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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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저 아이도 마찬가지지.’

재휘의 시선이 연습실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에게로 향했다.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아들 옆에서 지연이 일어났다.

동생이 수업을 듣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던 지연이 수업이 끝난 걸 확인하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누나! 나 어땠어?”

“오늘도 멋졌어.”

“히힛.”

누나의 칭찬에 지한이 배시시 웃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서 무슨 수업을 받는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동생이 오늘 받은 수업에 대해 떠드는 걸 전부 들어줬다.

“그런데 오늘 수업 중간에 딴생각했지.”

“윽.”

물론 지연이 그냥 듣고 있는 건 아니었다.

중간에 지한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피드백도 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랐던 재휘는 이제 지연의 피드백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재휘는 지연이 예사롭지 않은 아이란 걸 알고 있었다.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맏이가 드물지 않았지만 지연은 그런 것을 고려해도 훨씬 성숙했다.

가끔 튀어나오는 말과 눈빛은 어른의 그것과 같아 재휘는 지한보다 지연이 더 흥미로웠다.

“그럴 수 있어. 수업이 힘들면 솔직하게 잠시 쉬어가자고 얘기해.”

“응!”

“그리고 선생님한테 죄송했다고 말하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역시.

재휘는 지한이 중간에 딴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아이의 몸으로 몇 시간이나 똑같은 집중력을 유지하는 건 무리였으니까.

오히려 어른도 쉽게 하기 힘든 일을 묵묵히 따라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재휘는 지한을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연은 그것을 언급하며 지한이에게 쉬어가는 법과 학생으로서의 본분, 잘못한 것에 사과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니야. 괜찮다.”

똑똑

“실례합니다. 수업 끝나셨나요?”

“영훈이 형!”

“영훈 오빠.”

“마침 수업이 끝난 참입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민재휘 선생님. 그럼 아이들 데려가도 될까요?”

“네.”

영훈이 재휘에게 인사하고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아이들이 재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늘 수업 어땠어?”

“오늘은 지한이가 모델 워킹 배웠어.”

“재밌었어!”

“자세가 반듯하긴 했는데 근육이 부족한 거 같더라고.”

이것 봐라.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아이에게 지루한 시간이었을 텐데 지연은 거기서 지한이 부족한 점이 뭔지 분석하면서 보고 있었다.

재휘가 멀어지는 지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빛냈다.

처음에는 아들을 위해서 받아들인 일이었는데 흥미가 생겼다.

* * *

“내일은 내가 밤까지 스케줄이 있어서 데려다 주는 건 다른 사람이 할 거야. 괜찮아?”

“응! 난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인데 밤까지 일해?”

“어버이날 콘서트가 있는데 거기에 지원 가기로 했거든.”

말단 매니저의 비애였다.

담당하고 있는 연예인이 있었지만 아직 어린 배우 한 명뿐이었고, 지한의 스케줄이 많지 않았기에 다른 곳에 지원 나가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도 그 일 중 하나였다.

“지원?”

“다른 사람을 도와주러 간단 소리야.”

“그렇구나. 형 힘내!”

“고맙다.”

영훈이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아이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수업이 길었음에도 지치지 않는지 지한이 오늘 있었던 일을 영훈에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런 동생을 보는 지연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영훈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어버이날 콘서트.

영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지한은 어버이날이란 말이 나온 순간부터 동생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동생이 어버이란 단어에 반응해서 오형우랑 이미란을 그리워하기라도 할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괜찮은 걸까.’

지연의 눈이 예리해졌다.

부모 같지도 않은 놈들이었고, 사람이라도 말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학교에서 어버이날 카네이션 접기를 했었는데 그거 때문에 지한이가 오형우랑 이미란을 떠올렸을 거였다.

학교만 지뢰가 있는 게 아니었다.

문방구나 꽃집도 카네이션 천지였다.

‘여기저기 지뢰밭이네.’

지연이 남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영훈이랑 오늘 있었던 일을 떠들던 지한이 갑자기 배에 손을 얹고 말했다.

“누나. 나 배고파.”

“그러게. 벌써 7시야. 밥 먹을 시간이네.”

“미안하다. 내가 늦게 오는 바람에.”

“아니야. 오늘 수업 재밌었어!”

“그래도 밥은 꼭 챙겨 먹어야지. 집에 가면 바로 밥 시켜줄게.”

“나 계란밥 먹고 싶은데.”

“누나가 해줄게.”

“지연아 위험해.”

“누나 형보다 요리 잘하는데!”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나도 상처받는단다.”

“형 다쳤어?”

순수한 아이의 질문에 영훈이 먼눈을 하고 흐린 미소를 흘렸다.

“흐흐, 흐. 안 다쳤어.”

몸은.

마음은 다쳤지만.

영훈이 멀쩡하다면서 웃는 동생과 시무룩한 영훈을 보고 지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저기 누나.”

“응.”

“있잖아. 나 학교에서 카네이션 만들었는데.”

아.

결국 지뢰가 터졌구나.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우물쭈물하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한숨을 삼켰다.

외전. 주민과 카네이션(2)

지연은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눈치를 살피는 동생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리가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하다못해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멀쩡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우릴 도와줄 친척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랬다면

저랬다면

만약의 만약을 가정해서 평범한 아이처럼 자랄 우리를 상상해 보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무엇을 가정하든 현실은 지한이와 나, 단둘이서 헤쳐 나가야만 했다.

동생 앞에서 답답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입가에 힘을 준 지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동생에게 물었다.

“카네이션 보여줄래?”

지연의 대답에 지한의 얼굴에 먹구름이 걷혔다.

그런 동생을 보는 지연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가 눈치를 보게 만들었구나.

동생의 얼굴에 어른스럽지 못했다며 자책한 지연이 이어서 말했다.

“지한이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보고 싶어.”

“응!”

지한의 등 뒤에서 빨간색 색종이로 접은 카네이션이 튀어나왔다.

초등학생치곤 잘 접은 카네이션을 보고 지연이 조금 감탄했다.

“잘 만들었네!”

“흐히힛. 정말!?”

“응. 정말. 진짜 잘 만들었어.”

지연이 솔직하게 감상을 드러냈다.

생각해 보면 내 동생은 손재주가 좋았다.

선 따라 자르는 거랑 모형 조립 같은 것은 나보다 훨씬 깔끔하게 잘했었다.

지연이 동생이 접은 종이 카네이션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초록색 종이 리본에 적힌 이름을 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리본에 적힌 이름은 지연이 예상하던 이름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에 지연이 눈을 크게 뜨고 동생에게 물었다.

“지한아. 너 이 이름 어떻게 썼어?”

“영훈이 형한테 물어봤어. 어때? 안 틀렸어?”

안 틀렸냐니.

받아쓰기만 하면 100점 받아오면서 안 틀렸냐고 물어보긴.

“응? 응? 어때? 사장님이 이거 받으면 좋아하실까?”

“당연히 좋아하실걸.”

동생의 말에 지연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이라면 아마 받아주실 거다.

부모가 받는 꽃이라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지연이 생각하는 주민은 아이의 눈앞에서 대놓고 싫은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히힛. 다행이다. 누나가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말한 거랑 사장님한테 카네이션 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누나가 카네이션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사장님한테 주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좋아.”

“누나는 카네이션 안 좋아한 적 없어.”

“그치만 며칠 동안 카네이션만 보면 화냈는데.”

“나 화 안 냈는데?”

“으음. 표정은 그대로여도 뭔가 화난 거 같았는데.”

뭐라고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 지한이 답답한 얼굴로 생각을 계속했다.

자신이 아는 단어들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뜨끔!

동생의 말을 들은 지연은 가슴이 콕 찔린 것 같았다.

그런 걸 고민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카네이션 보여줄 때 머뭇거리더니 나 때문이었다.

앞으로 동생 앞에서는 더 조심해야겠네.

새삼 어린아이의 감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지연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동안 생각을 마친 지한이 고개를 털더니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카네이션 사장님한테 주러 갈래.”

“그래.”

“누나는 사장님한테 안 줘?”

“누나도 줄 거야.”

“좋아! 같이 주자!”

지한이 활짝 웃으며 꽃을 조심스럽게 쥐고 거실로 향했다.

동생의 환한 얼굴이 꽃을 줄 누군가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과 함께 무언가를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지연은 어버이날임에도 불구하고 지한이 그다지 기가 죽은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학교를 다녀온 아이들이 익숙하게 영훈의 자리로 향했다.

워낙 현장에서 뛰는 일이 많은지라 자리가 있어도 제대로 앉아서 일하는 시간은 적은 영훈이었지만 아이들이 올 시간에는 자리에 있는 편이었다.

누군가의 배려 덕이었다.

영훈을 본 지한이 두 손에 꼭 쥐고 온 무언가를 내밀었다.

“형! 이거!”

“세상에. 이거 형 주는 거야?”

“응! 내가 만들었어!”

“고마, 흑.”

“영훈이 형 울지 마.”

“안 울어.”

얼씨구.

지연이 지한에게 종이 카네이션을 받고 감격에 차 눈물을 글썽이는 영훈을 쳐다봤다.

저렇게 감수성이 풍부해서야 이쪽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을는지.

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지한의 양손에 들린 카네이션을 보았다.

지한이가 만든 카네이션은 두 송이였다.

보통의 아이에게는 부와 모가 있으니 카네이션이 두 송이 필요한 게 당연했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사장님에게 줄 한 송이 외에 다른 꽃은 영훈의 몫이었다.

“영훈 오빠. 내 카네이션도 받아줄 거지?”

“크흡. 당연하지.”

영훈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했다.

이따가 또 운전해야 할 텐데 이대로 보내도 될지 모르겠네.

“그럼 오빠. 일 잘하고 와.”

“잘 가!”

“다녀올게.”

아이들의 배웅에 양 가슴에 꽃을 단 영훈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아니 그런데 가슴 한 짝에 하나씩 꽃을 다니까 뭐랄까.

좀 남사스럽달까.

위치를 조금 더 위에 달면 괜찮은데 하필 가슴에서 튀어나온 곳에 달아서 시선을 두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으음. 운전만 하니까 별로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지연이 영훈의 양 가슴에 달린 꽃을 애써 외면했다.

아직 나머지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던 지한에게 지연이 말을 걸었다.

“가자. 사장님 위에 계실걸.”

“응!”

어제 사장님 언제 출근하는지 슬쩍 묻고 다닌 덕에 지금 사장님이 회사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기 회의는 없는 날이고 주간 회의도 없는 날이라 기본 서류작업만 하고 계실 거다.

그 정도라면 잠깐 가서 카네이션만 주고 와도 괜찮겠지.

지연이 지한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띵-

남매는 사장실까지 직행으로 올라왔다.

사장실 앞으로 가자 남 비서가 아이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니.”

남 비서가 무릎을 꿇어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지한이 씨익 웃으며 손에 든 카네이션을 내보였다.

“이거 사장님 주려고요!”

“사장님한테?”

남 비서가 아이들의 손에 들린 카네이션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 남 비서가 얼굴에 미소를 띠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 사장님한테 물어보고,”

벌컥

“물어볼 필요가 뭐가 있다고. 그냥 아이들이 마실 만한 거랑 과자 좀 챙겨서 들어와.”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래. 남 비서가 먹을 거 가져올 거야. 안에서 기다리자.”

“네!”

“네!”

주민이 아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실에는 주민이 일하는 책상, 손님을 맞이할 테이블, 액자 몇 개가 걸려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소파에 편하게 앉으렴.”

“사장님 일 안 해요?”

“방해 안 할게요. 이것만 주고 나갈 거예요.”

“아니야. 나도 마침 쉬려고 했단다.”

일하던 중 아니었나?

업무 중임에도 찾아온 아이를 위해서 시간을 내다니.

빈틈 하나 없는 얼굴로 아이들을 위해서 소파에 앉은 주민을 보고 지연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하긴 소속 연예인들을 그냥 돈벌이 수단으로 봤으면 우리 때문에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보러 오지도 않았겠지. 우리를 맡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문득 자각한 사실에 지연이 주민을 다시 봤다.

똑똑

“들어와.”

주민의 허락에 남 비서가 음료와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어린아이를 배려한 오렌지 주스와 부드러운 과자를 내려놓은 남 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뭔 과자를 한가득 쌓아왔데.

그런데 맛있어 보인다.

지연이 베이커리에서 사 온 듯 생각보다 비싸 보이는 빵과 쿠키들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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