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유령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온 그가 눈을 뜨지 못하는 13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옛날처럼 사람을 갖고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체불명의 괴인의 말에 13번의 얼굴에 황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좋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때리고 짓밟고 굴복시키던 그때.
그때가 13번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단정한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13번의 본성은 그런 것이었다.
사람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고 망가트리며 희열을 느끼는 것.
그런 13번의 귓가에 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게임을 하자. 네가 원하는 거 모두 할 수 있는 게임을.”
괴인의 목소리가 악마의 음성처럼 13번의 뇌에 박혀 들었다.
* * *
“누군지도 모를 놈의 말을 듣고 이걸 다 만들었다고?”
13번의 자백에 진성이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왜 이딴 판을 만들어서 그 사건의 관계자들을 모았는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더 중요한 건 하회탈이란 존재였다.
“저 하회탈은 뭐야.”
“뭐긴 날 대신해서 쥐새끼들을 없애 줄 사냥개지.”
“그놈의 정체가 뭐냐고.”
“용병. 돈이면 뭐든 다 한다는 놈이야. 외국에서 유명하다더군.”
“게임 한 번 하겠다고 외국 용병을 고용하다니. 넌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용병이라고 별거 있는 줄 알아? 돈 주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너희랑 다를 바 없잖아.”
13번의 말에 진성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개새끼.
나도 나쁜 놈이지만 저 녀석은 인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은 저 녀석이니 일단은 지켜볼 수밖에.
“그 용병이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데?”
진성의 말에 13번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게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었다.
돈만 주면 어떤 의뢰로 다 하고, 임무 수행률이 89.9%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이상했다.
왜 내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래서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돼?”
“하회탈은 목표를 전부 제거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그거 믿을 수 있냐? 지금도 저렇게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모처럼 논리적인 진성의 말에 13번이 그를 노려봤다.
13번이 노려보든 말든 진성은 어서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게임을 끝내는 방법이나 말해.”
“탈출하려고?”
“저 녀석이 우릴 안 죽인다는 보장 있냐?”
진성의 말에 13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거봐. 자기도 확신이 없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불리할 때 대답을 피하는 13번을 보고 진성이 재촉했다.
“어서 빨리 탈출하는 방법이나 말해.”
“쯧.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와.”
이런 상황에서도 고압적인 13번을 보고 진성이 인상을 찡그렸으나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뭐가 됐든 저놈만큼 이 게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진성이 13번의 뒤를 따랐다.
* * *
그러나 13번이 아니어도 이 게임을 잘 진행하고 있는 참가자가 있었다.
15번이 가장 많은 단서를 모아 사건을 추리했다.
“아이고. 아가씬 어쩜 그렇게 잘 찾아?”
막힘없이 나아가는 15번의 모습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인지 4번 참가자자 편하게 말을 걸었다.
주부라고 하더니 말 거는 솜씨가 남달랐다.
“GAME MASTER가 찾으라는 진실을 저도 찾고 있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진실이 뭔데? 아가씨는 이 게임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어?”
주부인 4번 참가자와 기자라던 5번 참가자가 대답을 촉구했다.
그 두 사람을 보던 15번이 무심하게 말했다.
“교무실에서 달력을 발견했어요. 2005년 달력이에요. 그 말은 사건이 일어난 게 2005년이란 뜻이죠. 그리고 교장의 책상 모니터에서 기사를 봤어요. ‘사교육의 폐해? 성적비관으로 학교 옥상에서 투신한 중학생’이란 기사였죠.”
15번의 말에 4번과 5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들에게 15번이 비수를 날렸다.
“저는 GAME MASTER가 말한 진실이 2005년 세울중학교 투신자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15번이 4번과 5번 참가자를 보았다.
두 사람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찔리는 게 있는 모습이었다.
그 둘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본 15번이 몸을 돌려 단서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4번과 5번이 우물쭈물하며 뒤따라 붙었다.
“어, 어디가?”
“짐작 가는 곳이 있는 거야?”
“자살한 학생이 자주 가던 곳으로 가려고 해요.”
“어딘데?”
“아가씨는 그걸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의 말에 15번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 애랑 같은 반이었거든요.”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학생의 말에 두 사람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 * *
게임이 시작한 지 어느덧 2시간이 흘렀다.
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회탈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은 반도 채 되지 않았다.
<2005년 5월 13일>
<도서실 8번째 책장 3번째 선반>
<2-7반>
참가자들이 하나씩 단서를 찾아갈 때마다 밖에 있는 사람들도 GAME MASTER의 목적에 점점 다가갔다.
“‘중학생 투신 자살 사건’?”
“네. 2005년 5월 13일. 세울중학교에서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김진선이란 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그게 지금 저 살인게임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 일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하의 말에 TF팀장이 눈썹을 모았다.
12년 전의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그럼 GAME MASTER 녀석도 그 일의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사건 설명해봐.”
“넵. 당시 기사에 의하면 김진선이란 학생이 성적을 비관하여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사교육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었죠. 하지만 당시 수사 기록을 은폐한 흔적이 있습니다. 아마 김진선 학생이 자살한 이유는 성적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학교 폭력일 수도 있고, 만에 하나의 경우, 타살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 폭력.
만약 김진선 학생이 뛰어내린 것이 성적이 아니라 학교 폭력 때문이라면 이건 명백한 가해자가 있는 사건이었다.
“학교 폭력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당시 세울중 일진들입니다. 지금 저 게임에 세울중 일진이었던 사람들이 참가한 걸 보면 거의 유력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
부하가 화면에 누군가의 사진을 크게 띄웠다.
사진 밑에 게임 참가번호가 올라왔다.
팀장이 그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참가번호 13번. 세정그룹의 후계자이자 당시 세울중 일진의 숨은 머리라고 판단됩니다. 그 사건을 담당하던 경찰, 공무원, 의사와 세정그룹 사이의 묘한 자금 흐름이 확인됐습니다.”
의심이 확신이 되려 했다.
하지만 13년 전의 일을 지금 와서 조사하기에는 아직 정황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부족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12년 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이었다.
그때 부하가 다른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조사하던 중 이상한 걸 확인했습니다.”
13번이 얼굴을 가린 누군가와 만나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얼굴을 가린 누군가의 분위기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하회탈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저거 설마 하회탈 녀석이냐?”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13번이 저 사람을 만났고 13번과 만나기 전 저 사람이 해외에서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13번이 하회탈을 불러들였다고?
“설마 GAME MASTER가 13번이란 뜻이냐?”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걸 보십시오.”
부하가 웬 영상 하나를 틀어줬다.
누군가가 포스트에 초대장을 넣는 모습이었다.
“참가번호 6번의 우편함입니다. 운 좋게 그 앞을 지나가던 택시 블랙박스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검은 옷 입은 놈이 누군데?”
“세정그룹 인사기록에서 저 사람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일을 그만뒀지만 13번의 비서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13번이 GAME MASTER라는 확률이 더 올라갔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13번, 아니. 이현민 자금 흐름이랑 동선 싹 다 파악해. 이선주 회장 자택으로도 사람 보내고, 저 비서였다는 사람도 당장 수배해. 또 하회탈로 추정되는 녀석이 어디서 입국했는지, 정체가 뭔지, 해외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싹 다 긁어와!”
“넵!”
팀장의 지시를 받은 TF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그들이 빨리 움직일수록 구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갈 것이다.
팀장이 세정그룹으로 가기 위해서 나서려고 할 때, 조금 전 브리핑했던 부하가 다가왔다.
“저, 팀장님. 아직 말씀 못 드린 게 하나 있습니다.”
“뭐야. 빨리 말해.”
“저 게임에서 12년 전 사건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 딱 하나 있습니다.”
관련이 없는 사람?
그럴 리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모두 12년전의 일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 텐데.
팀장이 꺼림직함을 느끼고 부하와 눈을 마주쳤다.
“누군데?”
“이 사람입니다.”
부하가 사진 속에서 의외의 인물을 가리켰다.
팀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285. <장난>(4)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셋.
아니. 둘이 되었다.
조금 전 마지막 단서가 옥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1번과 13번 15번이 중앙계단으로 향했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는 하회탈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15번을 던져주고 옥상으로 뛰었다.
“씨발.”
“왜? 조금 전 반장이 한 말이 양심에 찔리냐?”
“입 닥쳐.”
진성의 비아냥에 현민이 사납게 말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진성의 말처럼 반장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사과해.’
‘지금 그 말이 나와?’
‘하회탈이 네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그럼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왜 네 말을 안 듣는지.’
‘…그래서?’
자신의 말에 설득됐는지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에 12년 전 2-7반의 반장이자 동창인 주희가 말했다.
‘내 가설에 의하면 가장 유력한 가설은 딱 하나야. 하회탈이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아서 사건의 관계자들을 죽이고 다니는 거지.’
‘누가 하회탈에게 의뢰했다는 거야.’
‘누구겠어. 죽은 진선이의 지인이지.’
주희의 말에 현민이 피식 웃었다.
‘고아새끼한테 지인이 어디 있어?’
‘진선이랑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어?’
‘구해인?’
현민의 옆에 있던 진성이 대신 대답했다.
구해인이란 이름에 현민이 기억 속에 묻어뒀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감히 자신의 놀이를 방해하고 거스르던 놈이 하나 있었지.
김진선이 죽고 나서 다른 곳으로 전학 갔다고 한 거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린 현민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래봤자 친한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12년이 지난 지금 복수하겠다고 하회탈에게 의뢰를 했을까? 하회탈의 몸값이 얼만지 알고 있기나 해?’
현민이 주희의 추리를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추리였다.
자신도 세정그룹의 정보망을 이용해 간신히 정체를 알게 된 용병이었다.
임무 성공률이 무려 89.9%나 돼서 의뢰비도 장난 아니게 비쌌던 용병이었다.
그런 놈을 서민인 구해인이 어떻게 알았을뿐더러 의뢰할 돈이 어디 있었겠는가.
운 좋게 로또를 맞았다고 해도 힘든 일이었다.
‘구해인이 아니어도 진선이를 아는 사람이라는 건 거의 확실해.’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하회탈이란 놈이 감히 내 의뢰가 아니라 김진선의 지인의 의뢰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야?’
‘아마도.’
갑자기 튀어나온 김진선의 지인 때문에 자신이 짜 놓은 판이 어그러졌다는 말을 들은 현민이 욕을 삼켰다.
받아들이기 싫지만 주희의 말이 타당했다.
‘그래서 사과하란 거냐? 퍽이나 하회탈이 내 사과를 받고 살인을 멈춰 주겠군.’
‘혹시 모르지.’
‘됐어. 뭐가 됐든 옥상으로 가면 알 수 있겠지.’
‘현민이 말이 맞아. 이 일의 마지막은 옥상이었으니까 거기에 탈출구가 있을 거다.’
‘단서랑 다른 건 전부 그대로였어. 남은 건 옥상뿐이야.’
진성과 현민이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회탈을 만났다.
* * *
옥상에 도착한 두 사람이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여기에 탈출구가 있어야 할 텐데 보이는 게 없었다.
“씨발! 여기가 마지막 아니야?!”
“마지막 맞아. 여기서 더 갈 곳은 없어.”
“근데 왜 아무것도 없어!”
“씨발. 안 닥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주희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른 길을 모색했던 두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옥상을 보고 발작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을 전부 희생시켜서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이 막다른 길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지긋지긋한 발소리가 들렸다.
철퍽, 철퍽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했는지 흠뻑 젖은 발소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그 소리가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의 피 때문이란 사실을 잘 알았다.
퇴로가 막힌 두 사람이 폐교에서 찾은 마대 걸레의 봉을 들었다.
“씨발 이렇게 된 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본다.”
“둘이라면 어떻게 되겠지. 저 녀석도 지쳤을 거야.”
이때까지 몸 쓰는 일이 있으면 뒤로 물러나 있던 현민이 진성의 옆에 나란히 섰다.
마지막이 돼서야 앞에 나서는 이현민을 보고 진성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끼이이익
반쯤 열린 옥상 문이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이 올라올 때처럼 귀를 긁는 소리였다.
두 사람이 침을 삼켰다.
문이 열리고 온몸이 붉게 물든 하회탈이 걸어왔다.
철퍽, 철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