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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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게 말하던 남자가 갑자기 정색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말해. 도망이라고 가려고 했던 거야? 둘이서?”

“내가 민정이랑 무슨 도망을 가.”

“그게 아니면 왜 나한테 말도 없이 갔어.”

남자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연희는 그런 남자의 반응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는 거 아니었어?”

“….”

“민정이 집이 어딘지. 민정이 차가 뭔지. 우리가 어디로 갈지 다 알고 있었잖아.”

연희의 말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너 맞지?

민정이 죽인 거.

분노로 몸이 떨리려는 걸 간신히 막은 연희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남자의 앞에 선 연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죽였어.”

“….”

“민정이 왜 죽였어.”

참으려고 했는데 참지 못한 분노가 연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여자가 널 빼돌렸으니까.”

본인이 했다는 자백이었다.

“넌 내 건데. 그 여자가 뺏어갔잖아.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래서 죽였어.

두 번 다시는 나한테서 뺏어가지 못하게.

남자의 웃음소리가 지옥에서 올라온 것처럼 들렸다.

이명처럼 들리는 남자의 웃음소리에 연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는 내 거야. 영원히.”

남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수술실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단번에 살을 가를 수 있는 것.

메스였다.

“날 죽이려고? 사랑한다며.”

“맞아. 사랑해.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미친것처럼 사랑해만 말하는 남자를 보고 연희가 눈을 감았다.

마치 찌르라는 것처럼 몸을 내주는 것 같은 그녀를 보고 남자가 희열에 빠졌다.

‘너도 날 원하는구나! 그래, 영원히 함께하자!’

남자가 메스를 들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멈춰! 이현태. 당신을 우연희 씨 살인미수, 스토킹 혐의로 체포한다.”

또 우리 사이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나타났어.

누구도 우릴 갈라놓지 못해!

남자, 현태가 메스를 들고 연희한테 달려들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연희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메스를 쥔 이현태의 손을 연희가 두 손으로 붙잡았다.

“같이 가자, 연희야.”

“이현태, 멈춰어!”

광기 어린 남자의 두 눈.

남자의 뒤에서 덮치듯이 달려드는 형사들.

연희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두 손을 꼭 붙잡은 연희가 작게 무어라 말했다.

잘 들리지 않는 연희의 말을 들었는지 남자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뜨였다.

쿠당당!!

남자의 몸을 뒤에서 날아든 형사들이 덮쳤다.

* * *

다시 화면이 암전되었다.

조금 전 어두웠던 병실과 달리 재판장은 각양각색의 빛이 있었다.

“…피고인.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우연희… 입니다.”

“피고인에게는 진술 거부권이 있습니다.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네….”

형식적인 질문이 오갔다.

증인으로 김 형사가 발언했다.

“그때 현장은 전부 병실에 있던 카메라에 찍혀 있습니다. 우연희 씨는 흉기를 든 범인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범인을 덮쳤고 범인의 몸이 쓰러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흉기가 범인의 심장을 찌른 겁니다.”

“재판장님. 증인이 말했듯이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다. 우연희 씨는 범인이 흉기를 휘두를까 봐 꼭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변호사의 말을 들은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은 연희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스토킹 끝에 사람을 죽이고 스토킹 대상까지 살해하려 했던 범인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죽었다.

언론에서 떠들어대기 좋은 소재였다.

우연희가 경찰서에 찾아가 신고한 것도 있고, 친구와 주고받은 메시지도 있었다.

죽은 범인의 집에서 우연희를 스토킹했다는 증거도 넘쳐났다.

거기다 대포차를 구입했다는 것도 찾아냈으니 사건은 명확했다.

[…와 피해자가 메스에 심장이 찔려 사망한 결과와의 사이에서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것으로 동인의 사망에 대하여 과실책임을 면할 수 없다.]

판사의 판결에 재판장 안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억울한 피해자가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 막은 죄로 감옥에 가게 생겼다.

여성단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언론에서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피고인을 죽이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살해 도구를 준비해 온 점, 범행 검거 상황에서 우연히 일어난 점 등을 고려해 생명, 신체에 대한 침해행위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로 봄이 상당하다. 또한 피고인에게 폭행의 고의나 나아가 치사의 결과에 대한 예견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웅성거리던 방청석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판사의 입에서 나올 판결을 기대했다.

[따라서 본 법정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땅! 땅! 땅!

와아아아악!!!

법원의 판결에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정당방위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할 한국에서 드물게 정당방위가 인정됐다.

이걸로 대한민국이 또 한 번 들썩일 게 분명했다.

“우연희 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죄판결이 나왔으니 연희는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었으니 트라우마가 깊게 박혔을 게 분명했다.

“연희 씨. 힘들면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보세요.”

변호사의 말에 연희가 힘없이 웃었다.

판결이 끝나고 떠들썩한 법정을 보면서 연희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민정이 내 불쌍한 친구.

연희가 몸을 돌려 사라지는 친구에게 속으로 말했다.

‘네 복수를 했어, 민정아.’

이걸로 내 죄를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내가 죽고 나서 갚을게.

의미심장한 연희의 속마음에 관객들이 경악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화면이 서서히 아웃되더니 다시 어두웠던 병실로 돌아갔다.

메스를 든 현태의 손을 꼭 붙잡은 연희가 핏줄이 터질 것 같은 눈으로 현태에게 속삭였다.

“죽어.”

악에 찬 목소리에 현태가 눈을 크게 떴다.

현태의 뒤를 덮치는 형사를 본 연희가 온 힘을 끌어모아 메스의 방향을 바꾸었다.

원수의 심장이 있는 쪽이었다.

놀라운 반전에 관객들이 숨을 들이켰다.

스크린에 스태프 롤이 올라왔다.

짝… 짝

짝, 짝짝, 짝짝짝짝

넋을 놓고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를 시작으로 박수 소리가 뤼미에르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 해외 바이어들 주목…프랑스 비롯 주요 국가 판매 완료]

[‘거부할 수 없는, 사랑’ 해외 반응, 주요 외신들 “2018 칸에서 꼭 봐야 할 작품”]

[모든 게 완벽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쏟아지는 극찬!]

[칸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거부할 수 없는, 사랑’ 기립박수 무려 9분!]

[베일 벗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 우리가 외면했던 피해자의 목소리]

[오지한, 레드카펫에서조차 완벽한 남매]

281. 예사롭지 않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 5점 만점에 3.8 최고점!]

[‘거부할 수 없는, 사랑’ 평론가 평점 1위, 황금종려상 가나?]

[지연·강해성 ‘거부할 수 없는, 사랑’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경각을 알린 목소리]

칸에서 날아온 소식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한국에서는 새벽 시간이었음에도 기자들은 재빠르게 칸에서 날아온 소식을 날랐고, 자지 않고 깨어있던 팬들은 긍정적인 소식에 입을 틀어막고 날뛰었다.

라이브를 실시간으로 보기 위해서 알람을 맞춘 사람도 있었고, 불타오른 반응에 새벽에 잠에서 깬 사람도 많았다.

“지금 당장 기사 보내. ‘황금 종려상 유력!’이라고 말이야.”

“그렇지만 너무 설레발치는 게 아닐까요?”

“평론가들 반응 1위인 건 맞잖아.”

여기저기서 속보가 쏟아져나왔다.

대한민국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떠들썩할 때, 지연은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니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지 몸이 푹 가라앉았다.

화장을 지울 생각도 못 하고 소파에 늘어져 있는 누나를 보고 지한이 다가왔다.

“누나 괜찮아?”

“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가? 잘 모르겠네.”

“처음 데뷔할 때도 이렇게 녹초가 되진 않은 거 같은데 역시 10대랑 20대는 다른가?”

“무슨 소리. 국내 데뷔랑 해외 유명 영화제 데뷔랑 같은 줄 알아?”

지한의 말에 지연의 발끈하며 말하자 이제야 누나가 기운을 차린 것 같다며 지한이 웃었다.

동생의 놀림에 지연이 눈을 흘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화장 지우고 누워야지.”

“나도 화장 지워야 하는데.”

레드카펫 행사에 가느라 지한도 지연 못지않게 힘주고 꾸몄다.

힘 빡 주고 풀메이크업을 했으니 지우는 것도 일이었다.

남매가 몸을 느릿하게 움직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솜에 클렌징 오일을 묻혀 화장을 지우고 있을 때 지한이 말을 걸었다.

“누나. 마지막에 김 반장은 알았을까?”

“뭘?”

“연희가 일부러 메스를 가슴에 겨눴다는 거 말이야. 마지막에 법정에서 판결 난 다음 연희를 볼 때 김 형사 얼굴에 진한 감정이 떠오르던데 그거 일부러 그렇게 연기한 거 맞지?”

과연 내 동생.

그 짧은 순간에 잘 봤네.

“글쎄에?”

“뭐야. 말해줘.”

“내가 말해줄 게 뭐 있어. 관객이 느낀 그대로야.”

돌려서 말했지만 지한이 생각한 게 맞다는 뜻이었다.

의문을 해소한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도 그놈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아마도? 김 형사가 명색이 베테랑 형산데 사곤지 고의인지 알아봤겠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럼 형사님도 눈 감아 주신 거네.”

“어쨌든 스토커놈이 잘못한 거잖아. 연희는 피해잔데. 그거 알아? 저렇게 사람을 괴롭혀도 스토킹은 형량이 얼마 안 나온대.”

“그놈은 살인까지 했는데?”

“그 당시에는 살인했다는 증거가 없었으니까. 나도 영화 찍으면서 알았는데 스토커는 고작 벌금 10만 원 내는 게 다래.”

누나의 말에 지한이 화장을 지우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돌아보는 동생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렇지? 나도 처음 했던 생각이 그거였어. 사람을 피를 말려 죽이는데 고작 벌금 10만원이 뭐야.”

“내 말이. 아! 그럼 연희가 병실에서 스토커 처벌을 본 이유가?”

“맞아. 그거 때문이야. 고작 10만 원이니까. 차라리 감옥이라도 갔으면 연희가 자기 손으로 그놈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거야.”

지한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나라도 그놈을 직접 죽였을걸?

“처음에 편의점에서 과장 얘기한 것도 나중에 범인이 편의점 알바생이란 걸 암시하기 위한 거였어. 와. 강 감독님 복선 잘 깔아두셨네.”

“그거 알아? 그 편돌이가 연희를 스토킹한 것도 연희가 계산하고 나서 처음으로 눈 마주치면서 ‘감사합니다’라고 한 거 때문이었다?”

“뭐야. 겨우 그거 때문에?”

“애정망상형 스토커들은 그럴 수 있대.”

“애정망상형. 무섭네.”

소름 돋는다는 듯이 지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생이랑 같이 거.사에 대해서 떠들던 지연이 거울에 비친 시계를 확인했다.

이런! 이러다가 밤새우겠네.

“얼른 씻고 자자. 이러다가 내일 못 일어나겠어.”

“아. 내일은 아침부터 준비해야 하는구나. 싫다.”

“내일은 네가 주인공이잖아. 자, 얼른 자야지. 팩 붙여줄게.”

“팩 붙이면 그대로 자는데.”

“내가 떼 줄게. 얼른.”

지연의 지한의 등을 두드리며 세면대로 이끌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었지만 내일은 동생이 주인공이었다.

암, 내일 칸의 주인공은 내 동생이지!

* * *

지연의 예상대로 15일 칸의 밤은 ‘장난’에 대한 것으로 시끄러웠다.

전날 뜨거웠던 열기가 ‘장난’ 팀에게로 옮겨진 듯, 지연의 작품이 언급되면 언급될수록 지한의 작품 역시 주목받았다.

이 놀라운 남매들이 칸에서 일을 치를 것이란 강한 예감에 외신들도 장난의 레드카펫 현장에 모여들었다.

레드카펫으로 출발하기 전, 호텔 로비에서 지연이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동생을 보았다.

크. 오늘도 역시 반짝반짝하구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이 부실 정도로 꾸민 동생을 보고 뿌듯하게 웃던 지연이 지한에게 물었다.

“안 떨려?”

“안 떨려.”

“밖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데?”

“전부 우릴 좋아해 줘서 기대하는걸. 그런 걸로 부담을 느끼진 않아.”

남매가 서로를 보고 웃었다.

어제 지한이 거.사 레드카펫을 걸었던 것처럼 오늘은 지연이 장난의 레드카펫을 걷는다.

같은 날 전 세계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갤럭시워즈의 상영이 있었지만 ‘장난’에 대한 취재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지연이 다시 한번 지한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을 때 잔뜩 지친 몰골로 영훈이 다가왔다.

“얘들아. 이제 나갈 거야.”

“알았어, 오빠.”

“지연이랑 지한이 모두 프리미어 끝나고 인터뷰 있는 거 안 잊었지? 영화 보러 간다고 나가면 안 돼.”

“알았어. 그거 때문에 하루 비워뒀잖아.”

남매가 입을 삐죽였다.

블레스에서 미리 잡아둔 인터뷰였다.

어제 거.사가 난리가 난 뒤라 미리 인터뷰를 잡은 곳에서는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그쪽에서 꼭! 꼭! 인터뷰해 달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가볼까?”

“가자.”

남매가 레드카펫으로 향했다.

* * *

꺄아아아아아악!!!!!!!!!!

차에서 장난 팀이 내리자마자 팬들이 귀를 먹게 할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장난 팀들이 어깨를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난 팀에서 칸의 레드카펫을 밟아본 사람은 박범수 감독이 유일했다.

“어떡해요. 저 심장이 멎을 거 같아요.”

“우황청심환 드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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