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아닌데요? 왜 그러세요?”
“그게 아니면 우 대리님을 짝사랑하는 누군가가 보냈나 봐요. 총무한테 가 보세요. 우 대리님 앞으로 선물 왔어요.”
본인이 더 떨린다는 듯이 소식을 전한 여사원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봤다.
왠지 일어나서 선물을 가져와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티션 몇 개를 지나자 총무가 택배원이 주고 간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아. 우 대리님.”
“안녕하세요.”
회사 내 유명인사인 연희를 본 총무가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총무가 연희에게 택배를 내밀었다.
이건 택배라기보다 케이크 상자?
“요새는 이런 것도 배달되고 정말 좋은 세상이네요.”
“네에. 그렇죠?”
“오늘 생일이죠?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회사에서 몇 번 오가다 본 총무의 축하 인사에 연희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케이크야 친구들이 보냈다 치고, 꽃은 뭐지?
그런데 내 친구들이라면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랑 굿즈 살 때 보태라고 현금을 쏴 줄 텐데.
생소한 생일 선물에 연희는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꼈다.
그래도 직장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지인이 보냈을 거라며 피어오르던 의심을 털어낸 연희가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케이크 내가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말한 케이크랑 비슷하네.’
친구들끼리 대화하다가 SNS에서 본 케이크랑 상자가 비슷해 보였다.
* * *
“진짜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면 누구지?”
-보낼 사람 더 없어?
“없어. 나 인맥 좁은 거 알잖아.”
-덕질하면서 만난 지인들은?
“나 철저하게 신상 안 밝히면서 활동하는 거 알잖아. 현모(현실모임)한 적도 없어.”
-그건, 그렇지.
연희가 피규어와 케이크를 보낸 주인을 수소문했으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도대체 누가 이걸 보낸 거지?
-혹시 누가 네 해코지하려고 보낸 거 아니야?
“에이. 누가 날 해코지 해.”
-왜? 저번에 네가 김 과장이 껄떡댄다면서 짜증 냈었잖아.
“김 과장 껄떡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여직원한테 들이대는 사람이 무슨 앙심을 품어서 나한테 해코지해?”
-그런가? 아무튼 뭔가 이상하니까 함부로 먹지 마.
“그게, 회사 사람들이 내가 케이크 받은 거 다 알아서 그냥 직원들이랑 나눠 먹었어.”
-뭐어?! 하여튼 조심성이 없다니까. 배탈은 안 났어?
“다들 멀쩡해.”
통화를 하면서 집으로 가던 연희가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에서 라면이랑 맥주 한 캔을 산 연희가 계산대로 향했다.
-아무튼 조심해.
“알았어.”
“이거 1+1이에요.”
“아. 그냥 주세요.”
“네. 11,900원입니다. 봉지 50원인데 드릴까요?”
“네.”
계산을 마친 편의점 알바생이 봉지에 물건을 담아주었다.
봉지를 건네받는 손이 살짝 스쳤다.
연희가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까닥인 후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딸랑
편의점 문이 닫혔다.
그리고 민정과 통화를 한 다음 날.
“세상에, 우 대리님 그거 들었어요?”
“뭘요?”
“과장님 말이에요. 오늘 출근하다가 지하철 계단에서 굴러서 지금 병원이래요!”
“네? 우리 회사 앞에 있는 지하철 계단이면 경사가 엄청 높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구를 때 머릴 박았는지 지금 응급실에 있대요. 검사해 보고 문제 있으면 수술해야 할지도 모른다던데요?”
“세상에.”
연희가 입을 가렸다.
* * *
무심코 지나가면서 흘렸던 말.
SNS에 사진을 올리며 태그했던 내용.
직장에서 남몰래 앓고 있던 문제까지.
1번이면 우연이라고 하지만 3번이나 일어났으면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과장의 일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연희는 무언가 꺼림직함을 숨길 수 없었다.
연희의 주변에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미스테리해진 분위기에 극장 안에 소리 없는 술렁임이 훑고 지나갔다.
처음 잠깐 나온 뒤로 계속 부드러운 분위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연희는 황토색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연희가 죽은 눈으로 살고 싶었다고 말한 것일까.
관객들이 숨죽이고 영화를 지켜보았다.
초반에 있었던 분위기를 지우기라도 하듯이 영화는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뭔가 꺼림직하다고 느낀 날부터 연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에이. 과장까지 너랑 관련이 있을 거란 건 너무 비약 아니야?
“그럴까? 그렇지만 민정아. 택배랑 케이크는 뭔가 이상해. 솔직히 택배 송장에 네 이름이 있어서 그냥 열어 봤거든? 그런데 네가 보낸 게 아니라고 하니까 뭔가 좀 그래.”
-그럼 택배사에 물어보면 되지 않아? 송장 번호 있으면 바로 조회해줄걸?
친구의 말을 들은 연희가 다음 날 바로 택배회사에 전화했다.
-그 택배는 KS편의점 길동점에서 수거가 된 택배입니다.
KS편의점 길동점.
며칠 전 연희가 라면과 맥주를 샀던 곳이자 집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는 편의점이었다.
등을 타고 올라온 오싹함이 연희의 목을 조였다.
* * *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이 든 연희가 경찰서를 찾아갔다.
택배 상자와 케이크와 함께 온 생일 축하 카드, 시든 꽃다발까지 모조리 들고 경찰서를 찾은 연희를 보고 경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겨, 경찰 아저씨. 제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요.”
“예?”
예쁜 얼굴 덕에 친절함이 머리끝까지 차 있는 상태였지만 연희의 말에 모여들었던 경찰관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하지만 민원인이 불안해 보이는 상태였기에 경찰관들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대화를 이끌었다.
“어떤 일이요?”
“친구 이름으로 택배가 왔는데 그게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제 집 근처 편의점에서 부쳐진 거였어요. 그리고 회사로 생일 축하 케이크랑 카드가 왔는데 아무도 보낸 적이 없대요. 그런데 제 생일인 건 알고 있었어요. 근데 케이크가 친구들이랑 얘기하면서 본 가게에서 산 거 같아요. 또, 회사에서 좀 그랬던 상사가 있는데 며칠 전에 지하철에서 굴러서 지금 입원 중이에요.”
연희의 말이 이어질수록 경찰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택배랑 케이크는 친구들이 보내고 깜빡한 거 아닌가?
아님 서프라이즈인 것 같고.
상사가 지하철에서 구른 건 그냥 사고 같은데.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우, 우연희요.”
“선생님, 그러니까 선생님 주변에 이상한 일이 계속 생긴다는 거죠?”
“네네.”
구체적인 피해 사실도 없고, 의심할 만한 정황도 안 보였다.
경찰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선생님. 혹시 가져오신 거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연희가 가져온 송장과 택배 물건, 메시지 카드, 꽃다발을 내밀었다.
“일단 저희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선생님 성함이랑 연락처 남겨주시겠어요?”
연희가 펜을 들어 연락처를 남겼다.
이름과 번호가 삐뚤빼뚤하게 적혔다.
* * *
사건 조사를 맡겼는데 경찰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연희는 평소 들르던 편의점도 들르지 않고 집과 직장만 반복했다.
택배시킬 것이 있으면 집보다 직장으로 받아 직접 들고 오게 되었다.
빨리 집으로 가고자 하는 연희의 마음을 반영한 듯 발걸음이 예전보다 빨라졌다.
또각또각또각
연희가 걸음을 옮길 때,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우연이겠지.’
경찰서에 갔다 온 이후 잠잠하지 않았던가.
아직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정하면 안 돼.
연희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상황을 가정했지만 불안을 잠재울 순 없었다.
괜찮을 거라며 자기암시를 걸면서 연희가 속도를 조금 높였다.
또각또각또각
뚜벅뚜벅뚜벅
마치 화음을 쌓는 것처럼 연희의 발소리 위에 다른 발걸음 소리가 얹어졌다.
자신과 속도를 맞추는 발소리에 연희의 얼굴에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갑게 굳었다.
이젠 무시할 수 없었다.
낮은 구두를 신은 연희의 발과 그녀의 뒤를 쫓는 검은 운동화가 화면을 양분했다.
일부러 연희의 걸음을 맞추듯 검은 운동화의 보폭이 줄었다.
꿀꺽
묘한 긴장감에 영화를 보면 관객들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연희가 이제 뛰는 것처럼 걸었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시커먼 등은 먹잇감을 모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다급한 연희가 집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집에 가도 되나?’
뒤따라오면 어떡하지?
내 집을 알려주는 꼴이 되지 않을까?
이대로 집에 가면 나 혼자 있는데 더 위험하지 않을까?
연희의 얼굴에서 수많은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골목길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부아아아아앙!
배달 오토바이가 연희가 있는 골목을 가로질러 왔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지금 저녁 시간이었지.’
배달이 많을 시간이었다.
살짝 긴장이 풀린 연희가 뒤를 힐끔거렸다.
오토바이들이 지나가서인지 뒤를 쫓던 인기척은 사라졌다.
“휴우우.”
안도한 연희가 재빨리 걸음을 옮겨 빌라로 들어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연희를 따라 등이 켜졌다.
연희가 집에 들어가고 계단을 비추던 등이 차례대로 꺼졌다.
건물 밖에서 마지막으로 불이 꺼진 3층을 바라보며 검은 사내가 웃었다.
280. <거부할 수 없는, 사랑>(2)
“그래서 경찰은 뭐래!”
“뭐라기는 아직 조사 중이라고 하지.”
“어휴. 답답하다. 답답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스토커 붙은 거 같은데. 경찰한테 스토커 같다고 얘기해 봤어?”
“말 안 해도 알지 않을까? 어제 같은 일은 처음이라서 아직 말 못 했는데.”
“어이구!”
민정이 가슴을 쳤다.
친구 주변에서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걱정했는데 어제는 누가 따라오는 기척까지 느꼈단다.
덕분에 옷가지를 챙겨 온 친구가 오늘 자신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너 위험한 거 아니야? 안 되겠다. 우리 집이 더 보안이 좋으니까 당분간 와서 살아.”
“어떻게 그래.”
“그럼 부모님이 계신 창원으로 내려가기라도 할 거야?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짐 챙겨서 나와.”
“알았어. 그럼 내일 후딱 갔다 올게.”
“같이 가 주고 싶지만 내일 미팅이 있어서. 나 미팅 끝나고 같이 가자.”
“금방 다녀올 건데 뭘. 속옷이랑 출근복만 몇 벌 챙겨올게.”
“혼자 괜찮겠어?”
“괜찮아.”
친구한테 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딱 봐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민정이 혀를 찼다.
하여튼 사람이 좋아서 탈이야.
그러니 이상한 놈이 붙은 것 같다며 민정이 한숨을 삼켰다.
다음 날. 미팅을 나간 민정의 집에서 연희가 혼자 나왔다.
폰이랑 지갑만 챙겨 집으로 향한 연희가 문을 연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집이 뭔가 달랐다.
연희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가, 뭐가 다르지?’
두려움에 휩싸인 연희가 손을 떨었다.
“이러고, 이럴 게 아니라. 짐을 챙겨야, 하는데.”
연희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옷장으로 향했다.
뭐가 다른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손에 잡히는대로 잡아 가방에 넣는데 속옷을 넣어둔 곳이 이상했다.
어제도 이 순서였나?
위화감에 정체를 알아차린 연희가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누군가가 집에 다녀갔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신물에 연희가 필요한 걸 대충 집어넣고 집에서 나왔다.
‘진정해. 긴장하지 마.’
민정이 그랬다.
관종은 무시가 답이라고.
그러니까 태연하게.
연희가 차분한 얼굴을 가장하며 건물에서 나왔다.
택시가 보이면 바로 잡아타자.
연희가 골목을 하나 꺾었을 무렵 빼곡히 주차된 차들 사이로 온몸을 무장한 한 남성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나왔다.
저벅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연희의 귀에는 들렸기에 연희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도망치려는 자와 쫓아가는 자가 눈치싸움을 벌였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턱에 힘을 꾹 주었다.
오른발을 뗐다.
왼발을 뗐다.
천천히 연희가 걸음을 옮겼다.
관객들이 두 사람의 눈치싸움에 숨을 멈췄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질 때 돌연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졌다.
주륵
“윽!”
추운 날씨에 꽁꽁 언 도로를 어떻게 할 순 없었다.
“하악, 흡.”
넘어진 게 기폭제가 된 것처럼 지연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골목을 뛰어갔다.
도망가는 자와 쫓는 자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다닥, 다다닥
타다다다닥
넘어진 연희가 다쳤는지 쩔뚝거리며 뛰었다.
검은 사내는 그런 지연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았다.
난데없는 추격전에 화면이 빠르게 움직였다.