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길이 코앞이었다.
관객들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뒤따라오던 검은 사내와 연희가 몇 걸음 차로 좁혀졌을 때 연희의 앞으로 차가 급정거했다.
“빨리 타!”
민정이었다.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미팅을 빨리 끝내고 왔는데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조수석에 연희가 타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간발의 차로 연희를 놓친 사내가 분노한 듯 멀어지는 민정의 차를 노려보았다.
* * *
민정이 집으로 데려와 연희를 진정시켰다.
친구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지, 집에 왔는데 뭔가 이상했어. 누가 들어온 거 같은데. 속옷 순서가. 그제랑 달랐는데.”
“괜찮아. 지금은 생각 안 해도 돼.”
“나. 너무. 무서웠, 어어엉!!”
연희가 민정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우는 연희의 등을 민정이 토닥였다.
민정이 연희를 진정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아. 경찰서.”
“왜? 그놈 때문에?”
“집까지 찾아왔어. 그놈 완전 미친 싸이코 스토커야!”
과장하는 친구의 행동에 연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집까지 침입했으니까 엉덩이 무거운 공무원들도 움직이겠지. 아. 블랙박스에 그놈이 찍혔으려나? 그것도 같이 줘야겠다.”
“같이 가.”
“여기서 좀 쉬고 있어.”
“혼자가 더 싫어.”
혼자서도 놀러 잘 다니던 연희의 예전 모습을 떠올린 민정의 얼굴에서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놈을 잡으면 연희도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민정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까? 나가자.”
“응.”
민정의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나가게 됐다.
주차장에서 민정과 함께 차에 올라탄 연희가 안전벨트를 맸다.
“자 출바알~!”
“아. 그런데 내가 접수한 경찰서로 가야 할 텐데.”
“가면 돼지.”
민정이 일부러 텐션을 높이며 말했다.
가는 동안 울적한 기분을 다 털어내라는 듯이 민정이 노래를 틀었다.
연희가 좋아하는 프리티큐어의 주제가였다.
♬행복해지는 마법 같아♬
어느새 연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꽈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천지가 뒤집혔다.
* * *
뒤집힌 차량 안에서 연희가 신음을 흘렸다.
“으윽.”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연희가 힘겹게 눈을 떴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분명 민정이랑 같이 경찰서로 가고 있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큰소리가 나서.
“! 민정아!”
사고가 난 걸 알아차린 연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에어백이 터진 운전대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민정이 보였다.
“민정아. 흐윽. 민정아아.”
연희가 잘 들리지 않는 팔을 들어 민정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민정의 몸에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경찰은 이번 일을 사고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연희의 증언과 뺑소니 차량이 대포 차량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스토킹에 의한 강력 사건으로 흘러갔다.
까칠한 피부와 움푹 팬 눈두덩이를 한 남자 둘이 병실로 들어왔다.
병실 한쪽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누워있는 연희에게 다가간 두 사람이 경찰신분증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우연희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연희의 고개가 움직였다.
넋을 놓은 피해자의 모습에 형사들은 한숨을 삼켰다.
조금 더 일찍 움직였다면 피해자가 이런 모습이진 않았을 텐데.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편의점 CCTV와 우연희 씨가 사는 빌라 CCTV. 근처 차량의 블랙박스와… 최민정 씨의 차량 블랙박스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용의자를 발견했단 소식에 연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민정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분노가 남았다.
영혼을 잃은 듯 누워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연희가 사고로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친구를 잃은 피해자의 분노에 같이 온 형사가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 보신 적 있습니까?”
CCTV와 블랙박스에 찍힌 것을 현상한 사진이었다.
연희가 유심히 사진 속 남자를 노려봤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연희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
“아는 얼굴입니까, 우연희 씨?”
“이 남자 누굽니까?”
용의자를 알아본 것 같은 연희의 모습에 형사들이 달려들었다.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희 집 근처 편의점 알바생이에요. 아! 그래서 편의점 택배로 보낸 거였구나.”
너였구나.
검은 사내의 정체를 안 연희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네가 민정이를 죽였어.
* * *
정체를 안 형사들이 범인의 집을 급습했으나 이미 범인은 떠난 뒤였다.
“하아. 이 미친 새끼 어디로 튄 거야.”
사건을 맡은 형사가 욕을 하며 흔적을 뒤졌다.
“김 형사님! 여기 와 보십시오!”
“뭡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들어간 김 형사는 깜짝 놀랐다.
방 안이 온통 우연희 씨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직접 현상도 했는지 곳곳에는 도촬한 사진들이 붙여져 있었으며 기념품을 장식하듯이 벽에 나란히 있는 선반들에는 연희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미친 새끼.”
범인이 가진 비정상적인 집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에 김 형사가 욕을 지껄였다.
이놈은 정상이 아니었다.
“혀, 형사님.”
“또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 형사가 다가갔다.
범인의 일기장으로 보이는 노트였다.
그곳의 마지막 페이지에 오싹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제 널 데리러 갈게.]
사고를 낸 다음 날이었다.
누굴 데리러 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지금 당장 우연희 씨 입원한 병원에 사람 보내!”
* * *
“그러니까 그놈이 절 데리러 온다고 했단 말이죠.”
“네. 이놈 사람까지 죽인 놈입니다. 우연희 씨를 데려간다는 게 좋은 뜻일 거 같지 않습니다.”
형사의 말을 이해한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놈이 날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그렇게 날 괴롭히고
내 친구까지 죽였으면서
이제는 날 죽이겠다고?
연희가 이를 악물었다.
“제가 이놈을 유인할게요.”
“위험합니다.”
“저는 이놈이 잡히는 모습을 꼭 봐야겠어요.”
차갑게 불타는 연희의 의지에 김 형사는 말문이 막혔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피해자들이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저희가 계속 함께 있을 겁니다. 위험하게 두진 않겠습니다.”
“네. 믿어요.”
연희가 믿는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그 미소에서 뭔가 찝찝함을 느낀 김 형사였지만 이내 경찰 배치를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김 형사의 눈에 연희의 폰이 보였다.
‘스토킹 처벌?’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찾아본 모양이었다.
김 형사가 병실 입구에 경찰을 세워두며 잘 지키라고 말했다.
적막한 병동.
고통에 신음하던 환자들도 깊은 잠에 든 시각.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걸어왔다.
손에는 의사들의 단골 메뉴라는 믹스커피를 들고 수술복 위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연희의 병실이 있는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비상구로 향하는 길.
그 길목에 연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이 있었다.
의사가 환자의 이름이 적혀있는 팻말을 보았다.
“야. 일어나.”
“네에?”
“놈이다.”
김 형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연희의 이름을 보는 의사를 보았다.
그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저놈이 범인이다.
“그냥 의사잖아요.”
“회진 시간도 아닌데 의사가 왜 병동에 있어.”
“바람 쐬러 가는 길 아니었을까요? 지금 막 수술 끝내고 나온 거 같은데요.”
“병원 한두 번 와 보냐. 어떤 의사가 수술 막 끝내고 1인실 병동에 찾아와.”
김 형사의 말에 옆에서 얼타던 형사도 정신을 차렸다.
그의 말대로 회진도 아닌데 의사가 병실에 온 게 수상했다.
저놈이 의사처럼 손에 믹스커피를 탄 종이컵을 들고 있어서 깜빡 넘어갈 뻔했다.
병원에서 만난 다른 의사처럼 위화감 없는 모습이라서 몰랐다.
“병실 카메라는 어때.”
“잘 켜져 있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들어간다.”
“넵.”
이건 우연희 씨의 협조를 구한 일이었다.
아직 저놈이 뺑소니범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저놈의 집에는 우연희 씨를 몰래 찍은 사진만 있어서 성폭력 특별법에 따른 처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직접 현장을 덮쳐야 했다.
병실 앞에서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모습에 김 형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연희가 눈을 떴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눈꺼풀이 부드럽게 열렸다.
연희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두운 그림자가 문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놈이었다.
놈이라는 걸 확신한 연희가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이 왔는데도 놀라지 않는 모습에 남자가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남자를 보고 연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왜 이제 왔어.”
다정한 연인처럼 스토커를 반기는 연희의 모습에 관객들이 오싹함을 느꼈다.
연희는 두려워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알았던 사람처럼 편하게 그를 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친 건가?’
‘아니면 너무 화가 나서 차분해 보이는 건가?’
‘아니야. 저건 일부러 다정한 척하는 거야.’
지연의 연기를 보던 관객들이 연희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팔을 쓸었다.
“이리 와.”
연희의 말에 남자가 반응하지 않던 몸을 움직였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남자의 입가엔 어느새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날 기다렸어?”
“응. 날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내가 당연히 데리러 와야지.”
마치 친구 집에서 놀다 온 연인을 데리러 가는 것처럼 말하는 스토커의 모습에 관객들이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틀어막았다.
“미친.”
병실에 숨겨둔 카메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형사는 욕을 뱉었다.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김 형사님. 저놈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닙니까?”
“미친놈이지. 지금 자기가 우연희 씨 남자친구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와아. 완전 또라이네.”
스토킹은 정신병이 맞았다.
가볍게 생각했던 스토킹 범죄의 진면목에 두 형사의 이마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그런데 나한테 말도 없이 갑자기 친구 집에 왜 간 거야?”
다정한 연인처럼 말하는 남자의 말에 두 형사가 합죽이가 되었다.
저놈의 머릿속에서는 우연희 씨와 자신이 사귀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는 모양이다.
망상. 집착. 소유욕
그것이 뒤섞인 덩어리가 바로 남자였다.
“민정이니까. 하루쯤 자고 올 수 있지.”
“하루만 자려던 게 아닌 거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