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인데?”
“이제 고등학생이잖아.”
희연이 딱 잘라 말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지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갔다.
‘뭐지? 화난 거 같은데.’
그날 이후 희연은 지연을 피했다.
교실에서 말을 걸어도 단답형으로 말하고 다 같이 있을 때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불편했다.
얼마 남지 않은 친구와 이렇게 불편한 사이로 있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하고 다시 예전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기…희연아. 잠시 얘기 좀 할까?”
진지한 지연의 분위기에 희연이 힐끔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가자. 나도 할 말 있었거든.”
역시 내가 뭘 잘못했나봐.
뭐지? 뭐였더라?
희연의 뒤를 따르며 지연이 초조하게 생각하는 사이 복도 끝 컴퓨터실 앞으로 간 희연이 몸을 돌렸다.
“너.”
“으, 응?”
“내가 다른 애들 앞에서 희맹이라고 하지 말랬는데 왜 해?”
“그건 미안해! 앞으로는 더 주의할게.”
“아니. 그냥 말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어?”
왜…. 왜 말을 걸지 마라고 하는 거야.
지연의 눈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떨렸다.
“사실 다른 애들이 너 싫어하는 거 알아? 그런데 그 전에 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말 못 한 거뿐이야. 사실 다들 너랑 같이 어울려주는 거 귀찮아하고 있었다고.”
다른 애들도…?
어제까지만 해도 게임하면서 수다 떨었는데….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앞으로 교실에서 나한테 말 걸지 말고 다른 애들한테도 아는 척하지 말아줘.”
“…그래. 미안. 앞으로 아는 척 안 할게.”
지연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가시가 삐죽삐죽 달린 선인장을 삼킨 것 같았다.
눈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프고 시리지만 지연은 꾹 참았다.
그렇게 지연은 친한 무리마저 잃었다.
* * *
지연의 고등학교 생활은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입학 전부터 최악의 상태였던 지연은 1학년 1학기에 남은 인연마저 절반 잘라내야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연이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휴학을 할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학교는 다녀야했다.
지긋지긋한 학교였지만 검정고시 보다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더 안전했다.
그때 지연의 반에서 휴학생이 나왔다.
모든 학생이 상담에 들어갔다.
담임은 그때 지연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많이 고생했겠다.”
우습게도 지연은 그 말에 조금 위안을 받았다.
내가 힘들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반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에 조금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비록 또래가 아니라 선생이었지만.
“지연아. 선생님이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해.”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힘든 거 있으면 얼마든지 와서 말하고. 그렇다고 야자 많이 빠지지 말고.”
“네.”
“검정고시를 치겠다면 도와줄게. 하지만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지연이 네가 학창시절을 조금 즐겼으면 좋겠어.”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
고등학교 담임은 다행이 적극적이었다.
처음 담임을 맡았다는 것에 대한 열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덕에 지연은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뭐 그딴 애가 다 있냐.”
“내 말이.”
“지연아. 석식 오늘 맛 없는데 매점 갈래?”
“맞아. 차라리 컵라면이 더 나아.”
게임 채팅으로 지연을 뒷담했던 아이들을 알려줬던 초롱과 초롱 덕에 건너건너 알게 된 같은 중학교 출신 수진이 지연을 챙겼다.
그렇게 초롱과 수진, 담임 덕에 지연은 고등학교 생활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성적도 다시 오르고, 학교 행사도 즐겼다.
무심했던 3학년 담임은 나중에 교무실에서 지연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너는 절대 안 될 거라고 말하던 3학년 담임은 졸업식까지 지연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연아. 잘됐다.”
“고마워. 너도 가고 싶었던 대학 됐다면서!”
“응. 그렇지.”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같은 고사장을 겪은 초롱과 수진이 지연에게 축하를 보냈다.
지연은 초롱의 앞에서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 얼굴을 본 초롱이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수능 끝난 기념으로 우리 엄마랑 아빠가 식당 잡았는데 올래? 다른 애들도 온다고 했어.”
“음. 내가 가도 될까?”
“수진이랑 다른 애들도 괜찮대.”
혹시나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하며 지연이 머뭇거리자 친구가 다른 애들도 허락했다며 지연의 참가를 독려했다.
괜찮, 겠지?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친구가 만족스러운 듯이 빙그레 웃었다.
외전. 과거로부터 날아온 인연(3)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이제 지연에게 두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대학교에 오면서 조금 밝아지긴 했지만 언제나 가난과 불행이 지연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대학에 와서 새로운 친구도 생겼다.
취업 방향도 훨씬 탐색하기 편했다.
담임과 친구들 말대로 대학에 간 건 잘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역시 초롱이들이야.
중고등학생을 같이 다녔던 초롱이랑 수진이만이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세 사람이 있는 단톡방이 울렸다.
[너희들 방학 때 내려옴?]
[미안해. 나 알바!]
[오지연 또 알바냐.]
[얼굴 잊겠다. 진짜.]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내는 지연을 보며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지연은 친구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생활비가 떨어지는걸.
[미안. 대신 명절에는 내려갈게!]
[그거야 당연하지.]
[아. 오지연 오면 해 줄 말이 있었는데.]
[? 뭔데?]
[나 다음 학기부터 교환학생이야.]
[진짜!? 잘 됐다, 수진아! 축하해!!]
[(이모티콘)]
좋겠다.
나도 영어권으로 교환학생 가고 싶었는데 형편이 따라주질 않았다.
하다못해 중국에 있는 학교로라도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는데 위험하다면서 엄마랑 지한이가 말렸었지.
괜찮아. 영어랑 중국어는 한국에서도 배울 수 있으니까.
지연이 머릿속에서 아쉬움을 몰아내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나 이번 명절엔 못 만나. 가족끼리 유럽여행 가기로 했어.]
[잘됐다. 나도 언젠가 초롱이 너처럼 유럽 여행 가고 싶다.]
[힘내 다음엔 우리끼리 해외여행 가자(이모티콘)]
[응! 알바 열심히 할게!]
초롱의 말에 지연이 함께 여행 갈 날을 꿈꿨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친구들이랑 여행.
지연이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에 몇날 며칠을 들뜬 채로 보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가는 길이 달라도 이 친구들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연이 공무원 준비하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업했고, 지연과 친구들의 사이는 조금씩 서먹해졌다.
그날은 고시 공부를 포기한 지연의 소식을 들은 초롱과 수진이 모처럼 지연을 부른 날이었다.
“너 립스틱 이쁘다.”
“그치? 면세점에서 산 건데 발색이 예뻐서 잘 쓰고 있어. 네 가방도 예쁜데?”
“회사 다니면서 쓰려고 하나 샀어.”
초롱이 고시생활을 포기하고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지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연이 너도 진작에 공무원 말고 그냥 취직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맞아. 근데 고시 생활이 길어서 취직 힘들겠다. 요즘엔 다들 스펙이 좋아서 웬만한 곳은 힘들걸? 우리도 교환학생에 석사에 이런저런 활동한 덕에 겨우 그럭저럭 좋은 곳에 취직했지.”
“맞네. 지연이는 조금 힘들지 모르겠네.”
초롱과 수진이 지연을 돌아보며 걱정했다.
걱정하는 듯했다.
“그래도 서울에서 월세 내고 사려면 월 250은 벌어야지 않겠어? 역시 공무원보다는 취업이지.”
“그것도 맞지. 나도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집 구하는 것도 힘들다. 나도 회사 근처에 겨우 구했어. 월세가 무려 60이야.”
“나도 힘든 거 같아서 그냥 중소기업 알아보고 있어. 지긋지긋한 고시 생활이랑 상관없는 걸로.”
“뭐 하게?”
“이왕이면 좋아하는 거 해 보려고. 웹소설이나 웹툰 쪽?”
초롱과 친구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묘하게 한심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지연이 너 이런 데 가려고? 여기 가면 대출금은 어떻게 갚고 돈은 모으면서 살 수 있겠어? 실수령이 200도 안 될 거 같은데.”
“괜찮아. 나 아직 LH 재계약 할 수 있어. 그 안에 돈 좀 모으면 될 거야.”
“…그래?”
지연의 계획을 들은 친구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초롱과 다른 친구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럼 그 전에 사회생활 좀 해 보는 건 어때?”
“사회생활?”
“고시생활 하면서 감이 좀 떨어졌잖아. 우리 회사에서 일당 10만 원짜리 단기 알바 구한다고 했는데 해 볼 생각 없어?”
“10만 원짜리!? 좋지!”
지연은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역시 이런 꿀알바는 지인찬스가 최고지.
그때까지만 해도 지연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알바비가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지연이 조심스럽게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저기. 실례합니다. 알바비가 아직 안 들어왔는데 언제쯤 들어올지 알 수 있을까요?]
지연이 알바톡방에 조심스럽게 글을 올리자 곧바로 친구에게서 갠톡이 왔다.
[지연아. 너 내일 시간 돼?]
[어? 응. 돼지.]
[그럼 낼 ○○역 4번 출구에서 2시에 보자.]
[알았어!]
갑자기?
혹시 알바비에 대한 것이려나?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이지만 지연은 알바비 때문에 친구가 걱정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며 다음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왔을 때.
그곳에는 지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그런 걸 다른 사람도 있는 톡방에 올리면 어떡해!”
“…어?”
“지연이 너 때문에 수진이가 엄청 난처해졌잖아.”
초롱이 수진이 느꼈을 수치심과 난감함을 토로하며 화를 냈다.
미리 전해 듣지 못한 초롱의 존재에 반가웠던 지연은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음성만 내뱉었다.
“아니, 난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이래서 우리가 너한테 알바하면서 사회생활 좀 하라고 한 거야. 이렇게 사회를 몰라서 어떡하니.”
“미안. 나는 그런 줄, 모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지연이 일단 사과부터 했다.
자기 때문에 수진이 난처하게 됐으면 사과부터 하는 게 맞았다.
“초롱아 그만해. 하아. 톡방에 팀장도 있었는데. 진짜 내가 너 때문에.”
“세상에 팀장도 있었어? 수진이 너 너무 난감했겠다. 지연아 정말 가서 사고치면 어떡해. 수진이한테서 들어보니까 일도 잘 못 했다며?”
“맞아. 급해서 알바생 썼는데 결국 전부 다 다시하게 생겼어.”
“아니 복사해서 번역기 돌린 다음에 그대로 입력하면 되는 거라면서. 그렇게 쉬운 일도 못 해?”
초롱의 말에 수진이 지연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게 못 하더라고.”
“그런 것도 못 하다니. 역시 취준하면서 오피스도 아직 안 배웠나 봐.”
초롱이 수진처럼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즐거운 자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곧 처리될 거란 답을 할 줄 알았다.
모두 아니었다.
취조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연은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역에서 내려 환승한 버스에서
집 앞 골목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모두가 있는 톡방에 알바비를 물어본 것?
취업 준비를 하겠다며 도움을 구한 것?
쥐뿔도 없으면서 서울에 살겠다고 한 것?
시험도 떨어졌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한 것?
지연의 발자국 뒤로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아니야. 내 잘못은.’
이미 친구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 * *
“컷! 지연 씨.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연 씨! 오늘 너무 멋졌어요!”
현장에서 ‘이게 바로 지연인가!’라는 감탄사를 몇 번이고 터트리게 만든 지연이 지친 기색도 없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장면에 감독과 광고주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이 상기된 얼굴로 지연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두 사람보다 지연에게 더 빨리 다가간 사람이 있었다.
“촬영 끝난 거 축하해.”
“지한아.”
존재감을 죽이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지한을 한눈에 알아본 지연이 놀라워하며 동생을 올려다봤다.
지연의 말에 지한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감전이라도 된 듯이 몸을 파르르 떨며 동작을 멈췄다.
‘오지한?!’
‘언제부터 여기에!’
‘아. 최애를 눈앞에 두고 못 알아보다니!’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졌다.
지한이 스태프에게 눈인사하며 지연을 데려 나왔다.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연이 재빨리 벤으로 올라탔다.
“화장도 다 안 지웠는데.”
“집에 가서 내가 지워줄게.”
“뭔데. 뭐 때문에 이렇게 급한 건데.”
“그냥. 누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아.
티를 내고 말았나 보다.
동생의 말에 지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동생의 시선에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아는 사람이었지.”
지연의 말에 지한이 조용히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당장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걸 안 지한이 장훈을 재촉했다.
“형. 집으로 가 줘요. 신호 지키면서 빨리.”
“내가 그거 잘하는 걸 어떻게 알았대. 걱정마.”
뭔가 묘한 분위기를 파악한 장훈이 애써 유쾌하게 말하며 액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