 쿵짝이 맞는 듯하다.
난 주인장에게 그녀가 고른 메뉴를 주문했다.
주인장은 몇 분도 안 지나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요 저번에 시킨 볶음밥과 처음 먹어 보는 크림 스파게티였다. 안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주인공이 항상 즐겨 먹는 조합의 음식이었다.
한설아가 스푼을 들고 긴장한 모습으로 볶음밥으로 스푼을 옮겼다.
고스란히 윤기가 도는 밥알 사이로 보이는 노란색 계란들, ‘헤븐 티 헤븐’ 셰프가 고심해서 만든 진리의 볶음밥이었다.
“냠. 윽!”
“어? 괜찮으세요?”
순간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굴리는 것이 보였다. 순간 무언가 잘못된 줄 알고 난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굉장해.”
“네?”
“내가 흔히 만들어 먹는 음식의 맛이 아니야.”
난 그녀의 말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쳤다.
“그렇겠죠. 일단 셰프가 만든 건데.”
“일단 나라도 온갖 귀하다는 산해진미를 구해서 만들어 보았지만 이런 맛은 안 났어!”
“……산해진미라도 잘못 요리하면 건강한 맛만 나요.”
그녀가 나를 가자미 같은 눈으로 좁혀보며 입을 삐죽였다. 나름 자신도 요리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천운의 말에 약간은 상처를 입은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