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8
집에 도착 후, 늦은 밤.
난 자기 전, 던전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저번에 적어 놓은 설정집을 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레트아몽은 분명 기억을 읽어 투영하는 능력을 지닌 마물이다. 하지만, 난 그런 기억을 가진 적이 없다. 진짜 김천운이라면 모를까, 난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두 가지.
첫 번째 가설은 아직 이 김천운의 기억이 몸 안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빙의된 순간 기억을 이어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레트아몽이 증거로 알려 줬다. 아직 내 몸 안에는 김천운의 기억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두 번째 가설은-
똑- 똑-
내 깊은 고민을 끊어 내듯 누군가 살며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운아…… 혹시 아직 안 자니?”
누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별말 없이 한 말이겠지만 내 고민과 상념을 한순간에 없애 주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난 작게나마 히죽 웃으며 누나를 불렀다.
“네. 무슨 일이세요.”
그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무언가 말할 것이 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 혹시 시간 되니?”
내일이라……. 어차피 매일 아침 산을 달리며 운동밖에 안 한다. 만들려면 매일 만들 수 있는 게 시간이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네. 저야 뭐 시간이 많아서요. 무슨 일이세요?”
“내일 하루 쉬는 날이라, 같이 가고 싶은 곳도 있고 물어보고 싶은 거도 있어서…….”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보인다. 누나의 말투를 보니 민감한 문제인 듯하다.
“네. 알겠어요.”
“그래. 오늘 밤은 늦었으니 빨리 자렴, 요즘 바빠 보이긴 하는데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 그럴게요.”
“그리고, 너무 늦겐 들어오지 말고 알. 겠. 지?”
마지막 말은 진심이다. 살짝 화난 듯이 끊어서 말한 것을 보면 많이 걱정한 모양이다.
분명히 표정은 웃고 있지만, 말투에서는 미세한 분노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을 느껴 본 적이 있다. 어릴 때, 분명, 그러니까……. 사랑의 매였나? 몸은 16살이지만 정신은 23살이다. 이 나이에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감회가 새롭다
“네, 이만 늦었으니 자 볼게요.”
“그래. 잘 자렴.”
누나가 방문을 열고 돌아갔다. 내일도 바쁠 거 같지만 역시 해야 할 건 하고 자자.
난 알람을 이른 새벽쯤에 맞추고 침대에 누웠다.
‘이게 진짜 잠이 안 올 때는 편하단 말이야.’
“라이트. 라이트.”
이제 마력이 어느 정도 올라서 마법 하나로는 기절하지 못한다. 순간 내 검지에서 작은 빛이 나와 어두운 방 안을 비췄다. 그것도 잠시 힘을 잃은 듯 작은 빛이 꺼지더니 몸에 힘이 쑥 빠지며 의식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어느 정도 마력량이 올라가 있을 거다. 이 훈련은 마력이 없는 자들의 특권이다. 이렇게 편하게 마력을 올릴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빨리 기절하고 일어나자.
내일도 바쁜 하루가 될 거 같다.
* * *
다음 날, 태만의 성지 같은 이불의 욕망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 조금 일찍 산에 향할 생각이다. 곧바로 누나를 위해 간단하게 토스트를 만든 다음 보온병에 불굴의 산삼차를 끓여서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가방에 넣은 다음 밖으로 나와 산을 향해 달렸다.
“후욱- 후욱…….”
달릴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며 땀에 젖은 머릿결을 흔든다. 요즘은 뛰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이렇게 보면 이 일주일 사이에 내 몸은 완전히 달라진 거 같은 느낌이다. 이제 어엿한 아베타 같은 구석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 거 같다.
이름 : 김천운
나이 : 16세
<스탯>
힘 : (9.2/50) +0.2
체력 : (5.6/34) +0.3
지능 : (1/100)
마력 : (6.3/30) +0.3
행운 : (100/?)
산삼과 개천산의 영향이 있다 하여도 이 정도로 올라가긴 드물 건데, 노력하는 맛이 있는 신체다. 김천운은 얼빵하여도 도망 하나는 일품이었으니 달리기 또한 자연스레 재능이 있던 거겠지.
“후욱- 후욱- 허억…….”
일주일 동안, 이 장거리와 산을 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흡법을 터득했다.
리듬을 타듯이 맞춰서 호흡하면 뛰는 것이 더욱 오래 유지가 된다.
그렇게 뛴 지 2시간.
“으아아- 뒈지겠네. 도착했다.”
일주일 동안 달린 것 중 가장 빠르게 도착한 최단 기록이다.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진 거 같다. 난 이 정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바위를 향했다.
그녀가 항상 명상하는 바위, 그 위로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여 올라가 보았다.
산 너머의 경치에서는 고개를 살짝 내민듯한 태양을 보이며, 이 어두컴컴함이 느껴지는 푸른 하늘에 밝은 오렌지색의 노을이 비치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항상 이 비슷한 경치를 봐 왔다는 건가? 난 이 여운이 남는 풍경을 집에서 가져온 산삼차와 함께 즐겼다.
“윽- 쓰네. 어째 익숙해지지가 않냐?”
하지만, 오늘은 누나와 약속이 있으니 오래 구경할 시간은 없다.
곧바로 마시던 차를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빠르게 목구멍으로 삼킨 다음,
오늘의 일정 때문에 한설아와 못 만날 거 같으니, 그녀에게 줄 초콜릿을 가방에서 꺼냈다.
작은 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그란 초콜릿들, 아마 한설아가 보면 작게 웃으며 받아 줄 것이다.
병에는 포스트잇으로 내 이름하고 메시지도 적어 놨으니 의심할 일은 없을 터이다.
오늘 운동은 여기서 끝이다. 빠르게 하산하기로 하자.
* * *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그치 천운아?”
나는 어째서 이런 곳에 와 있는 걸까? 그리고 여긴 또 어디고, 아니. 알 것 같긴 한데……. 누나는 내가 예상한 곳과는 다른 활기찬 분위기를 풍기는 번화가로 나와, 쇼핑을 시작했다.
그럼 어제는 왜 말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면서 머뭇거린 거지?
“오랜만에 쇼핑하니까 기분이 좋네. 그치, 그치?”
“음…… 그러게요.”
33살이라고 볼 수 없는 어린 외모 때문인지, 저 두 번 말하는 말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매력적이신데 아직 결혼을 못 하셨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누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보인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지만.
“점심 아직 안 먹었지?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한식, 중식, 양식 중에 고르렴.”
음……. 음식이라, 그러고 보니 가 보고 싶은 곳이 한 곳 있다. 내가 소설에 적어 놓은 천상의 맛을 느껴 볼 수 있는 가게. 주인공이 즐겨 가는 단골집, ‘헤븐티 헤븐’.
은퇴한 아베타가 자신의 오랜 꿈인 음식점을 차리려고, 요리 수련으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닌 끝에,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음식과 비교도 안 되는 맛의 끝을 찾았다고 알려진 가게다.
음……. 근데, 생각해 보니 내가 쓴 거지만 말이 안 되긴 하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천상의 맛이라니, 세상 사람 취향이 전부 다른데 그런 게 있을까나? 하지만 운이 좋게도 글이 현실이 된 세계다. 그 천상의 맛을 맛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살짝 기대되긴 한다.
“누나. 제가 좋은 데 하나 알아요.”
“응? 어디?”
“어디 보자, 여기 근처네요. 따라오세요.”
길을 따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별로 지나가지 않을 거 같은 구석에 자리 잡은 음식점이 보였다. 간판에는 ‘천상의 맛으로 인도합니다. 헤븐티 헤븐’이라고 적힌 것을 보니 여기가 맞는 거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싼 티 나는 싸구려 음식점 같지만, 오직 맛으로만 승부한다는 사장님의 일념을 담아 이렇게 지었다.
“여기가? 정말이니?”
누나가 조금 불안하듯 입술을 떨며 말했다. 뭐 외관이 좀 보기 그렇지만, 맛으로는 근처 음식점을 이길 수 없다는 맛을 표현해 놨으니 괜찮을 거다.
“들어가죠. 드시면 놀랄 수도 있어요.”
“음……. 정말이지? 한번 힘내 볼게.”
음…… 힘낸다라…… 드시면 깜짝 놀라실 수도 있을 텐데.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닌가 싶다.
뭐 말로 설명하는 거보다, 일단 보여 드리는 게 나을 거 같다. 음식 냄새 자체부터가 입맛을 돋우는 맛이라고 설명해 놨으니.
띠리링-
“어서 오세요.”
가게의 문을 여니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며 뭔가 인상이 포근해 보이는 주인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가게 내부는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오른쪽으로 오픈 키친으로 이루어진 주방과, 주방과 마주한 바 테이블이 있고, 왼쪽으로 5, 6개의 테이블로 구성된 아주 깔끔한 인상과 밝은 인테리어로 화사한 느낌을 준 음식점이었다.
“와…… 내부는 정말 괜찮구나.”
“음식 맛도 괜찮을 거예요.”
나와 누나는 주방과 마주한 바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보았다. 아마 여기서 추천할 만한 음식은…… 아니, 추천이고 뭐고 전부 맛있어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처음이신가요?”
내가 메뉴판을 보고 고민을 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한 손님이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뭔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풍기는 남성이었다. 인상은 차분하며 수수하지만 깔끔해 보이는 댄디컷의 남성. 뭔가 어디서 본 느낌이 나는 남자였다.
“이거하고 이거 한번 드셔 보세요. 아마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
그가 추천해 준 것은 나도 잘 아는 음식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니까.
‘뭐! 설마?’
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익숙한 듯 딱 맞게 음식값을 테이블에 둔 뒤에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나서기를 싫어하는 그 주인공이 설마 자신에게 친한 듯이 음식을 추천해 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어머. 후훗, 저 나이에 대단하구나.”
알고 있다. 누가 뭐래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니 말이다. 17살에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 가능한 경지를 가진 놈이니 몰라보는 게 이상하다만…… 아마 지금 나이는 나랑 같은 16살. 아직 마법을 배우지는 못 했을 거다.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까 저 아이가 추천한 걸 먹어 보는 게 어떠니?”
“네.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뭔가 괜한 걸 고민한 거 같다. 다른 것도 맛있겠지만, 역시 제일 궁금한 건 이거다. 내가 쓴 주인공이 즐겨 먹는 음식이 과연 내가 표현한 맛일지. 천국에 다녀온 맛이라 적어 놨으니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메뉴를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헤븐티 헤븐의 요리는 굉장했다. 냄새부터가 내 입맛을 압도하듯 자극적인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그가 추천해 준 음식은 평범한 볶음밥이었다. 하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계란 볶음밥 안에 주인장의 일념과 모든 경험이 담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와 누나는 참지 못하고 곧바로 숟가락을 들어 맛을 보았다.
“억!”
“와…….”
내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맛에 이상한 억 소리가 나왔고 누나의 입에서는 감탄을 자아내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볶음밥을 먹자마자 내 귓가에서 웅장한 브금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말 그대로 미미(美味)였다.
난 이 한 입의 충격에 가시기도 전에 계속해서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이 볶음밥은 합법적 마약이다.
* * *
한편으로 가게를 나온 김의철은 허공에 대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 돈도 없는 놈이 이 가게는 항상 오는구먼? 근데 무슨 일이야? 웬일로 모르는 사람한테 말 걸고.
“조금 스킬로 확인해 봤는데 신기해서요.”
- 뭐가?
“저 나이에 스탯 중에 100 정도 되는 스탯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 뭐? 미친 무슨 괴물이냐? 내가 보기에는 별거 없는 놈처럼 보였는데?
“저도 대충 무슨 스탯인지는 모르겠네요.”
- 뭐 은둔 고수야 뭐야?
“글쎄요. 그래도 옆에 있던 예쁜 누님도 엄청 강했으니 끼리끼리 어울린다잖아요. 아!”
의철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내년에 학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 *
누나와 모든 쇼핑을 끝내니 오후 4시가 되었다. 쇼핑이라고 해 봤자, 왠지 나를 위한 옷이나 물건만 이것저것 사 주셨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골라 준 옷들을 보고 흡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쇼핑을 끝냈다. 이제 쇼핑을 끝내고 집에 가려나 싶더니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다고 말했다.
드디어 어제 말했던 곳에 가려나 싶었다.
그녀가 차를 운전하여 가는 방향은 처음 가 보지만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는 분명 영웅들의 묘 ‘아베타 현충원’이다.
차에서 내리니 누나가 누구를 보러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누나는 어제 보았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누나는 수많은 묘지를 지나치고 한 묘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김천훈.
그 수많은 마물들 사이에서 한 여아를 구하려다 돌아가신 김천운의 아버지다.
그의 묘지 앞에서 누나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이 침묵을 유지하다. 이내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침묵을 끊었다.
“사실 네가 계속 기억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여길 오는 걸 꺼렸지만, 역시 알려 줘야 할 거 같아서…….”
“……저도 이해해요.”
잃었던 기억을 다시 찾게 되면, 진짜 김천운이 어떻게 할지 예상이 간다.
아마 그래서 누나는 계속 고민했을 거다.
나를 지금 여기로 데려와도 될지.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에 나가서 힘들게 돌아오는 것을 보니 그래도 무언가 목표가 생겼다고 생각했어.”
“가만히 있어도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내 눈에는 현실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보였어. 천운아.”
“…….”
“천운아, 너무 혼자서 짊어지지 말렴.”
그녀의 표정에서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짓는 게 보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열심히 한 노력이 그녀에게 충격적인 현실을 피하려고 몸을 혹사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하는 훈련이 아니에요.”
“천운아…….”
“저 내년에 꼭 합격하고 싶은 학교가 있어요.”
“너 설마.”
“저 길영트 학교에 가고 싶어요.”
너무나 여린 마음과 상냥함 그리고 걱정이 많은 그녀다. 평범하게 반대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말했어야 했다.
“그렇구나.”
내 말이 끝나자, 예상했던 반응대로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며 사색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항상 미소를 짓던 누나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단다.”
“누나…….”
“너희 아버지도 훌륭한 아베타였지.”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 발끝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친절했던 누나는 거짓말이라는 듯이 붉게 빛나는 적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넌 아니야 천운아.”
“그치만.”
“너희 어머니도 그렇게 변했단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담긴 떨림이 느껴졌다. 가장 친했던 선배이자 존경했던 어머니의 혼수상태는 그녀 또한 충격이 컸을 거다. 아마 나까지 그렇게 변하게는 내버려 둘 생각이 없겠지.
“용서하렴 천운아.”
오지랖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현재 천운의 능력으로는 노력으로도 감당 못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난 학교에 가야 된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설이니 학교 안의 기연을 얻으려면 결국 다녀야 하고 학교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내 목숨과 직결된다. 유일하게 지금 이 상태에서 강해질 수 있는 곳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는 없다.
“죄송해요.”
“왜 그렇게까지 그곳에 가고 싶은 거니?”
“죄송해요. 그래도 어떻게든 가고 싶어요.”
내 말은 들은 그녀가 크게 한숨을 쉬며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일 준비가 되면 정원으로 나오렴.”
“네?”
“한 번이라도 네 손이 내 몸에 닿으면 허락해 줄게.”
결국 그녀는 제일 하기 싫은 선택을 한 모양이다.
심성이 착한 그녀다. 자신이 가장 친했던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보호자가 돼 준…… 그러나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게 설령 그녀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