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수고했다.”
순식간에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이 답안지를 챙겨서 나갔다.
1년 같던 수십 분이 끝낸 아이들이 소리 질렀다.
이제 해방이다!
길고 길었던 중학교 3학년.
길었던 중학생 시절이 끝나가는 것이었다.
지연이 방긋 웃으며 시험지를 챙겼다.
* * *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각 반에 흩어진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나간 아이들 뒤로 남은 아이들 몇 명이 모여 속닥거렸다.
“아, 오지연 재수 없어.”
“걔 왜 그렇게 나대?”
“몰라. 선생님한테 예쁨 좀 받는다고 수업 시간에 나서는 거 보면 존나 꼴불견임.”
모두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좋은 뜻도 있었지만 안 좋은 뜻도 가지고 있었다.
팬이 있으면 안티도 생기기 마련이듯이 지연을 아니꼬워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때의 지연은 그런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줄 몰랐으며, 가면 뒤에 숨어진 악의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지연이 교실에 없는 사이 반에는 그런 악의가 음습하게 감돌고 있었다.
“솔직히 시험 때마다 족집게로 찍어주는 것 때문에 받아주는 거지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오지연 같은 애랑 말하겠냐.”
“풉. 너 말이 좀 심하다?”
“심하긴. 내가 걔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받는데. 엄마가 뭐라는 줄 알아? 돈이 없어서 학원도 못 가는 오지연도 그렇게 성적이 나오는데 너는 학원도 과외도 하는데 왜 성적이 안 나오냐고. 시바. 그게 어디 내 탓이야?”
“뭐지. 우리 집이랑 레퍼토리가 같은데? 학부모들끼리 커뮤니티라도 있는 거야 뭐야.”
“아무튼 쓸데없이 성실해서 우리만 피곤하게 만들잖아. 거렁뱅이 주제에.”
깔깔깔깔
지연의 행동은 의도치 않은 적의를 불러왔다.
시험도 끝났겠다, 학기도 끝났겠다.
더 이상 지연에게 볼일이 없어진 아이들이 서서히 수면 아래에 있던 지연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닥이는 아이들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시험이 끝났는데도 학원에 가는 친구들 덕에 지연은 버스에서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야 했다.
버스가 중심가에서 벗어나 종점에 가까워졌다.
종점을 몇 정거장 앞두고 내린 지연이 집으로 향했다.
시험이 끝났지만 아직 지연이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알바할 데 없나?’
바닷가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중학생을 써 주는 알바가 많을 리 없었다.
지연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고등학교 입학비 때문이었다.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매번 급식비가 밀려서 교무실에 불려가곤 했으니까.
고등학교에 가면 참고서며 급식비며 또 얼마나 많은 돈이 들겠는가.
중학교는 야자가 없으니까 버스비가 없으면 걸어올 수 있기라도 한데 고등학교에 가서 교통비가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 막막해졌다.
“역시 알바를 구해야겠어.”
그나마 가능성 있는 곳이라면 도시 내에 있는 유일한 패스트푸드점.
공고가 났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우웅-
주머니에 넣어둔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연이 폴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왜 접속 안 해?]
반 친구이자 게임 친구였다.
생각해 보니 얘도 학원 안 다녔지.
지연이 싱긋 웃는 얼굴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집 다 와 가!]
[얼른 와.]
[ㅇㅋㅇㅋ]
알바는 일단 접어두고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지연이 날듯이 집에 들어와 가방을 의자에 걸고 컴퓨터를 켰다.
시에서 지원해 준 컴퓨터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힘겹게 켜진 모니터 앞에서 지연이 익숙하게 사이트로 들어갔다.
로그인하고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재빨리 채팅을 거는 게 보였다.
[초롱쓰 ㅎㅇㅎㅇ 뭔데? 무슨 일 있음? ㅋㅋㅋㅋㅋ]
[내가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뭔데.]
메시지가 채팅창에 떠올랐다.
화면에 떠오른 문장을 보고 지연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애들이 다 너 싫어하는 거 알아?]
싫어한다고? 왜?
지연이 키보드를 칠 생각도 못 하고 멈춰있자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오늘 너 가고 나서 윤지랑 혜림이가 뒷담화 까더라.]
윤지랑 혜림이?
내 번호 앞뒤에 있는 애들인데.
그래서 시험 때도 항상 예상 문제 찍어주고 그랬어.
평소에도 잡담 떨거나 그랬는데.
그 애들이 갑자기 왜?
[윤지랑 혜림이뿐만 아니야.]
두 사람이 끝이 아니라고?
지연이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키보드를 쳤다.
[누구? 우리 반 애들 누가 내 욕하는데? 뭐라고 해?]
[대부분이.]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했는데. 내가 출석번호부터 불러줄 테니까 한 명씩 말해 줘.]
[생각나는 대로 말해줄게. 1번부터 불러봐.]
지연이 1번부터 아이들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지연이 이름을 적으면 초롱이 자신이 들었던 얘기를 썼다.
스크롤바가 작아지는 만큼 적나라하게 알게 된 사실에 지연이 떨림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깔깔깔 비웃었던 반 친구들의 말을 알게 된 지연이 석상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뛰쳐나가 저년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 주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내일 학교에 갈 때까지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머리에 있는 것 같아.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숨은 쉬고 있던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ㄴㄴ그냥 맘에 안 드는듯]
[왜? 뭐가 맘에 안 드는데?]
[글쎄? 얘기 들어보면 형편이 안 좋은데 공부 잘하는 거?]
그게,
“뭐야….”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날 이용하고 뒤에서 뒷담을 했단 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걔들이 널 싫어하는 건 이유가 없음. 그냥 걔들 눈에 니가 띈 거임.]
그날 지연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전. 과거로부터 날아온 인연(2)
이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와 싸운 적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었다.
친한 친구가 있었지만 반 아이들과도 무난하게 잘 지내 왔다.
그런데
그동안 쌓아 올렸다고 생각한 유대가 파도가 쓸고 지나가면 사라질 모래성이었다니.
그날 이후 지연은 반 친구들과 서먹해졌다.
지연의 바뀐 태도에 아이들은 의아해했고,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나 그녀에게 다가와 변명하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걸 보고 지연이 더욱 좌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듯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어제까지만 해도 살갑게 인사를 나눴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경험은 지연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지연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워졌다.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넓고 낮게 쳐져 있던 마음속 울타리가 좁고 높은 벽으로 바뀌었다.
인간관계는 좁아졌으며 지연은 몇 명 안 되는 친구들에게 심적으로 의지하곤 했다.
왜 힘든 일은 한 번에 찾아오는가.
반 전체가 자신에게 악담을 퍼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연은 오밤중에 흉기를 든 오형우를 피해 경찰서로 뛰어가야 했다.
지연이 커 갈수록 오형우의 난동은 더욱 심해져 갔다.
칼을 숨기기도 하고 오형우가 술에 취해 잠들 때까지 밖에 나와 있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잠들었어야 할 오형우가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노.”
술 때문에 게슴츠레한 눈이 이미란과 남매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날붙이는 없어.
없어야 했는데.
오형우의 손에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있었다.
‘아. 소주병을 안 치웠구나.’
칼만 흉기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집에는 흉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다.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오형우가 반쯤 풀린 눈을 한 채 이미란에게 다가갔다.
그때 지연이 나섰다.
“엄마! 도망쳐!”
지연이 오형우를 밀쳤다.
다가오는 오형우를 보고 하얗게 질려 있던 이미란은 제 딸이 오형우를 밀치는 것을 보고 마법이 풀린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래층에 사는 주인집 사람들뿐이었다.
이미란이 도움을 요청하러 간 사이 지연은 날뛰는 오형우를 막았다.
지한은 그 모습을 보고 문턱을 넘지 못하고 꼼짝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때리고
맞았다
지연은 살기 위해서 오형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어허이. 아저씨 와 이랍니까!”
속옷 바람으로 올라온 주인집 남자가 뒤에서 오형우를 붙들었다.
그때 지연의 손을 잡고 이미란이 밖으로 뛰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오형우에게 맞아 엉망인 몰골로 이미란에게 붙잡혀 지연은 밖으로 뛰었다.
그 뒤를 지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따랐다.
16살 겨울이었다.
* * *
“너 괜찮아?”
방학이 끝나고 나서야 지연의 일을 전해 들은 초롱이 지연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이미 꽤 지났기도 했고, 방학 동안 멍이 사라지기도 해서 그렇게 봤자 사라진 상처가 보일 리 없었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친구의 존재에 지연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 괜찮아.”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그냥. 뭐. 이모 집에서 있어. 엄마가 곧 방 구할 거래.”
사실은 이모가 우릴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찜질방에 있지만.
그래도 엄마가 곧 방을 구한다고 했으니 아주 잠깐만 있으면 되겠지.
“다행이다. 이사하면서 이혼도 하는 거지? 이제 고등학교 생활은 안심하고 할 수 있겠네.”
“어? 아아. 응.”
초롱의 말에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면서 애매한 대답을 흘렸다.
그 모습에 초롱이 미심쩍은 얼굴로 지연을 쳐다봤다.
“뭐야. 그 대답. 또 무슨 일 있어?”
“아아. 나 학교 휴학할까 싶어서.”
“뭐?!”
지연의 말에 초롱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네 사정이 어떤지 아니까 섣불리 뭐라 말을 못 하겠네.”
“그치? 입학금이야 어떻게 했지만 고등학교 가면 이런저런 돈이 많이 들 테니까.”
입학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초롱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방송으로 지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담임쌤인가 봐. 나 교무실 좀 다녀올게.”
“다녀와.”
지연이 교무실로 나섰다.
초롱이 지연의 뒤를 고요히 쳐다봤다.
* * *
담임은 지연을 설득했다.
그 덕에 지연은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비록 몇 안 남은 다른 친구들은 같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떨어져야 했지만 작은 도시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불안정한 생활, 불안정한 정신, 불안정한 시기.
지연은 불안해했고, 피해망상이 생겼으며, 매사에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혼자 고립되어 갔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쟤 좀 이상하다.”
이전과 달리 지연은 더 이상 누구와도 잘 지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지연은 괜찮았다.
다행히 같은 반이 된 친구가 있었으니까.
“지욘. 밥 먹으러 가자.”
“아! 금방 갈게. 이것만 챙기고!”
“빨리 와. 애들 기다리잖아.”
“알았어.”
지연이 품에서 무언가를 챙겨 나갔다.
밥 먹고 좀 쉬려면 일찍 나가야 하는데.
가뜩이나 우리 반이 급식소에서 제일 먼데 지연의 행동 때문에 줄을 오래 서게 생겼다.
“희맹희맹. 나 오늘 타로카드 들고 왔다?”
“희맹이라고 하지마. 근데 타로카드?”
“응! 카드가 예뻐서 중고로 샀는데 한번 장난삼아서 해 보려고.”
“너 타로 볼 줄 알아?”
“아니. 그냥 뽑기해서 내 식대로 해석하려고.”
지연의 말에 희맹이라고 불린 친구가 지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저 대책 없는 말은.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거 때문에 시간을 끌게 했단 말인가.
“어? 얘들아! 오래 기다렸어?”
“아니. 어차피 우리 반 수업 조금 늦게 끝났어.”
“진짜? 누구 수업이었는데?”
“물리.”
“엑.”
물리란 말에 철저한 문과생인 지연이 목 졸린 소리를 냈다.
그런 지연의 뒷모습을 희맹이란 친구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 * *
새로운 친구는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지연은 중학교에서 같이 진학한 친구들하고만 지냈다.
타로카드라든지 만화책이라든지 폰게임이라든지를 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지연은 그 시간이 좋았다.
야자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지연은 희맹과 함께 교실로 향했다.
“희맹,”
“희맹이라고 하지 말랬지.”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희연아. 내일은 뭐 할까.”
“뭐 하긴 공부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